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효자가 얻은 명당 하절묘역
나는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자양면 용산리 106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용산리는 자양면 소재지로 수몰전의 광경은 면사무소 등 관공서와 초, 중학교가 있었고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연초주재소, 공의진료소 등이 소재하였고, 명절이면 윷놀이도 하고 일가들의 수시 회합장소로 이용이 되던 강호정과 사의당 등도 집 주위에 있었다. 15세기말부터 자양 입향조 선무랑공(14세 휘 차근)께서 사화(士禍)를 피해 대전에서 자양으로 이주하셔서 500년 가까이 살아온 우리의 삶의 터전이던 지역이 영천댐건설로 수몰이 됨에 따라 일가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흔히들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자락에 있는 우리의 문중묘역인 하절은 백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임고면 선원마을, 매화가 가지를 드리운 모습을 간직한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과 매산종택의 집터 등과 함께 영천의 3대길지라 일컫는다. 정효자가 얻은 명당이라는 하절에는 울창한 노송들이 둘레 약 2㎞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묘소와 비석들이 수몰의 위기에도 끄덕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걸 보니 명당이라는 말에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하는 생각과 아울러 또한 명당이 있기에 강호정 등의 유적들이 이 곳으로 이건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명당이 있게 한 선조로 노촌공(15세 윤량)이 계신다. 입향조 선무랑공의 아들이며 호수공의 아버지되시는 분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일이 없었다 하며,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묘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한 백발노승이 지나가면서 “정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고 하며 이 소문을 들은 상주 정 효자가 그 노승을 뒤쫓아 만나서 그 노승이 점지해준 자리가 지금의 묘소라 하며 그 노승이 설학대사라 한다.
하천묘역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에 있으며 면적이 35정에 이른다. 수위 선무랑공(휘 차근)의 묘를 비롯하여, 아드님이신 노촌공(휘 윤양), 손자이신 호수공(휘 세아), 증손자 백암공(휘 의번), 처사공(휘 유번), 호군공(휘 수번) 3형제분과 80여분의 묘가 있다. 원래 이 묘역은 승려(僧侶)를 두어 수호하였으나 부역의 과다로 승도(僧徒)를 폐지하고 산직(山直)이 5가구를 두어 관리하였으나 현재는 하천종약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또한 묘역내의 문화재로는 지방문화재 71호인 강호정(江湖亭)은 임진왜난후 호수공께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원래는 인구마을 뒤 자호 언덕에 있었으나 영천댐 건설로 이건하였고, 지방문화재 72호인 삼휴고택(三休古宅)은 삼휴공 휘 호신(好信)의 분가(分家) 주택으로 1620년)에 건립되었으나 수몰로 이건되었고, 지방문화재 73호인 하천재(夏泉齋) 및 비각(碑閣)은 진주목사인 양계공 휘 호인(好仁)이 1637년에 창건한 건물로, 하천묘역과 호수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수호하는 재실(齋室)이며 경내에는 추원당과 신도비각이 있고, 지방문화재 74호인 사의당(四宜堂)은 삼휴공의 증손이신 중호, 중기, 중범, 중낙, 4형제분이 우애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귀미 마을에 1726년에 건립하여 1802년에 용산리에 옮겨지었으나 수몰로 옮겼고, 지방문화재 75호인 삼휴정(三休亭)은 삼휴정 휘 호신께서 학문 연구와 당대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635년 귀미에 건립하였으나 수몰로 이건하였고, 지방문화재 76호인 오회당(五懷堂)은 오회당 휘 석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1727년 귀미에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으나 수몰로 이건하였다.
또한 묘역에는 여러 사연들이 많은데 몇 가지만 소개를 하고자 한다.
먼저 백암공의 시총에 관한 사항으로 임진왜란때 경주전투에서 아버지 호수공을 구출하시고 시신도 못찾고 전사하신 백암공의 묘소에 평소 즐기던 시(詩)와 만사(輓詞)를 모아서 광중(壙中)에 넣고 이것을 봉해서 무덤을 만들었는데 향인(鄕人)들이 이것을 이르기를 시총(詩塚)이라고 하였고, 같이 전사한 충노(忠奴) 억수(億壽) 또한 백암공 묘 계하(階下)에 무덤을 만들고 매년 묘사 때 주과포(酒果脯)로 의리(義理)를 기리고 있다.
또 15세 봉사공 휘 윤공의 따님께서는 안동시 녹전면 가구리 순흥인 안제(安霽, 호 동고, 관 군수. 퇴계문인)와 성혼 하였으나 신행전에 별세하니 이곳 하천의 친정 선산하에 유택(幽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계비 출생인 승지 경암(景菴)의 후손들이 4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4월 셋째 일요일 하절 묘사일정에 맞추어 안동에서 이곳에 와서 묘사를 받들고 있다. 봉사공은 따님이 돌아가자 따님 몫으로 재산을 안씨 문중에 보냈으나 안씨 문중에서는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돌려 보내온 것을 호수공께서 “누이를 잃은 것도 가슴 아픈데 어찌 그 재산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시며 다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호수공 행장(行狀)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1979년 수몰과 함께 고향 용산리에서 성곡리 자양면사무소 앞에 자양식당이라는 민물식당을 열어 생업을 이어가면서 계속하여 자양을 지키며 지금은 자양댐 피해주민대책위원장을 맡아 주민들과 피해대책을 논하면서도 자양댐의 습기로 인하여 하절의 문화재가 훼손이 빨라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책의 아쉬움도 있으나, 봄에는 선무랑공 후손들의 묘사와 화수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묘소의 위치나 문화재의 분포 및 주위의 자연경관 등과 더불어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라 관심을 가지고 많이 찾기를 바란다.
2008년 2월
영일정씨영천청년회 자문 선식(29대)
****영천화수회등록 된내용 복사해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