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를 바라보며
김기영
창밖에 감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저 감나무를 보기 위해 창을 일부러 열어둔다.
그 시절, 그 작은 시골 마을. 우리는 무던히도 가난했다. 식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증조할머니, 할머니, 부모님, 장가 못 가 얹혀사는 노총각 막냇삼촌, 그리고 우리 다섯 형제가 한 지붕 아래에서 복작거리며 살았다. 가난하고 다난한 시절이라 해도 근심과 걱정은 언제나 어른들의 몫이었다. 우리 다섯 형제는 항상 신나게 놀며 지냈다.
특히 지역농협에 다니는 막냇삼촌은 다달이 ‘어린이동산’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주었는데, 그 잡지가 우리 형제의 심성과 지성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만화로 엮은 위인 이야기, 배꼽 잡고 웃던 깔깔동산, 제법 무게감 있는 어른들의 기고문까지, ‘어린이동산’은 심심하던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렸던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떠먹여 주시는 것들을 새끼 새처럼 입만 야금 벌려 받아먹곤 했다. 넓지 않은 마당 텃밭에 어머니가 심으신 상추, 파, 가지가 우리의 살을 이루었고, 할머니가 새벽부터 나가 기르신 부추, 옥수수, 고추, 고구마는 우리의 뼈에 스며들었다.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어린 것들의 배를 채웠고, 변소 한 가득 채운 우리의 똥이 퇴비가 되어 다시 땅을 비옥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돌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으셨다. 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그 감나무는 이미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풍성한 소출을 내는지 온 식구가 배부르도록 감을 따먹고, 곶감도 해먹고, 이웃과 나눠 먹어도 남았다. 그러고도 꼭대기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게 많아서 까치들이 얼씨구나 쪼아 먹곤 했다.
감나무는 인정과 따뜻함, 그리고 나눔을 상징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그 흔한 감나무를 볼 때마다 그 시절 그곳이 아련하고 아름답게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도 돌아가셨지만, 추억은 감나무 향기를 타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다. 그래서인지 감나무를 마치 형제처럼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키우셨고, 감나무도 할아버지가 기르셨으니 왜 안 그럴까. 철없는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턱이 없었지만, 그저 가을에 감을 주는 나무가 고맙고,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커다란 나무가 소중했다.
팍팍한 살림이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따뜻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신은 꽃과 나무를 사랑하셨다. 마당 텃밭에는 반찬으로 삼을 상추, 파, 가지 외에도 무화과나무가 곧게 자라 있었고, 마당과 대문 사이의 공간에는 포도나무를 심어져 있어 여름의 뙤약볕을 몽땅 막아주었다.
어머니는 여름에는 감나무 밑에 평상을 두셔서 식구들은 거기 앉아 밥을 먹곤 했는데, 포도가 열리는 늦여름쯤에는 항상 포도나무 아래에 평상을 두셨다. 우리 형제들은 언제나 그 평상 아래에서 뒹굴다가 벌떡 일어나서 잘 익은 포도를 골라 집고는 한 송이씩 따먹곤 했다. 시큼한 트림이 나오도록 포도를 먹어대도, 다음날 또 그렇게 먹어대고 또다시 먹어대도 포도나무가 마법을 부리는 것인지 포도는 항상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 동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포도를 정신없이 먹느라 손톱이 보랏빛으로 물드는지도 몰랐다. 그 물이 빠질 때쯤 울적해하며 밀린 여름방학 숙제를 해야 했다.
시골에서는 아이들도 제법 바쁜 법이라서 숙제하랴, 일손 도우랴, 여름의 끝자락엔 모두가 분주해진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고추밭 경계에 옥수수를 심어두셨는데, 우리는 몽땅 그리로 달려가 광주리 한가득 담은 옥수수를 이고 집으로 오곤 했다. 덤벙대는 나는 다리를 건널 때 종종 개울로 옥수수를 떨어트렸는데, 어머니께 야단맞을까 두려워 개울로 뛰어들다가 옷이 몽땅 젖기도 했다. 옥수수 하나 건지려다가 되레 내 옷이 몽땅 젖어버린 꼴이라서 야단을 곱절로 맞아야 했다.
시골에서 제법 사는 집 아이는 비디오로 내게 자랑하곤 했다. 왜 안 그랬겠는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도시에 나갈 때마다 빌려온 만화영화는 그 자체로 골목의 권력이었는데. 그 아이가 방바닥에 누워 리모컨을 까딱까딱 할 때면 마치 임금님이 누워 계신 듯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여름이 되면 상황은 내게 더 유리해졌다. 우리 집 포도가 그렇게도 달달했던 덕분이었다. 녀석은 포도 한 송이 얻으려고 내게 굽실굽실, 아주 비굴한 낯빛을 보이곤 했는데, 나는 포도나무가 더 버텨주길 속으로 바라면서 포도 과즙처럼 달달한 나날을 보내곤 했다.
그 녀석은 식탐이 강했던지 무슨 장난기가 발동했던지, 어느 날 내게 살구 서리를 제안한 적이 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살구나무를 심은 집이 있었는데,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살구를 볼 때마다 나도 군침이 돌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흔쾌히 동의를 하고, 그 집이 비었을 때 녀석이 태워주는 목말을 타고 담장 위에 올라갔다. 담장 위에 올라가도 까치발을 해야 살구에 손이 닿았다. 하지만 녀석이 염탐을 설렁설렁 해둔 것인지, 아무도 없다는 집에서 성깔 무서운 아주머니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때 담장 밑에는 내가 떨어트려주는 살구를 받기 위해 동네 녀석들이 다섯 명은 모여 있었던 것 같은데, 모조리 도망치고 나만 붙들렸다.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는 살구 몇 개를 쥐어주며 놓아줬더라면 훈훈했으련만, 그 아주머니는 나를 끌고 어머니에게로 데려가서 기어코 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아냈다. 그때 아버지 월급이랄 게 참 빤했는데, 어머니는 팍팍한 살림살이보다 더 얄팍한 그 인정에 한참 동안 속상해 하셨다. 그럼에도 내게 일언반구 꾸지람을 하지 않으셨는데,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라 해도 남의 손에 끌려 온 아이를 또다시 야단치실 수는 없던 노릇이었으리라.
나는 빗자루로 맞을까봐 조마조마 했지만 어머니는 빗자루 대신 불쏘시개를 잡고 부엌 아궁이에 땔감을 거칠게 밀어 넣으셨다. 타닥타닥 타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나는 연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리시며 눈물을 찔끔 흘리셨는데, 쭈그리고 앉아 계시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 내가 입에 넣어보지도 못한 살수 하나. 그것은 어머니께는 간난신고의 설움이었고, 내게는 한없이 넓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궂은 날이 가면 신나는 날도 오는 법. 한 번은 아이들과 논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는데, 꼬불꼬불 시골길을 달리던 1톤 트럭에서 수박 몇 덩이가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닌가. 비포장도로인 데다 간밤에 비가 와서 땅이 물러 있었다. 그 덕에 수박은 깨지지도 않은 채 경사를 타고는 우리가 노는 논 쪽으로 쪼르르 굴러왔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수박이 굴러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모두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광경 자체가 너무나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과일 행상 아저씨는 초행길을 달리느라 급경사에서 갑자기 커브를 튼 듯했다.
아저씨는 수박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오르막길을 올라 저 너머로 가버렸다. 우리는 잡고 있던 개구리를 던져버리고, 야호 소리 지르며 수박을 껴안았다. 그날, 아저씨는 수박 몇 덩이를 잃었지만 그 대신 우리 손에 잡혔던 개구리 몇 마리를 살리셨던 것이다.
파란 하늘, 푸른 보리밭. 그 사이로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던 곳. 떠다니는 구름 아래에서 구름을 쫓아 술렁거리던 숲. 그곳은 이제 내가 너무나 멀어져버린 대자연의 한복판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영원히 향수만 느껴야 하는 아름다운 고향이다.
고향의 자연은 언제나 자비롭고 인자했기에 사람 먹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던 그 은혜가 이제는 한없이 그립다. 바람에 묻어오던 바다의 향내, 그 짠 바람에 휘감기던 감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옥수수밭. 어머니와 할머니의 땀을 비료 삼아 풍성한 소출을 내던 과일들. 사람의 피와 살과 뼈가 결국엔 제 먹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면, 나는 청정한 과일을 씹은 덕에 자라났고, 그 과일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고생을 먹고 발육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 다시 펼쳐지지 않는 그때의 시간, 다시 뵐 수 없는 할머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의 청춘. 이 모든 것이 사무치게 그립다. 못 본 지 한참은 된 것 같은 마당 한 쪽의 감나무는 텅 빈 고향집을 아직도 홀로 지키는데, 나는 감나무도, 고향집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사는 방의 창문을 닫아놓지 않나 보다. 창밖의 정겨운 감나무는 아침 가을비에 몸을 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