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집 - 김재연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결혼을 하여 18년 동안 살던 단독주택에서 주거혁명을 한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가에 아름다운 뜨락이 있던 집이었다. 봄철이 되어 목련, 철쭉 , 개나리,
천리향 ,동백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우고 향내를 뿜어낼 때는 지나가는 이들도 시내에
어쩜 이렇게 넓은 정원이 있느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꽃을 찾아 벌, 나비들이 찾아왔고,
가끔 찾아오는 한 쌍의 까치를 놓칠새라 아이들은 까치밥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겨울에는 금송, 오엽송 ,소나무 등 푸른 잎의 나무들이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얼마나 운치 있는 집으로 장식을 해주었는지 모른다.
마당에서는 세 아이들이 야구도 하고, 축구 ,농구 등으로 즐거워하였다.
시부모님께서 오십 년을 사셨던 집터로 대를 이어 살아야 했던 집이었다.
처음 이 집터로 이사 올 때 남의 문간채 사글세로 들어와 몇 해 동안 일곱 집터를 사들여
손수 지으신 집이었다. 참으로 정이 깊은 집이었다.
그런데 뒷담장 너머가 상업지역이 되면서 한 집 두 집 아가씨를 두고 술장사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골목 첫째 집에서 끄트머리 집까지 장사집이 되어버렸다. 밤이 되면 불야성이 된다.
아가씨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손님을 끌었다. 밤늦도록 괴성을 질러대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파출소에 신고도 해보고 동사무소에
사정이야기를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첫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아이들 교육문제를 들어 이시 갈 것을 몇 번이나 시부모님께
권하였다. 부모님의 애착도 단호하였다.
“꼭이나 아이들의 교육이 문제라면 우리 다섯 식구만 나가서 살라.”며 고집을 피우셨다.
남편은 '장남인데 어떡하겠느냐'면서 아이들을 잘 지도하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위로하셨다.
참으로 시부모님이 야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부모님 생전에는 이사를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뒷골목의 왁자지껄 속에서도 내 아이들은 반듯하게 성장하여 주었다.
그런 듬직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어머님은 '아이들이 삐뚤어지는 것도 집안 내력' 이라며
은근히 대를 이어 살기를 바랐다.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우리 동네까지 애주가들 사이에서 군산 명소로 번창하였다.
전북지역 남자들이라면 '군산의 감독'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부끄러운 지역비하의 말을 들으면서도 시부모는 당신 뜻대로 그 집에서 운명하셨다.
그런데 막상 두 분이 떠나자 이사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단독주택이 불편하고 주거환경이 아이들
교육에 나쁘다는 점을 알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른들의 기대에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에 갓 입학한 막내아들이 심술을 부렸다. 가정시간에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쩌다 술 집 얘기가 학습내용이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무심코 "그 곳이 어디냐?" 묻자 아이들이 낄낄대며 아들애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리 집 동네를 흉보았다는 것이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한 남편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이사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날 시동생들과 의논을 한 결과 고인이 되신 시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이사를
가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삿날을 잡고 짐을 꾸리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허롭기 그지없고
눈물은 왜 그리 나는지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빛바랜 기억들이 나의 소맷자락에 매달렸다.
아무 철없던 새색시 시절 시집살이 하느라 모퉁이 모퉁이에 눈물도 많이 쏟았던 집이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마다 축하모임을 가졌던 넓은 정원에는 나무가 울울했었다. 해마다 키 재기를 했던
은행나무,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묻어두고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서운하였다.
15층 아파트를 얻었다. 맨 꼭대기 층이었다. 8,9 층이 로얄 층으로 인기가 좋다고 남편은 채근했지만
내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내 머리위에서 누군가 생활한다고 상상하면 기분이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을 이고 살겠다며 15층을 결정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앞뒤로 건물이 없어 하늘을 벗할 수 있어 위안이 되었다. 불편하고 어색하던 아파트
생활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아파트의 고마움을 알만했다. 눈을 들어 나운동을 내려다보면 온통
아파트뿐이다. 자고나면 비온 뒤의 죽순 크듯 고층아파트만 들어섰다. 이 많은 아파트에 누가 다
살고 있는 걸까? 그래도 집 없는 사람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마음에 걱정 하나를 담고 있다. 며칠 후 시아버지 기일이다. 비슷비슷한 고층아파트가 이렇게 많아서
우리 집을 어떻게 찾아오실 것인가. 엘리베이터 작동법이나 익히고 가셨어야 했거늘.
나는 싸한 코끝을 감지했다.
"콘크리트 닭장이 뭐가 좋다고 ....." 하시는 시어머니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