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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평]
新鮮感과 安定感이 調和된 作品들/ 유 준 호
시(詩)는 이 지구를 무대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배경삼아 인간이 펼쳐내는 희비극(喜悲劇)의 감흥을 말로써 길어 올린 운문의 정화수이다. 이 정화수에 고아한 품격을 곁들여 표현해 낸 것이 시조가 아닐까. 시조는 정해진 틀 속에 율동감각을 갖춘 시어를 날줄, 씨줄로 삼아 짜내는 한 필의 비단이기도 하다. 좋은 시조가 되려면 서정적 운율과 일정한 율격에 시적 대상을 신선하게 창조적으로 담아 표현하여야 한다. 이것이 현대 정격시조의 본체(本體)요 본령(本領)이다. 한 마디로 현대시조는 전래 전통이 된 구(句) 및 장(章)의 호응과 대립 등 팽팽한 긴장감 속에 시조의 틀이 짜여야 하며 신선한 여유와 운치가 있어야 하고, 종장은 점층적(漸層的) 전환기법(轉換技法)을 잘 살려야 한다.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시조는 오랜 동안 우리 겨레 심성(心性)에 뿌리 내리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피워 오늘의 현대시조가 되었다. 우리 시조는 그동안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미적 감각을 승화시켜 주었다. 우리 시조는 그 일을 오늘도 하고 또 내일도 멈추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동안 그런 일의 중심에 서서 가람문학이란 시조나무를 가꿔 꽃을 피워 30여 년간 고운 향기를 사방에 날렸다.
가람문학 31집에 실린 시조 가운데 "추모의 정"과 "주제가 있는 시"에 실려 있는 특집 작품은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에서 신선감(新鮮感)과 안정감(安定感)이 엿보인다고 느껴지는 시조를 중심으로 몇몇 작품을 나름으로 골라 그 울림과 격조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먼저 오랜 시력(詩歷)을 가지고 이 고장 시조텃밭을 일궈온 허인무 사백님의 소시집 발표작 10편 중 시적 감흥과 안정감이 돋보인 두 편을 본다.
五月群芳(오월군방) 이끌고
온갖 부귀 불러놓고
청잣빛 하늘 아래
뚝뚝 지는 모란꽃
인생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 한마당인가.
-모란꽃-
신라의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과 씨앗을 받고 이 모란꽃은 탐스럽고 아름다우나 그림에 벌, 나비가 없는 걸 보니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했다지만, 실은 모란은 오월의 뜰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으로 주변의 수많은 꽃들을 그 크기나 색깔에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나름의 향기도 가지고 있어 벌, 나비도 꽃가루를 채취해 가기 위해 부지런히 찾아드는 부귀, 영화, 영예의 꽃말을 가진 화중왕(花中王)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꽃송이가 오래 피어 있지 않고 피었다가 쉽게 시들어 뚝뚝 떨어진다. 이 작품은 이런 특성과 꽃말을 모티프로 하여 창작된 작품이다.
그래 그런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진술이나 끝맺음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구(詩句)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녀 졌느니.'의 정서와 기법에서 많이 닮아 있다. 초장에서 오월에 피는 모든 꽃을 거느려 이끌고 스스로의 상징인 부귀영화를 불러놓고, 중장에서는 모란꽃의 떨어짐을 ‘뚝뚝’이라는 소리와 모양을 동시에 표현하는 의성 겸 의태어로 공감화하여 표현하였고, 종장에서는 사라짐에서 오는 허무감을 일장춘몽이란 말로 표출하고 있다. 모란의 속성을 인간사에 비유하여 꽃이 피어 화려할 때의 기대감, 꽃이 져 보람이 사라졌을 때의 허망, 허탈감을 설의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허망, 허탈은 나이와 어깨동무하고 오간다는 말을 생각게 한다. 중장의‘청자빛’은 맞춤법에 따라 필자 임의로‘청잣빛’으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한자성어가 많은데 시조 속에 많은 말을 담기 위한 배려였을까.
풀어 논 님의 앞섶
부끄리듯 젖 물릴 제
잔잔한 눈매 위에
물결인 양 이는 미소
어미 품 보듬는 정이
성상(聖像)인 양 높아라.
-모정(母情)―
고요가 깊이 서린 크나큰 호수 속에 잔잔히 이는 물결처럼 은은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시조이다. 모성은 끝없는 생성(生成)과 육성(育成)을 품은 하늘이요, 땅의 원리라 했던가. 섬세한 여성상을 시적 정서의 고운체로 걸러낸 작품이다.
초장에서 '풀어 논 님의 앞섶/ 부끄리듯 젖 물릴 제'라 하여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으로 시상을 일으키고, 중장에서 자애(慈愛) 어린 눈짓과 심성(心性)으로 시상을 펼쳐 종장에 이르러 우주를 품고도 남을, 아니 일종의 신앙에 비견(比肩)되는 모정(母情)을 정점으로 맺음하고 있다. 융숭한 인생관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시조 보법을 전범(典範)으로 보여주려고 ‘부끄리듯’과 같은 창의적인 조어를 배치하는 등 애쓴 흔적이 역역한 작품이다. 다만 좀 아쉬움이 있다면 단형시조인데 그 짧은 시형 안에 '∼인 양'하는 일차적 비유어인 직유가 중장과 종장에 연거푸 사용된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시적 변환(詩的變換)을 유도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작품은 전형적인 시조짜임법인 종장에서의 점층 기법을 살려 시조를 맺음하고 있다.
다음은 신작특집 작품 가운데 한 편을 보기로 한다.
청 댓잎에 폭설 한 편
켜켜이 꿈을 꾼다.
귀를 씻는
새떼들
발꿈치
시릴까봐
겨우내
얼어붙었던
달빛, 별빛 함께 와서
-김광순, 대숲의 악사-
가람문학에 이어 2010년도 대전시조시인협회지 '보문산 새벽길'에 다시 발표된 작품이다. 고시조로부터 현대시조까지 대부분의 시조 유형은 종장에 그 주제의식을 두어 표현하는 것이 일반 통례(通例)이다. 그러나 현대시조에 와서는 초장에 방점(傍點)을 찍 듯 표현의 중심 무게를 두거나 중장에 두는 예가 심심찮게 나타난다. 백수(白水) 사백(詞伯)은 시조의 표현 기법을 물레질에 비유하여 뽑아내고 드리고 후루룩 감아 넘겨 꼬투마리(물레 가락의 꼭지)에 감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후루룩 꼬투마리에 감아놓고, 뽑아내고 드려 사연과 정황을 표현하고 있다. 김광순 시인의 작품은 대부분 회화성이 중심이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시상(詩想)에 간극(間隙)은 느껴지지만 시조의 흠이었던 추상성에 치우침을 과감히 털어버리고 생동감 있는 역동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시조 자체가 생기 있고 참신하다. 눈(雪)이 내려 곱게 쌓인 대숲 위에 달빛, 별빛이 겨울답지 않게 포근히 비치고, 소부허유(巢父許由) 문답하던 기산영수(箕山潁水)에 온 듯 귀를 씻는 새떼들의 청명한 울음소리가 조용히 깃들인 정경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군살 없는 작품으로 한 폭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이다. 특히 중장은 시적 감각이 뛰어나다. 그런데 시 제목이“대숲의 악사”이니 그 호응과 명징성(明澄性)을 위해‘꿈을 꾼다.’는‘꿈을 친다.(탄다.)’로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폭설은 언제 내린 걸가. 한겨울은 아니 성싶고 꽃샘 추위하는 이른 봄인가 보다. 회원신작으로 발표된 작품은 80여 편이었다. 그 가운데 손에 잡힌 여덟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크고 작은 송이송이
소담스레 얹힌 자태
오가는 시선들이
빛으로 모아지고
흐르는 숨결 언저리
피어나는 밀어들
온 情을 담아놓고
틈틈이 바라보며
아직 덜 핀 봉오리 곁
사색화를 꽂는다.
빈 여백 사이사이엔
그리움이 머물고
-김길순, 꽃꽂이-
김 시인도 오랜 시력(詩歷)을 가지고 중도 여성 시조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든든한 시인이다. 첫째 수에서는 소담스럽고 아름답게 꽃꽂이되어 뭇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모양새를 선연(鮮然)하게 보여주면서 거기에 담긴 은밀한 정감을 표현했고, 둘째 수에서는 꽃꽂이된 꽃 하나하나에 깃들여 담긴 정(情)을 통하여 사색과 그리움의 정리(情理)를 되살리고 있다.
꽃송이에 인간의 심성을 투영(投影)시킨 작품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자의 눈과 작품화하는 자세가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천을 이어나가듯 차분하고 곱다. 좀 아쉬운 것은 둘째 수 종장 첫 구 '빈 여백'이다. '여백'이면 무엇을 하고 남은 빈자리인데 구태여 여백 앞에 '빈'이란 수식어를 배치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그냥 '빈자리'로 했으면 무난하지 않았을까.
요즘 현대시조에서는 작품을 좀 더 생동감 있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낯설기 기법을 사용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이를 이 작품에 적용했더라면 보다 더 참신한 수작(秀作)이 탄생되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낯설기 기법은 안이하고 가까운 비유가 아니라 비유되는 사물과 비유하는 언어 사이가 좀은 멀게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시적 비유이다. 이 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가 낯설지만 그 어울림이 잘 호응되면 참신한 작품이 된다. 예로 꽃꽂이를 '불티' 또는 '불꽃 튀김'으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 같은 것이다. 어느 시인은 '빙판'을 '팥죽 솥'으로, '김연아'를 '주걱에 둥둥 굴러다니는/ 커다란 새알심'으로 표현하여 참신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모 없는 둥근 언어
그 하나 얻고 싶어
천 길 벼랑 막장에서
곡괭이를 휘두르지만
얼마를
더 파고 파야
샘물처럼 치솟을까.
-김옥중, 시 쓰는 일-
좋은 시조가 창작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모 없는 둥근 언어'란 말은 원숙하게 잘 매만져진 두고두고 기억될 시조작품이며, '천 길 벼랑 막장'은 물러날 길 없는 시조 탄생의 공간이고, '곡괭이'는 시 짓기, '샘물'은 신선하고 참신한 작품을 상징한 말로 파악된다. 시인뿐 아니라 문학을 하는 이는 누구나 좋은 작품이 스스로의 노력 속에 창작되어 세상에 선보이기를 기대한다.
'시 쓰는 일'은‘천 길 벼랑 막장에서/ 곡괭이를 휘두르지만’이란 구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인들이 한 편의 좋은 시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캄캄한 지하 막장에서 고통을 견디며 금광석을 캐내는 광부처럼 끝없이 고단한 작업을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우란 속살이 황금이끼 같구나.
알알이 푸른 꿈이 고스란히 영글어
보듬은 늙은 가슴팍 봄날처럼 따순데.
아끼고 남긴 정을 한 순간에 다 비운다.
빈 둥지 다독이는 어미새 바램이듯
모성이 둥근 시공에 샘물같이 고이네.
-변성숙, 늙은 호박-
늙은 호박 속살을 '황금이끼'로, 모성을 '샘물'로 표현한 것이 열린 시안(詩眼)에 의한 표현인 것 같아 좋았다. 늙은 호박은 일반적으로 이뇨작용에 의한 부기 빼기용으로의 호박죽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첫 수에서는 성숙된 따뜻한 포용력을, 둘째 수에서는 시공(時空)을 꽉 채우는 정감 어린 모성애를 표현하고 있다. 호박이 발랄한 모습에서 원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모양새를 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고 작자는 늙은 호박을 정과 사랑을 베풀어주는 상징적 존재로 표현하였다. 이미지의 배열에 무리가 없어 쉽게 읽혀지는 특장을 가진 이 작품은 호박의 속성을 어머니의 속성으로 변이(變異)시켜 잔잔한 시적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둘째 수 종장 맺음말 '고이네.'를 앞 수와의 표현의 호응과 일관성을 위해 놓아버리는 꼴이 아닌 상상의 여운을 주는 꼴인 '고여 올라'로 하면 어땠을까.
살얼음 동치미육수
목젖을 넘어가도
푸들푸들 끊기는
널 사랑해 어쩐다냐.
메밀 향
입안에 퍼져
여름장보다 익숙한데
-신복순, 고향-
살얼음 동동 뜬 동치미와 그 국물이 연상되어 입맛을 다시며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참으로 정감이 가는 작품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며, 잊지 못할 생(生)의 원천이다. 잊으려도 잊히지 않는 영원한 기억의 창고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포근한 정을 지닌 전형적인 조선의 어머니가 손수 담가주시던 '동치미'가 눈에 삼삼 어리고, 풋풋한 메밀 냄새 넘치는 고향산천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고향은 어머니가 있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진정한 고향이다. 이 시조 속에는 어머니의 손맛 어린 고향 정이 새록새록 살아 숨 쉬고 있다. 중장 '푸들푸들 끊기는/ 널 사랑해 어쩐다냐'는 토속적이고 감각적인 시어 '푸들푸들'이란 의태어와‘어쩐다니’하는 표준어 대신 '어쩐다냐'하는 비표준어미를 사용하여 정감 어린 시조의 맛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또한 종장은 아쉬움의 여운을 주는 생략법에 의한 끝맺음을 하여 무한한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과 사랑의 정을 느끼게 하고 있다. 시원함과 절절함, 그윽함이 이 작품의 시적 정서이다. 사향(思鄕)의 마음이 잔잔히 배어난 좋은 시조이다.
떼 지어 흐느끼는
대지의 푸른 숨결
침묵의 지붕 위에
비는 내려 뿌리는데
나무는 천둥소리에
혼이 빠져 떨고 있다.
잠시 그친 빗줄기에
산도들도 숨 고르고
비에 젖은 꽃잎은
핏기 잃어 몸살이다.
동산에 고운 무지개
가지 말고 있거라.
-우제선, 장마-
자연물에 감정을 의탁(依託)한 감정이입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구 퍼붓는 비를 '떼 지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지붕은 침묵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무는 혼이 빠지고, 산, 들은 숨을 고르고, 꽃잎은 몸살을 한다. 이렇게 모든 사물(事物)과 사상(寫象)을 인간화하고 있다. 첫 수에서는 장마철 비바람 몰아칠 때의 정신없는 정경을 그려놓고 있다. 장마철 먹구름 속에서 천둥 벼락 후려칠 때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것이 어찌 나무뿐이랴. 아마 만상(萬象)이 다 그랬을 것이다. 둘째 수는 잠시 비가 그친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혼 빠진 산과 들이 숨을 돌려 정신을 가다듬어 살펴보니 아름답던 꽃잎들은 모진 시련을 겪어 핏기 가신 채로 몸살을 하고, 비갠 하늘엔 고운 줄무늬로 뜬 무지개가 희망으로 떠 있다. 비바람 몰아치다 갑자기 개어 평화롭게 무지개를 띄우는 장마철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실감나게 나타나 있다. 삼년 장마에 볕 안 드는 날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장마의 특징은 비 오다 햇볕 들고 다시 비가 와 지상에 그만그만한 변환(變換)을 일으킨다. 이것이 장마의 일상이다. 이 작품은 장마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이런 이미지로 되어 있어 어쩌면 평이한 시조라는 느낌은 주지만, "비에 젖은 꽃잎은/ 핏기 잃어 몸살이다." 와 같이 구상적, 구체적인 빛나는 시구(詩句)도 있다.
푹 삭힌 홍어 맛에
콧등이 쏴 하듯이
추위 속 가지마다
봄비에 눈물 맺혀
꽃망울
곤지 찍고서
필 듯 말 듯 웃었다.
-이 흥우, 꽃샘추위에도 봄은 웃는다.-
<꽃샘추위에도……>는 겨울과 봄의 경계선상(境界線上)의 정경(情景)을 단형시조로 빚어낸 작품이다. 빛나는 감성을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화하고 있다. 콧등을 콕 찌르는 꽃샘추위를 곰삭힌 홍어 맛에 비유하고 있다. 삭힌 홍어를 먹어본 이는 알지만 그것을 먹을 때 톡 쏘아 콧속을 뚫는 그 기운은 몸서리를 치게 한다. 그런 몸서리쳐지는 추위 속에 봄비가 눈물처럼 맺혀 매달리고 그 사이사이로 살짝 꽃망울이 돋아나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역경을 헤치고 생명력을 펼치는 자연의 신비를 공감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종장“꽃망울/ 곤지 찍고서/ 필 듯 말 듯 웃었다.”는 이른 봄 예식장 새색시처럼 수줍게 부끄러움을 띄고 얼굴을 내미는 홍매(紅梅)를 통하여 봄을 표현한 것이리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음력 12월을 납월((臘月)이라 하는데 이 때 꽃망울을 틔우는 홍매를 불가(佛家)에서는 납매(臘梅) 부른다. 이 납매는 두세 송이 피었다 밤에는 얼어서 죽고 또 피곤 한다. 이런 설한(雪寒)을 이기고 피어난 홍매 꽃송이의 대견한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특히 '홍어 맛' '겨울' '꽃망울' '곤지'를 호응시킨 시상 배열이 산뜻하다.
눈부신 꽃불 잔치
환호하는 순간에도
쾌락의 그 절정(絶頂)은
허망하게 사라지는데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반복되는 불꽃놀이
-정순량, 불꽃놀이-
그렇다. 불꽃놀이는 잔치이다. 불꽃놀이는 축제 및 경축 행사의 풍요로움을 보태기 위하여 폭죽을 터뜨리던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일종의 축하 이벤트이다. 불꽃을 공중에 쏘아 올려 까만 밤하늘에서 오색으로 터질 때 그것은 환희의 절정이요 기쁨의 도가니이다. 그 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티 없는 꿈의 꽃망울이다. 하지만 이 시조는 불꽃놀이를 인간이 가지는 이중성(二重性)으로 표현하고 있다.
절정의 쾌락 뒤에 찾아드는 허망함을 번연히 알면서도 인간은 그 한 때의 화려함에 매혹되고, 즐거운 욕망을 버리지 못해 늘 불꽃놀이에 심취(心醉)한다고 작자는 보고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인간의 헛된 욕망을 일깨워주려고 쓴 것이 아닐까. 순차적 서술 기법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며 작자의 사려 깊은 시안(詩眼)을 표출한 단형시조이다.
사월의 풀잎 위에
폭설로 핀 백목련
눈빛이 꽃빛인가
하늘이 한 몸인가
고독한
한 시름 앞에
퍼 올리는 백옥염불
-홍윤표, 백목련-
<백목련>은 한창 봄이 펼쳐진 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때 아닌 때에 함박눈이 내려 쌓였는지 폭설처럼 피어난 하얀 목련꽃에 작자의 심성이 몰아(沒我)로 꽂혀 있다. 이런 모습은 물아(物我)가 없는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하게 한다. 꿈에서 장자가 나비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깨어나니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이에 장자는 난 인간인가? 나비인가? 인간이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님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했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 백목련은 폭설로 피었으니, 눈빛이 꽃빛인가 꽃빛이 눈빛인가 그 빛이 하늘인가. 이 모두가 하나가 된 정경이다. 이 작품의 종장 "고독한/ 한 시름 앞에/ 퍼 올리는 백옥염불"은 단형시조의 묘(妙)를 한껏 보여주는 점층적 전환기법이 사용된 가구(佳句)이다. 인간은 올 때도 혼자요 갈 때도 혼자이기에 고독한 존재라 했던가. 그런 고독의 존재인 내가 자연과 합일(合一)이 되어 내가 느껴지지 않는 자연, 내가 흡수된 자연 속에 나를 잊는 불교적 염원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끝으로 신작특집으로 실린 작품 가운데 장형시조(長型時調) 한 편이 눈길을 끌기에 이를 소개한다.
동구 밖에 홀로 서서 언제나 웃는 아비
들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도 이제 막 나온 듯
몇날며칠 굶은 배 작대기뿐이어도 두둑한 듯
가으내 오곡 지키고 새경 한 톨 안 받아도 만족한 듯
설한풍 몰아치는 들에서 손발 꽁꽁 얼어도 괜찮은 듯
풍경에 취한 듯, 사람에 취한 듯, 세월을 깨우친 듯
가난에 삭신 다 삭아도 허허 웃는 신토불이.
-박헌오, 허수아비 웃음꽃-
욕심 없이 자연 속에 몰아(沒我)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장형시조는 그림으로 치면 민화(民畵)이다. 이 작품에도 민화가 가지고 있는 서민적인 소박성과 파격적인 익살, 풍자, 우의(寓意)가 있다. 서민의 꾸밈없는 생활상을 허수아비라는 시적 사물을 통하여 표현한 한 폭의 민화이다. 위 작품에서 허수아비는 노력에 비하여 별 소득은 없지만 이를 타박하지 않고 즐기며 가난을 짊어지고 남의집살이를 하는 낙천적인 머슴 같은 존재이다. 세련된 시적 기교보다는 작대기, 새경, 삭신 등과 같은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언어로 경쾌한 리듬을 살려 가락을 뽑아내고 있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이 이미저리(imagery)로 어울린 시조 작품으로 주어진 처지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시적화자의 모습이 선하게 나타나 있다. 장형시조에서 역할 중심은 중장인데 이 작품도 중장에서 구(句)마다 대립어구를 사용하여 고달프고 외롭지만 낙담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우의적(寓意的)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풍경에 취한 듯, 사람에 취한 듯, 세월을 깨우친 듯”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초월의 자연 경지에 들어선 허수아비를 통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조바심을 힐난(詰難)하는 알레고리(Allegory)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장형시조 요건을 정도껏 충족하고 있는 좋은 작품이다.
위 작품들 외에 신작특집에 실린 윤영자의 <당신의 사랑 Ⅲ>, 조성인의 <항아리>와 회원 신작으로 실린 강정부의 <세월은 가고>, 김동민의 <도덕봉>, 김영석의 <묵상>, 김영환의 <삶>, 문주환의 <마황사 부도전>, 이방남의 <가질 수 없는 눈물>, 이상덕의 <갈대>, 이영주의 <노고지리> 등도 마음 가는 작품이었다. 이 중에 특히
‘살 통통/ 다산의 날빛/ 살찐 달이 따라온다.’<항아리>
‘손끝에/ 묻어나는/ 세월을 펼쳐본다.’<묵상>
‘봄날도 서러운 봄 산을 깨는 먹 뻐꾸기’<마황사 부도전>
‘먼 하늘 밉도록 타네./ 눈물로나 끄게나.’<가질 수 없는 눈물>
‘햇살에 안개 삭히며/ 오가는 길 밝히네.’<갈대>
‘윤사월 보푸라기를/ 어쩌라고……/어쩌라고……’<노고지리>
등은 마음이 가는 시구였다. 그러나 이를 다 다루지 못하고 몇 편만 그 느낌을 언급(言及)하고 대부분의 작품은 또 다른 시선(視線)에 맡기게 되어 아쉽다.
요즘까지도 시조 제목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식물명, 건물명, 지명과 자연물명이고 그 표현된 이미지도 추상적 관습적인 것이 많으며, 선인(先人)들이 작품화했던 이미지와 유사(類似)한 것도 적지 않다. 이런 면을 두고 경기대 김 제현 교수는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구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아예 담을 쌓고 마치 골방에 숨어서 자위행위(自慰行爲)나 하듯 오늘의 시조가 '마스터베이션 문학'(자기만족의 카타르시스)으로 타락해가고 있다는 현상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시(漢詩)의 직역 같은 서정시, 과거지향의 복고주의가 팽만해 있는 '멍텅구리 시조'가 아직도 활개치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이 마당에 아직도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시조가 버젓이 발표되고 있다 하였다. 하지만 시제(詩題)가 자연물이고, 표현된 중심 이미지가 유사하다고 하여 매도(罵倒)할 성질은 아니다. 문학은 누가 뭐라 해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속에 미적 감흥을 일으켜 유열감을 촉발(觸發)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표현 기교나 주제를 새로이 하여 고풍(古風)을 벗어난 새로움을 통한 미적 감흥을 느끼게 하면 탓할 일이 아니다. 시조는 표현 내용도 신선해야 하지만 신선한 언어 율동을 통하여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표현기법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번 가람문학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는 내용에 치중(置重)한 나머지 언어적 율동과 감동을 놓치고 낱말만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개별 구절은 가구(佳句)인데 이를 한 편의 시조로 맞추어놓고 보면 표현 의도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작품도 더러 있었다. 즉, 무미건조한 것이 있는가 하면 시인 혼자만이 알고 즐기는 작품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변격시조를 넘어 아예 변형된 모습을 보이는 작품도 더러 있었다. 시조가 변형되면 시조가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차라리 이런 시조는 시조가 아닌 자유시 쪽에 초점을 두고 그리 쓰는 것이 문학성을 위해서도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작품을 쓰면서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와 한유(韓愈) 사이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鳥宿池邊樹 僧推(敲)月下門"을 떠올려 보고, 조지훈의 시(詩)‘승무(僧舞)’탄생 이야기도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대체로 31집 작품은 연시조보다는 단시조들이 더 빛을 발하였다. 이 글에서 몇몇 편을 감상하면서 내 나름의 단견(短見)도 덧붙여 보았는데 혹, 옥석(玉石)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했는지도 모른다. 전하는 말에 서당 훈장(訓長)이 학동(學童)들에게‘風’자를 가르치며‘나는 바담풍해도 넌 바람풍하라’고 했다는데 나는 바담풍 작품을 쓰더라도 누군가의 바람풍 작품을 보면 반갑다. 앞으로 더욱 오묘(奧妙)한 시적 감흥을 자아내는 짜임새 있는 시조작품이 많이 가람문학에 실려 지면(紙面)을 빛내 주리라 믿는다.
[가람문학 32호(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