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나의 친구 신영복 선생님(6)(탁현민)
By 탁현민 | 2023년 6월 16일 | 미분류
언제부턴가 뉴스를 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결과 갈등, 폭력과 무지의 상업적 언어만 나부끼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여전히,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주식이나 집값, 코인, 과학 기술의 혁신이 ‘나’를 힘들게 한다. 세기말도 아닌데 우울이 정서의 기조다. 가까운 심리치료 병의원은 환자들로 붐빈다. 버려진 느낌으로 살고 있는데 탁현민 작가가 신영복 선생을 모시고 왔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작은 기쁨에 인색하지 말고 큰 슬픔에 절망하지 맙시다.” 익숙한 선생님의 언어가 탁 작가를 통해 다시 들려온다. 8월 출간될 탁 작가의 신간 <사소한 추억의 힘> 원고 일부(70매)를 입수해 주말 식탁에 올린다. [편집자 주]
언젠가 어느 날이 되어
다음날 2016년 1월 15일. 내 평생의 스승, 평생의 친구는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 없이 멀리 떠났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선생님의 제자, 동료, 독자뿐만이 아니었다. 감옥 동기, 정치인들, 언론인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저마다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셨을까? 추모객 중에는 놀랍게도 <청구회 추억>에 등장했던 그 꼬마도 있었다. 이미 그도 노인이 되어 있었다.
무덤을 쓰지 말고 수목장으로 하라는 유지대로, 선생님을 고향 밀양의 소나무 아래 모셨다. 비석도 세우지 않아 다시 찾아가도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돌아가시고 몇 해가 지나면 추모 행사 같은 것도 따로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살아 계실 때 쓰셨던 많은 글씨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셨고, 내게는 내가 쓴 글을 선생님의 글씨로 직접 쓰셔서 보내주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직접 보내주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미리부터 떠날 준비를 해오셨던 것이었다.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장지까지 함께했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선생님과의 사연들을 회고했다. 더러는 웃고 더러는 울었다. 다들 선생님과 각별한 사연 하나씩을 소중하게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를 보았다. 선생님이 병환 중이실 때 혹시 쓰고 계신 원고가 있는지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그간 발표된 책들은 작정하고 쓰신 ‘책’이 아니라 옥중에서 보낸 편지, 여행지에서 보낸 서간문, 강의 내용을 정리한 강연집, 서예 작품에 대한 방서와 해설, 그리신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원고가 있기는 있는데, 매일 고치고 또 지우다 보니 남길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이야기를 하셨다. 은둔한 천재 소설가와 문학을 꿈꾸던 한 청년의 우연한 만남, 소설가의 애정과 배려로 결국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되는 주인공 청년 이야기는 마치 내가 대학에서 선생님을 만나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기억과도 닮아있었다.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다.
그해 나는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문재인 후보 대선 캠페인에 참여했다.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새 대통령을 모시고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여러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지만 상황의 어려움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묻거나 따지거나 울어버릴 수 있는, 아니 찾아갈 수 있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돌아가신 선생님 전화번호로 회신 없는 문자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답신은 없었지만 그런 날 선생님의 책을 펼쳐보면 거기에는 매번 나를 위로해 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2023년, 요즘은 다시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세상은 뒤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이전에 겪었던 깊은 분노와 절망이 또다시 엄습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제주에서 자꾸 선생님 책들을 다시 펼쳐보곤 한다. 정권이 바뀌고 얄팍한 정치적 이해와 무지의 소치로 선생님에 대한 비난과 음험한 말들이 전해질 때도 많았다. 그것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모두 되갚아 주어야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유고를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은 조금씩 잦아든다. 선생님은 평생 다른 이들을 비난하거나 폄훼한 적이 없다.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처럼 엄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을 돌이켜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의 잘못은 냉혹하게 평가하는가 하면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자기의 경우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남의 경우는 그러한 사정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거나 알더라도 극히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형평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너그러워야 하고 자신에게는 추상처럼 엄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전제입니다. - ‘춘풍추상(春風秋霜)’
요즘은 부쩍 선생님 생각이 난다. 아마도 여러 가지로 막막하고 막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괜히 혼자 있게 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곤 하는데, 선생님은 이럴수록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나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요즘에야 그 말씀이 납득이 간다. 세상에 혼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혼자서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서로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관계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간다고 하셨다. 가르치고 배우는 연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깨달아가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나도 이제는 고립무원에서 깨달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나 자신을 깨달으며 조금씩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며 한 시절을 보내고, 언젠가 어느 날이 되어 다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걸어가셨을 서오릉 소풍 길을 따라 나도 가슴에 맑은 진달래꽃을 한 장 붙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글쓴이 탁현민은
성공회대학교를 졸업하고 공연 연출, 행사 기획, PI(President Identity), CI(Corporate Identity)와 같은 일들을 해왔다. 토크콘서트, 북콘서트와 같은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도 했다. 대통령 행사를 전담하는 선임행정관(2017)으로, 이후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2019)을 거쳐 청와대 의전비서관(2020)으로 일했다. 재임 중 국가 기념식, 대통령 행사, 외교 행사를 기획, 연출했으며 남북 문화 교류 행사의 총연출 및 남북정상회담의 의전 실무를 담당했다.
첫댓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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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귀한 글 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파인딩포레스트' 하하씨네에서 함께 봤으면 좋겠다.
'서오릉 소풍 길'하면 신영복 선생님과 겹쳐
고인이 되신 강 목사님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