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8
4. 어떤 솔거의 죽음(조정래) 줄거리
어느 날 성주(城主)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기 위해 뛰어난 화가를 구해 오라고 명령한다. 화가는 성주와 신하들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엿새 동안 성주를 치밀하게 관찰한 뒤 나흘만에 그림을 그려 바친다. 하지만 그림을 본 성주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노하여 화가를 옥에 가두고 만다. 그리고 화가와 동문 수학(同文修學)한 지루가 나타나 원래의 모습과는 딴판인, 지극히 인자한 모습의 영정을 닷새만에 그려낸다. 결국 지루는 후한 상을 받고, 화가는 형장으로 끌려가고 만다. (1977년 )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배경 : 특정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없음.
성격 : 우화적 수법
주제 : 진정한 화가(예술가)의 사회적 책임
이해와 감상
잠수함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큰 고민거리는 잠수함 안의 산소량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잠수함이 출항할 때 토끼 한 마리를 함께 태우는 방법이었다. 지상의 동물들 가운데 산소에 가장 민감한 동물이 토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랜 잠수 항해 중 토끼의 행동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면 산소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신호로 여기고 서둘러 떠올라 산소를 충전하였다. 결국 토끼가 잠수함 속의 수많은 인명을 보호하는 산소 측정계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회와 예술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잠수함이 사회라면, 토끼는 예술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잠수함 속의 공기가 오염되면 제일 먼저 토끼의 호흡이 불편해지듯이, 사회가 불의와 부패로 얼룩지면 예술가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고통받게 마련이다. 그것은 예술가야말로 토끼처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재료로 삼아 예술 활동을 펼친다. 그런데 악취가 풀풀 풍기는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인간 정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한 사회나 시대의 본질은 그것을 배경으로 한 예술가나 예술 작품을 통해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래, 예술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갈등과 교체를 반복하여 이어져 왔다. 우선 예술이란 바깥 세계와는 철저히 무관한 영역이라는 시각이 있다. 즉 예술가가 살았던 사회나 시대, 개인적 경험 등에 상관없이 단지 예술 작품 자체만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시각은 예술가가 살았던 사회나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예술을 바라보는 것은 애초부터 그릇된 것이라고 본다. 예술가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창작품에는 그 사회와 시대의 향기가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항상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고 좀더 진실하게 사회와 시대를 그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조정래의 “어떤 솔거의 죽음(1977)”의 주인공 역시 화가, 곧 예술가이다. 어느 날 성주(城主)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기 위해 뛰어난 화가를 구해 오라고 명령한다. 화가는 성주와 신하들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엿새 동안 성주를 치밀하게 관찰한 뒤 나흘만에 그림을 그려 바친다. 하지만 그림을 본 성주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노하여 화가를 옥에 가두고 만다. 그리고 화가와 동문 수학(同文修學)한 지루가 나타나 원래의 모습과는 딴판인, 지극히 인자한 모습의 영정을 닷새만에 그려낸다. 결국 지루는 후한 상을 받고, 화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소설은 끝난다. “어떤 솔거의 죽음”은 시대와 장소를 짐작할 수 없는 막연한 배경을 무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것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우화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는 “이솝이야기”를 읽으며 그것이 단순히 동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물들은 그저 가면을 쓴 인간들의 분신(分身)이며, 인간 세상의 다양한 상황들을 풍자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우와 포도”를 읽은 뒤 여우의 처지를 비웃기보다는 쉽게 자족(自足)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인간들의 행태를 씁쓸히 곱씹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은근히 빗대어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 “어떤 솔거의 죽음” 역시 성주와 화가의 모습을 통해 의롭지 않은 권력과 예술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우화적 수법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한편, 작품 제목이 왜 “어떤 솔거의 죽음”인지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솔거는 황룡사(黃龍寺)의 벽화 “노송도(老松圖)”를 그린 신라 진흥왕 때의 화가이다. “노송도(老松圖)”는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유명한 그림이다. 따라서 작가가 주인공을 ‘어떤 솔거’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가 모든 뛰어난 예술가를 대표하는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루 빨리 그림을 완성하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대상인 성주를 꼼꼼히 관찰한 뒤 신중하게 영정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틀림없는 성주의 판박이 그림이었다. 그러나 성주는 자신의 탐욕스러운 외모가 그대로 담겨 있는 그림을 보고 격분하며, 간사한 신하들도 진실을 왜곡하고 만다. 결국 성주와 신하들이 원한 그림은 일방적으로 성주를 찬양하는, 왜곡된 거짓 그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는 현실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이야말로 그림의 본질이라고 믿어 왔다. 그것은 화가의 스승의 가르침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가는 스승의 명에 따라 낙산에 가 맑은 일출 장면을 그리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끝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지루가 화려한 일출 그림을 뽐내는 것과 달리 화가는 백지를 스승에게 보이고 절망과 실의에 빠지지만, 스승은 그가 바로 자신의 후계자임을 선언한다. 스승이 원한 것은 진실마저 감추어 버릴 수 있는 뛰어난 손재주가 아니라 진실의 힘을 인정하는 예술가의 품성이었던 것이다. 조정래는 1970년대에 발표한 중․단편 소설들을 통해 물질주의가 낳은 병폐와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 부정한 권력에 대한 지식인과 예술가의 저항 등을 신랄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역사가 아닌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를 억누르는 모순의 원인을 규명하려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을 자랑하는 작가이다. 우리 민족의 굴절된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하여 우리 문학사의 한 정점을 차지한 “태백산맥”과 “아리랑”에 이르기까지 조정래는 지칠 줄 모르는 문학적 탐구를 계속해 왔다. 그리고 “어떤 솔거의 죽음”은 그러한 작가의 예술가관을 명확하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진정한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 현실의 모습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사람이 아닌가. 작가는 ‘사회와 시대가 고통스럽고 암담할수록 예술가의 책임과 역할은 더더욱 무거워진다.’고 말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거짓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던 시절, 조정래는 또 다른 ‘솔거’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오세영-의롭지 않은 시대를 사는 예술가의 고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