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프란치스코 여숙(旅宿)
안유환
내비게이션 안내는 마을입구 정자나무 아래에서 소멸되었다. 최종 목적지를 확인하는 전화는 그의 아내가 받았다. ‘교회당과 마을회관 사이로 나있는 골목길로 끝까지 들어오세요.’ 잠시 후 마중 나온 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의 집 앞에 승용차를 세웠다. 아담한 전원주택을 그려보던 것과는 달리 집 외관은 흡사 창고처럼 보였다. 회벽으로 마감된 바깥 벽면에는 영화필름 이미지에 풍경화와 인물화가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들은 마치 초등학생들이 학교에 제출하는 숙제물 같았다. 벽면 아래쪽에 나지막하게 나무 등걸을 바침으로 한 통나무 판자 간판엔 ‘프란치스코 旅宿’이라 음각되어 있다. 글씨는 아마추어 솜씨였다. 간판 아랫부분에는 조그맣게 ‘은혜농장’이라 써져 있었다. 나는 그가 숙박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은 뒤쪽에 있었다. 그녀를 따라 집 모퉁이를 돌아가니 처마 끝에 ‘학교종’이 달려있다.
‘땡 땡 땡 땡―.’
그녀가 임의로 줄을 잡아당겼다. 그 소리는 마치 초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을 알리던 것 같았다. 선생님이 ‘땡땡―, 땡땡―.’ 잇달아 치면 수업 시작시간이고, 세 번씩을 치면 ‘마쳤다’는 신호였다.
“이 소리는 손님이 오셨다는 전갈입니다.”
멀리 농장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부르기엔 종소리가 안성맞춤이었다. 나무들이 무성한 농장을 바라보며 잠시 서서 기다리자 가운데 길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 머리에 약간 그을린 얼굴, 작업복 차림으로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처음 그에게 연락이 닿게 된 것은 TV를 통해서였다. 아내가 어느 날 KBS 「인간극장」 재방송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여보―!, 여보―!’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농원을 가꾸는 그 모습이 나와 너무도 닮았다면서. “아, 문무희 씨!” 나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는 50년 전에 나와 함께 전방 6사단 부관부에서 근무한 사람이다.
“문형, 정말 오랜만이요.”
“반갑습니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3시간 반, 생각보다 멀었어요.”
우리는 악수를 하고 얼싸 안았다. 아내들은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영화장면을 보듯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방충망을 밀치고 들어간 집안은 40~50평은 되는 것 같았다. 3분의 2정도의 공간은 거실 겸 다락방으로 꾸며져 있고 내실은 주방 안쪽으로 붙어있었다. ‘다락방’침소를 이용하려면 왼쪽으로 나무계단 몇 개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앞이 트인 다락방 아래쪽 구석에는 벌꿀 포장박스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그 옆에는 학생들의 체험용인 수동 꿀 뜨는 기계가 놓여있다. 오른쪽 벽으로 붙여놓은 피아노, 그 앞에 전화기가 놓인 책상에는 전화번호부와 서류가 쌓여있었다. 거실은 집기들뿐만 아니라 잡다한 물건들이 멋대로 흩어져 있어 이사를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는 가내공업을 하는 작업장처럼 보였다.
“집안이 어수선하지요. 내일부터 농장 쪽으로 넓은 창을 내는 리모델링을 준비하다보니 이렇게 복잡합니다.”
그가 정돈되지 않은 집안을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네덜란드 식 같다고 말합니다. 하하하.”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우리는 넓은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소파에 마주 앉았다. 집안을 두리번거리다 시선이 머문 곳은 피아노 위쪽 벽면에 붙여진 십자가와 그 아래 있는 예수 석고상이었다. 십자가는 가톨릭의 T형 십자가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 형태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T형 십자가는 오늘도 그의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프란치스칸(Franciscan)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가 헤어진 지 50년쯤 되지요?”
그가 흰 머리칼을 왼손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세월이 참 빠르지요!”
내가 동의를 하며 헤아려보니 48년이나 되었다. 1968년 들면서 제대일자를 손꼽아 기다리던 군인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전역이 6개월이나 연기되었다. 그해 1월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투로 인해 전군엔 비상이 걸렸고 느슨하던 군대생활은 다시 조여졌다. 현역들은 빠짐없이 유격훈련을 받아야 했다.
“문형이 입대는 나보다 먼저 했던가요?”
내가 자대배치를 받을 때 그가 먼저 와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럴 거요. 내군번이 1152로 나가니까.”
“나는 1155×××× 이니 한참 뒤이네. 동기 두 사람과 함께 전입했을 때 부관부의 신고식은 충격이었어요.”
“말 말아요. 알 철모 쓰고 내무반 침상에서…….”
“그랬지. 발가벗고 알 철모 쓰고 토끼 뛰기 하면 귀에는 그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어!”
듣고 있던 아내가 쿡쿡 웃었다. 그의 아내가 숭늉처럼 뿌연 색깔의 음료를 내왔다. 꿀벌이 수액에서 만들어낸 프로폴리스를 탄 것이라 한다.
“고참들이 밤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통로 쪽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자고 있는 졸병들을 구둣발로 차며 다 일으켜 세웠지.”
“매일 빳다를 맞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했잖아. 새벽 2시, 3시에도 까닭모르고 기합 받을 때도 있었으니까.”
“참으로 끔찍한 전통이었어! 거의 매일 밤 막사 뒤편에 엎드려뻐처를 시키고 야전삽으로 엉덩이를 내려쳤지. 고참들은 때려야 잠이 오고, 졸병들은 맞아야 편히 잠들 수 있었고−.”
전입동기 세 사람이 어느 토요일 산 너머 냇가에 목욕하러 갔을 때였다. 내가 먼저 옷을 벗자 뒤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야, 그게 뭐야!” 하고 소리쳤다. 엉덩이에서부터 흘러내린 시퍼런 멍 자국이 발목 뒤에 까지 이어져 있었다. 세 사람의 엉덩이와 다리는 빳다를 맞은 것으로 인해 온통 잉크를 칠해놓은 것 같았다.
“부관부 말고도 군기가 센 병과가 몇 있었지. 헌병대, 군악대, 수송부−.”
“그렇게 얻어맞아도 탈영하지 않고 용하게 잘도 견뎠어.”
“그때도 간혹 탈영병은 있었지. 요즘도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옛날 같은 기합이 아직 남아있는가 봐.”
“개뼉다구, 기억나는가?”
“그럼, 키 나지막하고 깡마른 몸매에 덧니가 유달리 크게 튀어나온 놈 말이지?”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내가 부산 중앙동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법무부산하 출입국관리 사무소 소속이라면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어.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가 음식점에서 조우한 거지. 얻어맞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반갑더라고.”
“가평군 현리에 있던 우리부대가 전방으로 이동했던 것 기억나지? 철원에 주둔하던 백마부대가 월남으로 파병되고 그 자리에 우리 6사단이 들어갔잖아.”
“함께 근무하던 두 사람이 파월병으로 지원 했었지. 어려운 가정 형편을 단숨에 극복해보려는 생각이 그런 결단을 내리게 했던 것 같았어.”
국내의 현역보다 몇 배나 되는 월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지원자가 속출했었다.
“그 때 우리는 군부대 교회에 열심히 나갔잖아.”
“훈련소에서부터 교회는 피난처였어. 주일날도 사역을 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크리스천들은 함께 교회로 갔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고된 작업을 피하려고 교회차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어.”
“우리가 소속된 본부중대 신자는 K병장, L상병, P일병, 그리고 문형과 나였지.”
“그때 군종병으로 근무했던 J상병을 김해에서 우연히 만났어. 연합행사에 교회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인솔해 왔다면서. ‘전우’에서 ‘장로’로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어.”
“성탄절 때 기억나는가?”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민간인 교회에 가서 떡국을 얻어먹고 함박눈을 맞으며 함께 새벽송도 돌았잖아.”
“우리가 갔던 그 마을이 ‘8호 마을’이야. 성도들이 우리를 참으로 정답게 대해주었어.”
“문형은 기억력도 좋아, 50년 전 그 마을 이름을 알고 있다니!”
“한탄강 언덕으로 나들이도 가고, 그때는 군대생활의 낭만 같은 것도 있었지.”
“K병장과 함께 우리가 문집을 내기도 했는데, 내가 쓴 산문의 제목이 ‘겨울나무’ 였어. 십자가와 성탄트리를 생각하며 썼던 것 같아. 이듬해 새잎이 나기까지 눈 속에서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나목, 그런 믿음을 생각했던 것 같아!”
“나는 특별한 어려움을 겪었어. 사단장에게 경례를 하지 않아 연대로 전출되었다가 나중엔 소총소대에 까지 내려갔었어.”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상관이 앞에서 다가올 경우,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있다면 경례 대신 부동자세를 취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사무실 집기를 나르던 세 사람이 본부중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단장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은 거야.”
“시범케이스 라고 할까, 그때는 그렇게 군기를 잡았지.”
“그래도 6개월 후에 사단장 지시로 우리를 다시 부관부로 복귀시켜 주었어. 고생은 했지만 병사 한사람에게 까지 사단장이 관심을 가져준 것이 참으로 고맙더라고. 내가 원대복귀를 했을 때 박형은 원주로 전출 갔다고 하데. 그때는 사병들의 이동이 허용되지 않을 때였는데, 재주도 좋아!”
“1군사에 우리 친척 한분이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어. 부모님이 내가 전방에서 고생한다고 애면글면하니까 나를 3병참단 예하 160보급소로 끌어주었어. 원주에 와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갔어.”
“나는 20년 전쯤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어. 나도 전출을 한 셈이지.”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화제를 바꾸었다.
“개종 한다는 것, 그것 쉽지 않은 일인데―.”
나는 어떤 이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개신교로 돌아왔다는 말을 했다.
“나 보다는 아내가 먼저 개종을 했어. 교회에서도 참 열심이었는데. 우리가 출석하던 교회에서 목회자를 배척하는 것을 보았어. 양이 목자를 배척하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오래도록 교회가 시끄러웠어. 담임 목사가 이사 가는 날 다른 교인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어. 집사람이 가서 짐 싸는 것을 거들어 전송을 했고, 그 후로 우리는 마음이 아파 한동안 교회를 쉬었지. 그러다 아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어. 얼마 후 ‘마리아’란 세례명까지 받고.”
“여자 분들은 결단도 쉽게 하고 현실적응도 빠른 것 같아!”
“그러다 뜻밖에 시련이 닥쳤어. 아내가 위암 진단을 받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어. 병상에서 ‘내가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내게 물었어. 결혼한 지 20여 년 동안 오로지 내 주관대로만 살아왔는데, 아내가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못 들어줄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
“제가 그랬어요. 내가 일어나면 나와 함께 꼭 성당에 나가자고―.”
끝없는 군대 이야기가 일상으로 돌아오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그의 아내가 말참견을 했다.
“내가 말했지. 당신이 건강을 회복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 거라고. 그때까지 나는 7년 정도 교회를 쉬고 있었어. 다행이 아내가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이 되면서 내가 가톨릭교회로 나가기 시작하고, 얼마 후 ‘요셉’이란 세례명도 받았어.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요셉이 얼마나 고민하고 어려웠겠어. 그 후 이집트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고. 개종하고부터 나는 늘 요셉처럼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으로 살았지. 요즘도 저 사람은 일을 벌이고 나는 마무리를 하면서 따라가는 거지. 하하하.”
그는 ‘요셉’이라는 세례명에 대해 은근히 불만 갖고 있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어가는데 말없이 기여한 귀한 인물이지. 동정녀 잉태라는 뜻밖의 상황을 맞았을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이를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잖아. 문형도 의로운 사람이야!”
나는 요셉의 인품을 얘기하면서 그를 추어올렸다.
“어느 것이나 인간사에 완벽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어느 교회에 부임하면 마칠 때까지 거기서 목회를 하잖아요.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3년 내지 5년마다 신부님의 임지가 이동이 되니까 때로 서운함은 있어도 불만은 없어요. 혹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꾹 참고 몇 년 만 기다리면 되니까요. 그러나 신부님들도 이동할 때는 정든 교우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셔요. 지난달에도 한분이 서울로 전출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성당에서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문형은 언제부터 농촌에 대한 뜻을 가졌지?”
나는 「인간극장」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고등학교 시절 『상록수』, 『흙』 등 계몽소설의 영향을 받았어. 한창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농촌을 외면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에 내가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농학도가 되었던 거야. 나도 계몽운동을 펼치고 싶었지.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어 산업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극심하게 나타났지. 그래도 나는 고향을 버릴 수 없었어. 대학을 졸업하고 문경 N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 내가 생각하는 농촌을 이루기 위해 교사직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어. 5년을 앞당겨 명퇴를 하고 일을 시작했지.”
“교사를 홀대하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 탓으로 그때는 명퇴가 줄을 이었어.”
문경시 가은읍 성저리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부모님이 경작하던 땅을 이어받고 주변의 땅을 조금 더 사들여 3천여 평의 농장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젖소를 먹여보았고, 돼지와 닭도 쳐보았고, 뽕나무를 심어 양잠도 해보았으나 정부의 정책사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 개조해서 살고 있는 이 집은 누에를 칠 때 잠실로 지은 집이었다. 주변의 농민들을 그의 농장으로 불러 모아 한동안 정기적으로 교육도 해보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하던 일을 다 말아먹고 마지막으로 잡은 것이 양봉이었어.”
“그건 좀 수월하지? 꽃을 따라 벌통만 옮겨다 놓고는 한가하게 지내는 것 같더라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양봉은 재미있어 보일 것이다. 그에게 양봉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꽃이 필 때부터 시작해서 꽃이 질 때까지 집을 떠나 벌과 동행하며 꽃을 따라다녀야 한다. 멀리는 강화도, 강원도에까지 벌통을 싣고 가 꿀 딸 때를 기다리면서 주일엔 그 지역 성당에 출석했다. 교인들은 벌을 치는 그들 내외를 극진한 사랑으로 대했다.
“일 년에 한차례 씩 만나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고향 사람들처럼 정답더라고. 그렇게 자연에 묻혀서 살아가는 거지.”
그는 자기가 뜨는 꿀에 대한 자랑도 잊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빠른 시일에 꿀을 많이 뜨려고 서둘러 꿀을 채취하지만 그는 벌집에 꿀이 가득차고 벌들이 스스로 밀봉하기 까지 기다렸다가 숙성한 꿀을 뜬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금방 걸려온 꿀 주문 전화를 받고 책상에서 주소를 메모하고 있었다.
농장을 둘러보기 위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대체로 농장이라면 작물재배 지역이 구획되어 있고, 비닐하우스도 몇 동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농장은 각종 나무숲으로 우거져 있었다.
“이것은 회양목 아닌가?”
나는 우선 눈에 익은 것부터 물어보았다.
“맞아요. 좀 이상하지?”
“회양목이 어떻게 교목처럼 크게 자랐을까?”
“원래는 관목으로 자라지요. 심을 때 밀식을 하지 않고 드문드문 숨통을 틔워주다 보니 작은 나무가 2~3미터 높이까지 자랐어.”
그의 농장에서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묘목이나 씨앗을 뿌려 가꾼 것들이다. 그는 주목 씨앗을 얻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산 너머 H중학교까지 갔다. 그때는 요즘처럼 길이 잘 나있지 않아 산중턱에선 걸어가야 했다. 모과나무, 자귀나무, 구상나무, 백송나무, 은행나무, 산수유 등등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고 서있는 그의 농장은 수목 전시장 같았다. 나무 아래는 잡초들이 우거져 자라고 환상넝쿨은 구상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잡초는 뽑지 않아도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잡초가 돋아나 자리바꿈을 했다. 고등채소와 특용작물이 잇달아 실패를 불러오면서 그는 나무를 심어나갔다. 이리저리 농장의 나무를 구경하며 걸어가다 보니 제법 큰 서구식 목조건물이 하나 서있고 그 앞은 널찍하게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별채는 은혜농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재워주는 여숙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잔디밭 한쪽에 설치된 의자그네에 앉았다.
“튤립이 곱게 피어있던 자리는 어디인가요?”
틈틈이 인간극장 5부작을 다 본 아내가 물어보았다.
“잔디밭 저쪽 끝에 있어요.”
그가 손짓하는 곳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지금은 구근이 묻혀있어요. 4~5월, 봄이 되면 화려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어떻게 농장에다 튤립을 그렇게 많이 심을 생각을 했어요?”
나는 그의 농장운영에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았다.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지요. 30여 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농원을 조성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5년을 앞당겨 퇴직을 하고 몸도 마음도 자유로워지니까 하고 싶은 농장 일을 마음껏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11시간, 12시간 씩 일을 했으니까요. 어떤 일에나 자신감이 넘쳐나고, 무엇보다 농장이 차츰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피곤한 줄 몰랐지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몸살처럼 자리에 누워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 이러면 병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처음에는 민간요법으로 대처를 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진단 결과는 늑막염이었어요. 그해 12월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을 하고 꼬박 넉 달 동안 병상에 있었어요. 차츰 회복이 되고 있을 때 휠체어를 타고 뜰에 나오던 날 빨갛고 노란 튤립이 가득 피어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직도 체 가시지 않은 추위 속에서 아름답고 건강한 자태로―. 땅 속에서 겨울을 지내고 봄을 피워내는 튤립이 내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그 뒤로 내 몸도 피어나는 튤립처럼 그렇게 회복이 빨랐어요. 나무를 심고 농장을 조성해 왔지만 꽃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처음 느꼈어. 병문안 갈 때 꽃을 한 아름씩 사들고 가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그때, 퇴원하면 나도 튤립을 심어 이웃 사람들이나 농장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 아름다운 힘을 나누고 싶었어요. 이 지역은 마늘이 잘 되는 토양인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왜, 돈 한 푼 되지 않는 꽃을 심느냐’고 비아냥거렸지요. 이듬해는 온 농원이 튤립으로 가득 찼어요. 내가 나가는 성당의 수사(修士)가 신자들에게 우리농원 이야기를 했고, 차츰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튤립꽃 피는 농원’으로 신문에 까지 소개되었던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신문에서 그런 타이틀은 보았지만 문형의 이름은 눈여겨보지 못했어. 그러다 이번에 ‘아버지의 뜰’을 보면서 농장도 구경할 겸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어느 날 오후 거실에서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여보, 당신 모습과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라고 소리치던 얘기를 했다. 생각이 같으면 외모도 비슷하게 닮아 가는지도 모른다. 그는 김용기 장로가 이끄는 가나안 농군학교도 수료했다고 말했다. 그의 길은 내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했다. 그때는 농촌으로 들어오기보다는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한창 꿈꾸던 농촌계몽의 뜻은 접었지만 조용히 살고 싶어 얼마 후 조그만 농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초지일관 농촌계몽의 뜻을 펼치려 고향으로 내려와 한 터전을 이루었다.
“시행착오도 많았지요. 마지막엔 양봉을 하면서 농장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어요. 어려운 시기에 아이들 교육도 시킬 수 있었고, 딸은 결혼해서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만은 꼭 나의 후계자로, 고향 농촌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문형은 참 좋겠습니다. 본인이 농촌의 꿈을 이루고 또 뒤를 이을 든든한 아들까지 두었으니―.”
“그런 일이 내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들은 신앙심도 대단했어요. 호기심도 강하고 꿈도 많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다더니, 중학교 때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어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영화에 관심을 갖더라고. 그러더니 대학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어요. 인간의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서. 내 교육방침은 억지로 부모가 원하는 쪽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지는 않습니다. 진로를 결정할 때 오냐, 네 하고 싶은 것을 하더라도 아버지가 평생을 쏟아 가꾼 이 뜰은 잊지 말라했어요. 그런데 4학년을 마칠 무렵 어느 날 돌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신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영화감독이 되려고 하던 아들이 모든 것을 접고 사제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나는 부자간 대화의 결과가 궁금해 말허리를 잘랐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요. 젊은이들이 서울로 몰려들고 있을 때 농촌을 지키겠다고 내가 고집스레 고향으로 들어왔는데, 아들이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신부의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잖아요. 사제의 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도 귀한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서운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뿐인 아들이 신부가 된다는 것이 마음에 허락되지 않았고, 나는 내 뜻을 이어갈 영농 후계자가 사라지는 것 때문에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지요. 한 달쯤 기도하며 생각하고 아내와 대화를 이어가다 마침내 허락을 했습니다. 지금은 로마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의욕에 차있던 그의 모습이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농촌의 사양화는 필연인 것 같아요. 나도 몇 년 전 젖소를 키우며 한편엔 고등채소를 재배하던 농장을 접었습니다.”
나는 그를 위로할 겸 내 얘기를 꺼냈다. 내가 오랫동안 주변 지역을 둘러보며 잡은 농장은 산세가 아름답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사람들이 별장부지로 선호할만한 좋은 지역이었다. 개발의 손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제발 우리농장 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복덕방 사람을 통해 농장을 매각하지 않겠느냐는 타진을 해왔다. 일손도 부족하고 체력도 달리고, 해마다 타산도 맞지 않고, 한창 어려운 때지만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 사람의 발길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나를 만나러 왔다. 나중에는 땅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지나가던 길에 들렸다면서 안부만 묻고 돌아가곤 했다. 복덕방 쪽에서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아내가 노년에 지내기 편한 아파트 생활을 원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몇 달을 끌어오다 결국 주택업자에게 농원을 넘기고 말았다. 힘든 일이 없어지니 편안하기는 했지만 심고 가꾸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 같은 삶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아무리 값을 많이 쳐주어도 업자들에게 이 땅을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40여 년 동안 씨 뿌리고, 묘목을 심고, 접붙이고 가꾼 나무들은 나의 분신입니다. 꽃과 나무들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지요. 그러나 아들이 돌연 사제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고등채소를 하던 하우스 농사는 대부분 정리를 했어요. 이제는 꿀벌이 주업이 되고 꽃과 각종 정원수를 가꾸는 농장은 부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고 ‘묘목’, ‘삽목’, ‘씨앗’으로 가꾼 방법까지 표기해 놓았다.
“다행히 요즘은 귀농,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나이 들어서 농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힘 드는 일이지요. 품꾼들 손에 일을 다 맡기며 영농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는 아들이 신부 서품을 받던 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공동경영을 하던지 영농 후계자를 공채하기로. 나는 일찍부터 귀농의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를 발굴하여 나의 온 정성을 기울인 이 농원을 값없이 그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나를 목조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겉모양은 수수 했지만 내부는 딴판이었다. 30여 평이 넘는 넓은 홀 인테리어는 아늑한 카페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가 스위치를 올리자 주방 쪽에 드리워진 갓을 덮은 백열등이 켜졌다. 천정등을 켜자 실내는 운치를 더했다. 화장실 입구 옆 별실에는 탁구대도 하나 놓여있었다.
“이곳은 어떻게 사용됩니까?”
아내와 나는 한편으로 어리둥절하며 용도를 물었다.
“이집은 다문화가정을 위한 시설입니다. 농장 일을 줄이던 7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3세계 여인들이 한국인의 아내로 시집와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일찍부터 직시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한국의 노총각들이 동남아 여성들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가정이 갑자기 늘어났다. 그때는 아직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인 가정이 평화롭게 뿌리내릴 수 있는 여건이 많이 부족했다. 특히 대도시와는 달리 농촌이나 아직도 낙후된 시골지역으로 들어간 여인들은 더더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고국을 그리는 그네들은 꽃을 떠난 나비들이었다.
“한때는 그것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지.”
나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놀라웠다.
“지금도 그래요. 우선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한국 남편의 가부장적인 태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매를 맞는 경우도 있어요. 어머니가 아직 한국어를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상황에서 애기를 갖고 출산을 하다 보니 육아에도 언어발달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라나면서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지만 학교에 들어가면 따돌림이나 멸시를 당하는 것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겪는 현실입니다. 지금은 정부나 지자체가 언어교육, 전통문화, 예절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다문화가정의 정서적인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조선족 여인들은 돈을 벌기위해 불법이나 위장결혼으로 입국하는 사례가 있어 오히려 한국 신랑들이 피해를 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올바른 직장을 갖지 못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노총각들이 나이어린 외국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루다보니 생기는 문제가 더 많은 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집을 어떻게 운영하는 지 궁금하네요.”
“내가 하는 것은 체계적인 교육이 아닙니다. 일종의 쉼터라고 할까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다문화가족들이 가정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다만 장을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이곳의 생활과 한국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첫 시간에 가이드를 했습니다. 그리고 차츰 자치적으로 운영되도록 이끌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정도 종교계 지도자나 문화·교육계 명사들을 초청해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그는 하던 얘기를 잠시 멈추고 주방으로 가더니 녹차를 내왔다.
“숙식 문제는 어떻게?”
“보시다시피 주방기구가 다 갖춰져 있고, 쌀통도 늘 채워놓습니다. 김치 같은 밑반찬 한 두 가지만 준비해 놓으면 그들은 소풍갈 때 하는 것처럼 다른 반찬과 간식 등을 준비해옵니다. 그렇게 게임도하고 노래도 부르며 친교하고, 고향얘기도 나누며 위로와 즐거움을 얻습니다. 자기나라의 풍습은 나도 들을 만 합디다−. 이층으로 한번 올라가 볼까요?”
우리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바깥에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층에는 숙소가 4개 있었다. 3개는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이용하고, 나머지 한 개는 10여명이 동시에 잘 수 있는 넓은 방이었다. 방의 형태는 박공지붕의 내부공간을 이용한 다락방이었다. 시설은 펜션이나 콘도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 나들이 하는 것은 마치 멀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겠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가은읍을 중심으로 문경지역에 30~40명의 외국인 신부들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설을 이용할 수 없습니까?”
“봄철 튤립이 필 때부터 시작해 초가을까지 우리 농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 일반인들은 주중에 이용이 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여숙 운영의 취지를 알고 후원금을 내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연중 운영하려면 어려움이 많겠지요?”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힘 들지는 않습니다. 즐거움으로 하니까요. 오늘까지 농촌을 지켜오면서 내게는 가장 보람 있는 일입니다. 때로는 문경 쪽으로 관광 온 교인들이 우리농장의 소식을 듣고 방문하여 묵어가기도 합니다. 박형도 이제는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 두 분이 함께 오셔서 오래 머물러도 좋습니다.”
“아예 이곳에 와서 문형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인간극장’에는 이런 귀한 일이 소개되지 않았던데?”
“작은 일을 크게 선전하는 것 같아서−. 아내와 나는 프란치스코 재속(在俗) 회원입니다.”
재속회는 복음의 삼덕(청빈·정결·순명)을 공식적으로 서약하고 세상가운데서 평신도로 살면서 자신의 삶과 직업활동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수도회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삶 속에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임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내년이면 80주년을 맞습니다. 1209년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모범을 따라 회개생활을 한 것에서 비롯된 공동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유학 중에 회원이 된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가 첫 프란치스칸 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별채를 나와 그의 농장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주변의 농장들은 경계 울타리나 철조망을 둘러놓았지만 그의 농장은 울도 담도 없었다. 농장 뒤쪽을 지나는 농로 옆으로는 벼가 한창 패어있었다. 뒷길로 나가는 오른 쪽에는 돌을 쌓아 조그만 돔을 만들고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을 세워놓았다. 왼쪽으로 돌아나가자 꿱―,꿱―, 거위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철망 안에는 닭과 염소와 비둘기와 토끼가 함께 놀고 있었다. 위쪽으로 개방된 철망 문으로는 비둘기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다시 농장 안쪽으로 접어들자 지붕만 덮은 막사가 있었다. 벌통이 놓여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벌들은 맹렬하게 붕붕거리며 날아올랐다. 그는 벌통을 관리할 때 쓰는 그물망을 집어 아내와 내게 씌워주었다.
“한 번씩 꽃을 따라 이동할 때는 넉 달 정도 집을 떠나 있을 때도 있어요. 아카시아 꿀을 딸 때 강화도에 가면 아내와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출석하는 성당이 있어요. 일 년에 한차례 씩 상봉하는데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난 듯 기뻐하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교회만 있으면 그곳이 고향이 되지요.…….”
‘땡 땡 땡 땡―.’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종소리였다.
“들어갑시다. 시장하시겠습니다.”
어느새 해는 지고 붉은 노을은 서산 모양을 뚜렷이 그려내고 농장에는 어둑발이 깔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지나가는 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 그의 아내가 문밖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맞은편 벽에 걸린 족자가 눈길을 끌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쳐다보는 젊은이의 뒷모습, 그 사진과 함께 ‘주님 닮게 하소서’란 시가 그 아래 인쇄되어 있었다.
따뜻한 봄날의 온유함과/ 불타는 여름날의 열정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어/ 온 누리에 사랑이 움트게 하소서.// 푸르른 가을 하늘처럼/ 맑고 오롯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눈 내린 겨울 산처럼/ 고결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침묵과 고독을 즐기며/ 주님을 만나 뵈옵게 하소서.// 드넓은 땅처럼 굳건하게/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쉼 없는 바람처럼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이렇듯 자연스럽게/ 주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게 하소서. ―문영우 토마스 모어 신부
뒷모습의 젊은이는 서품 받은 아들이며 시는 신부의 다짐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읽어보았다. 봄날의 온유함, 여름날의 열정, 푸르른 가을 하늘, 눈 내린 겨울 산, 흐르는 물처럼, 쉼 없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주님을 닮아가기를 열망하고 있다. 무수한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자연! 화가, 작가, 영화감독 등 그의 속에 서려있는 열정과 다양한 꿈들이 지극히 작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족자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었다. ‘서품식- 2009년 6월 28일(일) 오후3시 목성동주교좌성당/ 첫 미사-2009.6.29.(월) 오전11시 가은성당’ 아들이 안동에서 서품을 받고 그 다음날 고향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린 것을 기념한 것이라 한다.
“늘 위해서 기도하지만 아직도 한쪽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너무도 꿈이 많았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는 혹시라도 아들이 중도에 뜻을 바꿀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생각난 듯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낡은 앨범과 두툼한 A4용지 묶음을 갖고 나왔다. 그 묶음 표지에는 부대 상징 마크인 ‘푸른 별’과 ‘6사단 부관부’란 글자가 선명히 인쇄되어 있었다. 마크는 6.25전쟁 당시 승승장구하는 부대를 두고 유엔군이 ‘푸른 별’(Blue Star)이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지만 원래는 다윗 왕의 문양으로 필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부대가 ‘필승부대’였잖아. 경례할 때마다 ‘필승’ 구호를 외쳤지.”
그는 단단하게 제본된 ‘묶음’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 때 우리 명찰에는 부관부 요원 표시인 빨간 줄도 있었고―.”
묶음은 제대를 앞둔 사람에게 후배들이 축하로 써준 글이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내가 원주로 전출하기 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보였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고 내려올 때에도 ‘저 나무가 10년 후에는 이만큼 자라겠지’ 하는 상상을 안고 하산 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문 병장님의 제대와 미래를 축하드립니다.」
책을 좋아하며 고지식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부서에서는 ‘고문관’으로 통하던 최진국 상병의 글이다.
이밖에도 재미있는 그림과 이야기들이 우리를 지난 날로 이끌어갔다. 앨범에는 문무희 씨와 우리 전입동기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붙어 있었다. 그때 사진의 규격은 요즘 사진의 절반크기도 안 되었기에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와 나는 단숨에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서울로 외출을 나올 때는 남대문 앞에서 문방구를 열고 있던 그의 형 집에서 점심을 대접받기도 했다. 군대시절 얘기는 언제나 시간이 모자란다.
아내와 나는 낮에 둘러보았던 목조별채로 안내되었다. 그는 전기 모기채 사용방법을 가르쳐주고 돌아갔다. 우리는 가방을 풀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그네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농장의 잘 자란 나무숲은 고요하다. 그는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때 나무를 심고 오래 기다렸다. 씨앗으로부터, 묘목에서, 이렇게 무성한 숲을 이루기 까지 어려움을 딛고 꽃을 가꾸며 날개를 상한 이국의 나비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고국을 떠난 나비들이 잠시라도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자리를 제공했다. 무엇을 꼭 크게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내의 손바닥에 내손을 포개고 별을 쳐다보며, 흙을 사랑하는 마음이 에덴을 찾아가는 길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실과 이상……」 부분은 신영복의 『담론』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