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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학생 관계에 대한 토막 생각 1
[가장 큰 행복]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참 사람[眞人]을 만나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 인생은 그를 만남으로써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 만남에서 우리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발견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 사람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한 사람 만나기를 강하게 바라게끔 양육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에요. 그렇게 양육된 사람은 참 사람 찾는 일에 몰두할 것이고, 그렇게 찾으면 반드시 참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마다 참 사람 만나게 되는 인연이 다르긴 해도 그것은 진리입니다. 바로 이 만남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행복이 이 세상에서 완성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아직 참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진리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아직 인생의 참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그런 사람을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음은 얼마나 큰 슬픔인지요!
[선생님 밑에서 배워라!]
한 문화 안에서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역사적 문화에 접목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어떤 ‘한’ 사람을 통해서 배워야 해요. “선생님 밑에서 배운다.”는 원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컨대 괴테의 틀을 만들고 그것을 완성해 준 사람은 헤르더(Herder, 1744-1803, 독일 철학자)였습니다.
문화의 본질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선생 밑에서 배웁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문화를 창조 못하지요. “선생님 밑에서 배워라!” 이 한 마디는 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그리고 그의 문화적인 삶이, 무엇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 바탕 위에서 사람들은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법(the Dharma)은 두 사람 사이로 흐른다.]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부처님께 아뢰었어요. “여래여, 제가 만일 당신을 만나 뵙지 못했더라면 연각(緣覺)쯤 되어 숲 속에서 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부처님을 만나 뵙고 법의 통교(通交)를 알게 되었습니다.”
연각이란 혼자서 깨달아 자신의 ‘교리(도그마)’를 완성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하가섭(摩訶迦葉)은 지금, 자기가 만일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스스로 만든 교리적 깨달음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을 만나 뵙고 법의 통교(通交)를 알게 되었다.”는 말은 그가 부처님을 만남으로써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보편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두 사람이 만나 모든 인간이 [어리석은] 범부라는 진실 안에서 하나로 될 때, 법의 통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하가섭의 깨달음은 스승인 석가모니를 만났을 때 비로소 이루어졌지요. 깨달음이란 한 선생과 한 학생의 참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들을 생각해봅니다. 진리는 두 사람 사이로 흐릅니다. 이를 가리켜 ‘법의 통교’라고 부르지요.
[정신적 통교]
언제 사람은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도겐은 답합니다. “선생과의 정신적 통교를 경험할 때 그렇게 된다.” 정신적 통교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봅시다. 정신적 통교는 두 사람 사이의 인연 속에서 생겨납니다. 인간관계 바깥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게까지 하는 그런 인간관계는 어디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역사적 상황 안에서, 역사 속의 문화적 전통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문화적 전통은 인간의 자기-깨달음의 전통이에요. 인간의 자기-깨달음의 전통이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세월을 따라 옮겨진 자기-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 통교는 참 사람과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람이 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을 수 없어요. 여기 참 사람이란 선생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기는커녕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거예요. 그는 자기-깨달음이 무엇인지 이해 못합니다. 참된 자기-깨달음이란 참 사람을 만나서 자기 파멸을 경험하는 거예요. 바로 이 철저한 자기 파멸에서 우리는 절대 무(無)를 향한 자기-결단을 끌어낼 수 있지요. 이렇게 해서 자기-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선생을 만나지 않고서는 자기-깨달음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런 만남이 없으면 붓다 되겠다는 소망이 생겨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이 곧 참된 자기-깨달음을 의미한다는,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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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 사람을 만날 수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참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참 사람 찾는 일에 몰두할 것이고 그렇게 찾으면 참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참 사람[眞人]을 만나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어야 해요. 우리 인생은 그를 만남으로써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 만남에서 우리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발견되는 거예요.
사람이 언제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일까에 도겐은 답합니다.
“선생과의 정신적 통교를 경험할 때 그렇게 된다.”
어떤 사람이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기는커녕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거예요.
그는 자기-깨달음이 무엇인지 이해 못합니다.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이 곧 참된 자기-깨달음을 의미한다는,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입니다
언제 사람은 붓다 되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도겐은 답합니다. "선생과의 정신적 통교를 경험할 때 그렇게 된다." 정신덕 통교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봅시다.
참된 자기-깨달음이란 참 사람을 만나서 자기 파멸을 경험하는 거예요. 바로 이 철저한 자기 파멸에서 우리는 절대 무(無)를 향한 자기-결단을 끌어낼 수 있지요.
“선생님 밑에서 배워라!” 이 한 마디는 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그리고 그의 문화적인 삶이, 무엇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 바탕 위에서 사람들은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사람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철저한 자기파멸에서 우리는 절대 무를 향한 자기-결단을 끌어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