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간헐적 그리움이다
고경서
하루가 반명함판 사진이다. 낙동강 하구를 배경으로 석양이 내린 오후 다섯 시는 한여름의 여덟 시와 맞먹는 시각이다. 서너 시간 줄어든 이 시차는 겨울이라 낮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다. 한 장의 명함판 크기로 인화하던 하절기엔 볼 수 없는 시간개념이다. 이렇듯 물리적 시공간이 심리적 거리감으로 동시에 나타날 때가 사진을 보는 순간이다. 너무 가깝거나 지나치게 멀어 보이는 과거의 기억들이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동해온다. 지금, 노을과 대면하는 나를 피사체로 한 일상의 카메라가 건네는 말이다.
“사진 좀 찍겠습니다.”
두 시간 전에 사진관에 들렀다. 신분증에 부착할 반명함판 사진이 필요했다. 사진사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카메라의 앵글 안에 가두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사진에 대한 예의다. 찰칵찰칵, 몇 컷을 연속적으로 찍은 뒤에 모니터 앞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을 골랐다. 턱 아래로 쳐진 얼굴선은 올리고, 피부색을 밝은 톤으로 보정을 끝냈다. 포토샵 한 얼굴이 어색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다. 그런 만큼 시대 따라 사진술도 발달해왔다. 지금은 사진관이라는 간판조차 찾기 어렵다. 사진을 수동으로 찍을 때는 대형 카메라 앞에 검은 보자기를 덮어쓴 사진사가 있었다. 그가 원판을 갈아 끼우며 하나, 둘, 셋 하는 구령 소리에 펑,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이때 쏟아진 은빛 광채가 눈을 찔렀다.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거쳐 며칠 후에 한 장의 사진으로 완성되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눈을 감았을까 조바심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24장의 필름을 갈아 끼우던 카메라를 거쳐 휴대폰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디지털시대이다. 인위적인 조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내장된 폴더에 담아 저장하고, 수시로 꺼내보는 모든 과정이 간편해졌다.
낡은 앨범을 펼친다. 지난 시간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고, 보관하는 이른바 내 삶의 궤적이다. 단 하루도 무모한 적 없었던 삶에 비해 정지된 시간은 턱없이 짧다. 콧잔등에 걸친 돋보기를 밀어 올리며 거풍을 시킨다. 새 사진을 비닐 칸에 넣고, 페이지를 설렁설렁 넘기다 몇 장의 사진을 꺼낸다. 갯바람이 부는 목선 위에서 찍은 흑백사진이다. 열 살짜리 소녀가 긴장한 듯 부동자세로 서 있다. 오십여 년을 훌쩍 건너뛴 사진이다. 다른 한 장은 컬러 사진이다. 작은아이를 안고 있는 내 옆에 잔뜩 겁먹은 큰아이가 서 있다. 철책 안에는 코끼리가 어슬렁거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물원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을 보던 아이가 짧은 팔을 둥글게 말아 쥐고, 새우깡을 받아먹는 코끼리 흉내를 내면 집안은 웃음꽃이 피었다. 그날도 바람이 심했는지 헝클어진 머리가 이마를 덮었으나 미간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은 기억의 통로이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환기시킨다. 125분의 1초라는 빛의 순간을 영구적으로 기록하는 우연한 산물이라고 들었다. 사진사는 결정적인 이미지를 포착하여 셔터를 누른다. 젊었을 적에는 경치 좋은 곳에 가족을 세워놓고, 미래의 꿈과 이상을 담보할 추억이 사진밖에 없는 양 극성을 부렸다. 아이들이 깜찍한 포즈를 취하면 카메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육아일기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인생이 즐겁고 행복할 때는 사진으로 많이 남겼지만 고단하고 힘든 시기엔 카메라 앞에 서기를 망설였던 것 같다. 남아있는 사진이 별로 없다. 과거의 꿈도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 아픔이나 상실감조차 위안이 된다. 따라서 사진첩은 나를 중심으로 한 역사이며 가족사의 계보를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마지막 돌아가는 길도 영정사진 한 장 남기는 일.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사진 속에서 뵙지 않는가.
인생은 사진 찍기다. 영화 <25시>에서 요한 모리츠가 가족과의 재회를 사진으로 찍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기자가 끈질기게 웃음을 강요하고, 억지로 웃으려고 애쓸수록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끝내는 울음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만다. 웃는지 우는지를 가늠할 수 없는 이 슬픈 장면은 주인공의 인생 역정을 오롯이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깊은 공감대로 이끈다. 사진 한 장이 영화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누구인가? 한 장의 사진이 나를 증명하려 든다. 지난 시간은 내게 관심 두지 않는데 나만 그것의 흔적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늙어서는 과거에 산다는 말이 있다. 추억이나 외로움에 기댈 때다. 카메라 앞에 설 기회가 줄어드는 대신에 앨범 속 사진을 보는 날들이 늘어난다. 장성한 아이들과 카메라 앞에 설 기회가 쉽지 않고, 나 역시 꺼려진다. 혹시라도 추억을 핑계로 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오래전에 타계하신 아버지의 사진첩도 당신의 분신인 양 서랍장에 넣어두고, 들여다보는 심사가 편치만은 않다. 망자의 부재는 기억을 공유하는 자에겐 소중하지만, 이 또한 누군가로부터 이별을 당할 유품이 아닌가.
사진은 그리움이다. 살아온 길들에 숨겨진 마음의 정황까지 다 읽어낸다. 망각한 기억은 사진 한 장의 무게와 맞먹는다. 보이진 않지만 선명하게 와닿는다. 필름 한 통이 수천 바퀴의 세월을 돌아 누렇게 변색된 사진에 이르렀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으로 바뀐 몇 십 년은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젊음이 빠져나가고, 무지갯빛 욕망에 눈뜬 시기였다. 물기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각인시킨 그 자리로 그리움이 통과한다. 한 공간, 같은 시간대에 멈춰진 일상에서 내 스스로가 외로움임을 일깨워준다. 이들은 역광의 시간을 건너 현재 속에 과거가 수시로 드나들면서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전한다.
나는 사진사, 스냅사진 한 컷을 찍는다. 카메라에 포커스를 맞추고, 피사체인 나와 삶과의 거리를 조절한다. 카메라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왜곡이나 과장,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다. 평생에 이런 멋진 사진을 몇 장이나 가질 수 있을까. 감정이 없는 카메라의 눈으로 투영하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 아무리 근사한 삶도 풍경도 이미 과거가 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 갖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삶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나를 스쳐간 날들이 그리우면 사진으로라도 만나야 한다. 고화질의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 몇 장을 넘겨본다. 눈으로 꺼내본 사진은 시간의 결을 만지는 촉감이 빠져서일까. 진한 그리움이 없다.
사진은 종이로 만든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