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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강도(强度)와 정도(程道)의 차이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다.’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더위와 어제의 더위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차이(差異)’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의 더위와 어제의 더위를 동질(同質)의 것으로 취급하여 그것을 양적(量的)으로 표현한 게 온도(溫度)라는 개념이고, 그것으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덥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길이, 넓이와 같은 것들은 운동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1미터가 2개 있으면 2미터가 되고, 100개 있으면 100미터가 될 수 있는데, 1미터와 100미터의 속성은 크기만 다를 뿐 같다고 했습니다. 1미터와 100미터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운동성을 갖지 않는 길이, 넓이 등은 크기만 다를 뿐 정도의 차이를 갖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양적으로 크기의 표현이 가능하고 비교도 가능합니다. 양적 표현이 가능한 것의 크기들은 서로 포함할 수 있다는 겁니다. 1은 10에 포함되죠. 포함되므로 크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속도, 온도는 어떻습니까? 가령 1㎧가 2개 있으면 2㎧가 됩니까? 1℃가 100개 있으면 100℃가 됩니까? 1℃는 100개 있어도 그냥 1℃일 뿐입니다. 이렇게 속도, 온도 등이 갖고 있는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강도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차이를 가지는 것들은 운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운동성은 사실은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운동성 그 자체입니다.) 그때마다 다른 질적 차이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날씨와 내일의 날씨는 ‘더 혹은 덜’이라는 정도의 차이로 말해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내일의 날씨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고 또 포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강도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로 말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어떤 상태나 운동성’을 공간화 시켜 보는 습관 때문인 것입니다. 가령 아픔 같은 것은 아픈 지점과 때에 상관없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아픔입니다. 가령 손가락으로 꼬집는 아픔과 칼로 찢는 아픔은 서로 다른 아픔일 뿐 어느 아픔이 더 큰 아픔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픔을 느끼는 몸에서의 전달 속도나, 퍼지는 면적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아픔이 다른 아픔보다 크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픔을 ‘자극과 반응’이라는 관점으로 보면서 아픔의 원인에 대한 크기를 측정함으로서 아픔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극(원인)’의 크기일 뿐 아픔의 크기일 수는 없습니다. 원인의 크기를 알 수 있고 그것을 결과에 그대로 반영하려는 것은 결정론적 방법일 뿐입니다. 원인(자극)의 크기와 상관없이 어떤 아픔은 ‘양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질적인 그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인의 크기를 측정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요. 이 말은 아픔 같은 질적인 것은 애초부터 ‘크기’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언뜻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밀고 나가보면 만약 아픔이 크기를 갖고 있다면 시인(詩人)은 필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과학자’들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크기를 갖고 있지 않아야, 즉 질적 깊이만을 갖고 있어야 그것들을 길러내는(혹은 드러내는) 시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질적으로 다른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동일성이라는 잣대로 양화(量化)’한다면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론 질적으로 다른 강도의 차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치 상품의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표현되는 게 재현(再現)일 뿐,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니듯 상대적으로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에 비해 ‘표상(表象)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말을 봅시다. 가령 사과를 보고 있다고 할 때, 사과를 지각(知覺)한다는 것은 사과 그 자체가 눈 속으로 들여오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면 눈이 매우 아플 겁니다. 사과 그 자체가 몸(혹은 눈)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사과와 똑같은 혹은 똑같다고 간주되는 ‘사과의 등가물(等價物)’이 들어오는 것이죠. 즉 지각한다는 말은 사과를 보거나 만지면서 사과의 등가물을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텐데요, 이것을 ‘표상적 지각(知覺)’이라고 합니다. 등가물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과는 사과와 동일한 그 무엇으로 표상되어 지각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표상이란 ‘다시 떠 올려지는’ 눈앞에 있는 사과라는 실체의 복사물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표상은 사과라는 실체에 대한 재현(再現)인 셈입니다. ‘표상의 논리’는 특권적(特權的) 동일성(同一性)으로 다른 어떤 것을 재단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지각할 때, 사과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없으므로 사과의 등가물을 사과의 대리물을 재현으로서 받아들이고 우리가 사과를 지각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한 ‘표상으로서의 등가물’을 사과 그 자체로 환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과는 결코 우리에게 완벽한 등가물로서 지각되지 못합니다. 그것처럼 표상적 지각의 세계에선 질적으로 다른 것들도 ‘등가물의 그 무엇’으로 표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을 양적인 방법으로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날씨와 내일의 날씨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려면 결국 그것들을 ‘정도의 차이’의 세계로 바꾸어 주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표상의 지각 방식이고, 재현의 지각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생명)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정도 차이’로 이해하려 할까요? 그건 우리(생명)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실용적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표상적 지각이란 대상의 등가물을 보려는 작업인 것 같으면서도 그때의 '등가물'이란 오히려 주체가 무엇을 대상에다 덧붙이는 작업을 하는 게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인 것 같으면서 가짜인 이런 것들을 우린 '사이비(似而非)'라고 하죠. 다시 말하면 표상적 지각이란 대상의 본질을 보기 위함인데, 그것은 등가물을 통해서이고 그 등가물은 주체가 대상에 오히려 어떤 것을 첨가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체가 어떤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덧붙이는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게 표상적 지각과 비표상적 지각이 갈라지는 지점 같습니다. 오히려 대상에 주의(注意)하여 대상에 묻어있는 잉여를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걸 응축(凝縮)이라고 합시다. 가령 저의 경우 시(詩)도 일종의 응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때의 응축은 대상의 어떤 본질을 찾아내려는 작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응축은 '표상적 지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응축이란 대상의 잉여를 모두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죠. 어쩌면 주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죠. 우리는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주체가 주의를 통해 대상에 집중하고 응축하는 작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게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게 ‘진화(進化)’가 아닐까요? 진화란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이죠. ‘좋아지는 것’과 ‘복잡해지는 것’을 잘 생각해 봅시다. 복잡해진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간격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죠. 주체와 대상의 간격이 0(zero)에 가까운 게 물질이라 보여 집니다. 간격이 더 깊어진다는 것은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질적인 것을 양적으로 보는 것은 삶의 문제에 이르게 되면 곤란해집니다. 당연히 우리 삶은 ‘강도의 차이’가 연속되고 있는 것이죠. 1살이 10개 있으면 10살이 되고, 100개 있으면 100살이 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1살 때의 삶과 52살 때의 삶은 엄연히 질적으로 다른 삶이죠. 52살, 즉 지금의 삶은 엄연하게 이때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새로운) ‘차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은 어떤 운동성을 말하고 운동성이란 흐름을 말하는 것이며, 흐름이란 ‘시간’과 관련된다는 말입니다. 흘러간 강물이 역류하여 자신의 지난 흐름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간을 ‘선형(線形)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거나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운동성으로서의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과 뒷면 혹은 전후(前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1살 때의 나와 52살 때의 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경험하는 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란 질적으로 다른 흐름이라고 본다면 ‘질적으로 다른’ 그 흐름에다 ‘정도의 차이’를 적용해서 어느 게 더 큰지, 더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말한다는 게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이렇게 늘 우린 질적으로 다른 끊임없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해지는 것은 가능할까요? 건강해진다는 것은 건강한 어떤 기준점(가령 젊었던 시절)을 정하고, 지금 52살의 삶을 기준점과 비교해서 기준점에 근접시켜 보겠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건 삶의 질적 운동성을 부동(不動)의 단면(斷面)에 대응하려는 짓이지요. 예전에 ‘가상(假想)으로 정해진 건강함’의 어떤 지점을 지금의 삶에 대입시키려는 것이든, 아니면 지금의 삶을 예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든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여기서도 건강을 ‘선형적으로 보려는 것’과 ‘더 와 덜’이라는 양적 개념을 적용하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살의 삶과 52살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삶이며 어느 게 더 건강하다거나 어느 게 더 좋은(?) 삶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20살 때의 건강함이 따로 있고, 52살 때의 건강함이 따로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52살의 삶은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이라는 말이죠. 물론 20살의 삶과 52살의 삶이 완벽하게 ‘실체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결국 ‘중도(中道)’와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질적으로 새로운 삶이므로 예전의 젊다고 명명하는 나이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 그 자체도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가 가장 건강한 삶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젊은 날의 특정 시절’로 되돌아가는 ‘건강함’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헛된(?) 노력이 지금의 건강함을 해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삶이라도 그대로 지속되는 흐름의 한 과정(분할할 수 없는)일 뿐입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건강함’을 발견하는 것이죠. 바로 지금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건강한 겁니다. 다만, 지금의 삶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의 총합일 수는 있겠습니다. 현재는 일종의 누계 값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누계 값이란 어떤 공간에 흩어져 크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깊이와 관련된 축적(蓄積)이라고나 할까요. 현재와 과거는 서로 소통하고 중첩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야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첫댓글 여기서부터 베르그송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질적 강도, 공간, 시간, 동시성, 과거. 기억, 진화, 창조 같은 것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