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방어진서 수산업으로 부 축적…땅부자로 알려져
울산 신간회 주축, 동면청년회 회장 역임 등 항일운동
노동야학·보성학교 설립 등 민족·사회활동에도 몰입
해방 후 이념논쟁으로 자식 흩어지고 재산 모두 날려
방어진은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3만이나 되어 울산읍 보다 많았다. 또 일제강점기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있었고 수산업이 호황을 누려 울산의 타 지역에 비해 부자들이 많았다.
이들 부자 중 성세빈(成世斌)씨는 동구를 대표하는 부자였다. 그는 당시 다른 부자들처럼 논이 많았던 것이 아니고 수산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돈을 청년운동과 후진양성에 썼다. 동아, 조선 등 일제강점기 중앙지를 보면 울산 출신으로 성씨만큼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사람이 없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단체였는데 울산 지역에서는 성씨가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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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세빈이 일제강점기 인재양성을 위해 일산동에 건립한 보성학교 터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이 땅에 불어 닥친 이념논쟁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려야 했고 피붙이들이 뿔뿔이 헤어져야 했던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씨는 1893년 2월 울산 동면 일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성씨로 조부 영술(永述)은 호조참판을 지냈다.
한말 조부는 당시 부패한 우리사회를 비판하면서 참판직에서 물러 난 후 동래 온천장에서 살다가 죽었다. 성씨 집안이 동구 일산동에 자리잡은 것은 세빈의 부친 수원(水源) 때부터다. 온천장에서 살았던 수원이 일산동으로 이사온 것도 수산업을 위해서였다.
수원 역시 장남으로 정 3품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그는 동구에 온 후 우뭇가사리 등 동해안 일원의 어물을 수집해 파는 일로 부를 이루었는데 어물을 강원도는 물론이고 멀리 호남 지방까지 팔았다.
일제강점기 실시된 울산군 동면 토지조사를 보면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그는 1909년 사립보성 학교가 설립될 때 가장 많은 돈을 내었다.
그리고 학교 땅도 희사했다. 당시 그는 학교 인근에 밭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아들 세빈이 이 밭을 학교부지로 내어 놓자고 하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대거 방어진을 비롯한 동구 지역으로 들어올 무렵 세빈은 10대 후반이었다. 동구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울산 지역 어족을 수탈했다. 당시 울산에서 일본 수산업자들이 많았던 해안 마을로는 방어진, 장생포, 신암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하면서 우리 민족을 수탈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제도 개혁과 정비를 했는데 어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는 1911년 수산제도의 기본법인 어업령과 어업령 시행규칙도 공포했다.
세빈 집안이 어업으로 성가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법규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일본인으로 부터 수탈을 당할 때 마다 그는 나라 없는 서러움에 가슴아파했을 것이다. 그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런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그가 27살 때 일어났던 3. 1운동은 그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1운동이 일어날 무렵 그는 일산동에 노동야학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울산에는 병영청년회, 언양청년회, 울산청년회 등 마을 마다 청년회가 설립되었는데 동구에서도 동면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그는 이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1912년 20살에 김순희(金順姬)여사와 결혼했다. 1922년 5월에는 보성학교를 설립해 자신이 직접 교장이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에 뛰어든 것은 1925년 동아일보 동면 분국장이 되면서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후세 교육만이 이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운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김천해, 서진문 등 주위 사람들의 활발한 사회주의 활동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것으로 보인다.
서진문은 세빈의 고총 사촌으로 1903년 동구 일산에서 출생, 일산보성학교 교사를 지낸 후 일본으로 들어가 노동운동과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세빈은 1925년 10월에 결성된 울산군청년연맹의 집행위원이 되었고 1926년에는 울산군내 사상단체인 자오회(子午會)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 동안 민족주의자로 사회운동을 펼쳤던 그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세빈이 일제로부터 본격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서진문의 사망 때문이었다. 서진문의 장례식이 일산에서 치러졌을 때 그는 직접 비문을 썼고 이 비문을 묘지까지 운반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본 왜경이 그를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나중에는 보성학교까지 폐쇄했다.
1931년 신간회가 일본의 압력으로 해체된 후 그는 주로 경제 분야 활동을 하면서 방어진 소비조합 전무이사, 방어진양조회사 감사와 전무이사를 지냈고 어장과 정유소 등을 운영했다.
살아있는 동안 이처럼 민족자본을 지키고 후진 양성을 위해 힘썼던 그는 1938년 6월 44세로 죽었다. 가족들은 그가 분사(憤死)를 했다고 말하지만 죽음에 대한 뚜렷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서울에서 여운형 선생이 울산까지 와 직접 참가했는데 이것은 그의 활동 범위가 넓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씨 집안은 해방 후 이 땅에 불어닥친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많은 재산을 날렸다.
세빈은 슬하에 도영, 덕영, 주영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중 장남 도영은 해방 후 보도연맹에 가입해 죽었고 일본에서 공부했던 덕영은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총련 간부로 활동했다. 집을 지킨 사람은 교사로 있었던 마지막 아들 주영이었다.
해방이 될 때만 해도 일산동 최고 부자였던 세빈의 재산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장남 도영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다. 도영이 보도연맹에 가입해 어려움을 겪을 때 제일 고생했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 김순희 여사였다. 김 여사는 도영이 구속되어 있을 때 아들의 구명을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영은 결국 죽고 말았다.
반일과 반공을 국시로 했던 자유당 시절 일본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둘째 아들 덕영 역시 당시로서는 집안의 근심거리였다. 특히 덕영은 조총련에서도 거물급 인사가 되어 국내 경찰이 그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까지도 항상 감시하고 있었다.
이 때 걸려든 것이 그의 동생 주영이었다. 당시 교사로 있었던 주영은 형이 일본에서 어렵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의복을 보내면서 집안 소식을 동봉했는데 이것이 화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경찰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해방 후 이처럼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성씨 집안이 그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은 덕영의 사상 전환이었다.
공화당 정부는 70년대가 되면 일본에서 조총련 활동을 하고 있는 교포들을 대상으로 조국 방문 운동을 펼쳤다. 이 때 덕영이 사상 전환 후 조국 방문 일행에 끼어 울산으로 왔다. 덕영의 한국 방문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 덕영이 한국에 오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조총련이 처음에는 회유하다가 나중에는 협박하는 등 한국으로 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조총련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나라로 왔다.
일제강점기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던 그로서는 오랜만의 귀향이었다. 이 귀향이 그동안 사상문제로 고생했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후 한 번 더 울산을 방문했던 덕영은 2000년 일본에서 타계했다. 그러나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던 그는 결국 일산으로 오지 못하고 일본에 묻혔다.
그 동안 어렵게 성씨 집안을 지켜온 세빈의 손자 며느리 박영자씨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박씨는 현재 세빈이 살았던 일산동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할아버지 형제들이 펼친 항일운동을 생각하면 우리정부가 일부 후손들의 좌익 활동을 문제 삼아 이처럼 후손들에게 혹독한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데 그 동안 정부 처사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빈의 동생 세륭(世隆)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졸업한 뒤 22세가 되던 26년부터 울산지역 보통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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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는 교육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면직되고 이후 울산청년동맹 조사부장, 동아일보 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신간회가 창립되자 형 세빈과 함께 울산지회 설립에 앞장섰고 이 단체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투쟁의 선두에 섰다. 신간회가 해체될 때 그는 울산지회 선전부 간사로 있었는데 누구보다 앞장서 신간회 해체를 반대했다.
이들 형제들의 활동은 성씨 집안에서 1997년 발행한 <해송이 비바람에 시달려도>에 잘 나타나 있다.
세빈이 동생 세륭과 함께 국가 유공자가 된 것은 이 땅에서 군사정권이 물러간 1990년대 말이다.
진주 출신 향토사학자 추경희씨는 1997년 울산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중 세빈과 세륭 형제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한 것을 발견하고 보훈처에 이들에 대한 공훈서를 올렸다.
세빈 형제로는 해방 후 52년 만에 행적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일산동에는 아직 세빈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또 그가 일제강점기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보성학교 터에는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요즘 일산 주민들 중 이들 형제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출처-경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