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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남자 ……‘다시 건너지 못할 강, 목숨 버릴 심산으로’
한 생애에 전율을 주는 존재를 만나는 것은 몇 번이나 가능할까요?
4년 전, 봄 소식을 기다리던 2월의 어느 아침,
무심코 펼쳐 든 조간신문의 반면을 장식한 한 남자.그 남자의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그가 아니면 어쩌면 우리의 세 번째 도전인 ‘산사 음악회’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에.
저를 자석처럼 잡아 끈 신문의 타이틀은 이랬습니다.
‘초상사진 박아 번 40억, 국악에 탈탈’
전직 대통령을 비롯 재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회당 수 천 만원을 받던
초특급 대우의 사진작가 김영일씨.
별 일이 없었다면 남은 인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이 남자에게 인생을 뒤흔든
‘별 일’이 일어납니다
1996년, 한 잡지사로부터 국악인들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김영일씨.
(참고로 그는 서양 클래식은 즐겨 들었지만 국악이라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채널을 바로 돌려버리던 사람이었답니다.)
김영일씨는 그 국악인의 살아있는 모습을 담기 위해 ‘ 당신은 소리 하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소리를 해라’ 고 말하고 사진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여성 국악인은 시키는 대로 ‘단가’한 자락을 읊기 시작했는데
( ‘아서라 세상사 쓸 것 없다..’로 시작하는 편시춘이란 단가였습니다)
그는 마치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손이 굳어버렸다고 하네요. 어떤 모델 앞에서도 떤 적이 없던 그가
젊은 소리꾼의 목소리에 셔터를 누를 수 가 없었다는 겁니다.
김영일씨는 ‘ 당신 뭐냐, 당신 음악은 뭐냐. 도대체 나를 한 방에 때려눕힌 이게 뭐냔 말이냐?’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전국 국악의 현장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떠돌이 행각은 ‘사라져가는 이 소리’들을 담아야겠다는 소명감으로 이어졌고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다 털어 넣어 국악전문음반사 설립, 국악 연주 전용 한옥 공연장 건립,
또 형편 어려운 청소년 국악도들에게 악기지원사업 등 ‘국악 전도사’의 길로 나아갑니다.
문제는 사진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면, 우리소리, 국악은 그를 전세 집으로 끌어 내렸다는
것입니다. 국악에 남은 생애를 던지기에 결심하기까지의 그의 말은 결국 제 눈물샘을 건드렸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 한참 고민하다 비장한 각오를 했어요.
국악이란 다리를 건너가면 다시는 건너오지 못할 거다. 목숨 바꿀 심산으로 만들어야겠다.”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세상 모두가 원하는 부귀영화를 한 방에 쓰러뜨린 그 소리.
고상한 서양 클래식만 찾아 듣던 이 남자의 귀를 담박에 뚫어버린 그 소리.
10년 넘은 세월을 매달려도 그를 ‘허기지게’ 하는 그 소리.
그 소리가 정말 뭐였기에
그런 제 질문에 김영일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 삶을 모두 바꿔도 좋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그 중 최고는 ‘산조’입니다.
산조는 완벽한 현대 음악이예요. 서양에서 작곡가가 평생 여러 가지 음악을 만듭니다.
그런데 산조는 평생 딱 한 곡 만들고 죽는 곡입니다.
인생 전체를 산조에 담습니다. 제 필생의 꿈은 ‘산조전집’을 만드는 겁니다.
가야금 산조만 한 100장 될 텐데 10년 잡고 가야금부터 할 겁니다.”
우리 포도나무예술조합의 오주은 음악감독.
클래식 한 번에 국악 한 번 꼴로 하고 싶다고 하는 국악 사랑 꾼이라 저랑 죽이 잘 맞습니다.
3회째, 드디어 국악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3회를 장식할 국악인이 알고 보니,
‘아무나 선정해 음반작업을 하지 않는’ 김영일씨와 녹음 작업했던 가야금 주자 송정아님이네요(앗싸)
거기다 김영일씨가 국악 중에 최고로 치는 ‘가야금 산조’가 이번 공연의 주인공입니다.
가야금 뿐만 아니죠. 우리나라 여성들이 국악기 중 제일 좋아한다는 해금,
눈물샘 말라 버린 남성도 울린다는 대금,
그리고 타악 등이 함께 합니다.
그런데 장소가 일반 공연장이 아니라 산 속 사찰이네요.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자, 두 번째 남자를 만나 보실까요.
두 번째 남자…….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도 함께 들리게’
저희 포도나무 예술조합의 음향감독 윤재필님이 두 번째 남자입니다.
그는 음악감독으로부터 3회 무대가 국악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심각해집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국악은 일반 공연장에서 연주하면 소리가 죽어 나옵니다.
특히 여름에 에어컨 틀어야 하는 꽉 막힌 공연장에서 하면 우리 악기 특유의 여운이 전달 안되죠.
한옥이 좋은데….”
음향감독, 바로 파주 일대의 한옥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파주출판단지 안에 있는 전라도에서 뜯어와 재조립한 한옥, SBS 일산 한옥 세트장,
출판단지에서 50분 더 올라간 고택 한옥 등…...
며칠 돌아다니던 음향감독의 발걸음에 기운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한옥도 한옥 나름이라 대로변에 있어서 자동차 소리 때문에 안되고 공연하기에 툇마루가 좁아서 안되고
관객이 앉기 불편해서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시간이 얼마 없는데 그냥 일반 공연장으로 가야 하나
수심에 차있던 그가 말합니다.
“파주에 절에 몇 군데나 되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음악감독과 함께 근거리에 있는 심학산 약천사를 찾아 올라갑니다.
고려시대 절터로 세월의 부침 끝에 1932년 중창된 유서 깊은 절.
파주 중심부에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니….
지장보전에서 한눈에 바라 보이는 파주 시가지 전경도 시원하게 들어왔고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행랑채의 너른 안마당의 정갈함도 인상적이었으며
사찰 전체를 아니 전 중생을 굽어보는 듯한 거대 불상의 위용은 놀라웠습니다.
종교가 따로 없는 동행 조합원들이 입 벌리고 사찰을 관광하고 있을 때 들려온 소리.
“됐다”
3년 맘 잡고 절에 들어온 고시생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찰 구석구석을 시찰하던
음향감독의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음향감독은 행랑채 마당 한 구석에 앉아있었지요.
아마도 당일 연주의 전 과정을 홀로 시뮬레이션 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답을 낸 게지요.
어쨌든 음향감독님의 “됐다”는 말 한 마디에 절 구경 하던 일동 집합.
음향감독은 약천사 안의 행랑채 너른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연주자도 관객도 앉게 하겠다고 말 합니다.
저녁 산사의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 소리도 함께 듣자고 합니다. 그 소리도 음악이라며.
그리고 ‘실상 풍경도 같이 연주하는 법’ 이라는 평소 안 하던 명 카피도 한 마디 날립니다.
음악감독도 한 마디 거듭니다
“ 산사 음악회네요. 관객들, 휘톤치트 받으면서 치유 받겠네.”
1, 2회 끝난 뒤, 일산 파주권 이곳 저곳에서 건물 공간을 무상 제공하겠다는 건물주들이
있는데 그래서, 그냥 편하게 일반 공연장으로 가도 되는데……
”국악은 한옥이나 자연 속에서 들어야 제 맛”이라는 우리 음향감독의 고집에
우리는 조금 별난 콘서트를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등산객들의 발길도 끊어지던데……..
고적한 산 속 사찰에서 풍경소리와 함께 하는 ‘산사 음악회’ , 사실 생각만으로도 근사하지 않나요?
아참, 산사 음악회는 음향감독님의 노력만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요.
자, 마지막 남자, 세 번째 남자를 만나 보실까요.
세 번째 남자….’좋습니다. 있습니다. 됐습니다’
하우스 콘서트가 아니면 산 속 사찰을 찾을 일이 없는
카톨릭 신자 음악 감독, 기독교 신자인 음향감독, 무교인 조명 감독…….
이 분들이 난데 없이, 예정 없이 산속을 찾아 들어가 고요한 산사의 정적을 깨며 휘젓고 다니는데
지장보전 옆을 느적느적 지나시는 스님이 눈에 띕니다.
사실 우리의 음악감독 걱정이 많았습니다.
‘종교와 무관한 행사인데 허락해줄까?’
‘타 종교 신자가 콘서트를 부탁해도 들어줄까?’
‘신성한 절에서 음악회를 하는 것을 이해해줄까?”
고생 끝에 이 심학산의 사찰을 만나 마음에 들어 하는 음향감독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 물어는 봐야겠는데
음악감독, 어떻게 서두를 꺼낼 지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았답니다.
“스님, 이 절에 계십니까?”
“네에…”
그리고 나서 눈 딱 감고 1,2회 때 장소섭외하며 해왔던 것처럼 바로 영업사원 모드로 바꿔 말을 이었대요.
“저희는 파주 일산권에서 비영리 문화운동으로 음악회를 하는 사람들인데요.
다음 달에 국악을 하게 되어서…(그 다음은 음악감독, 홍보 섭외를 위해 수십 수 백 번 했을 레파토리 이어졌구요)”
“네에….”
스님은 네에…네에….하실 뿐, 나무나 돌을 보고 계신 표정으로 서 계시더라나요.
“그래서 허락을 얻고 싶은데 주지스님을 만나 뵐 수 없을까요?”
“이 절에 어차피 스님이 몇 안되십니다”
“…(넹?!)”
우리 음악감독 우문현답 같은 그 답에 다음 말을 잠시 잊고 있는데 스님 답을 이으십니다.
“ 둘러 보세요. 할만한 장소가 있는지”
그리고 가던 길을 느적느적 계속 가십니다.(알고 보니 바로 주지 스님이셨습니다)
선문답 같은 대화 속의 답이었지만 어쨌든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신이 난 음악감독,
다음 문제는 이 절의 음향, 조명, 관객 서비스 부분입니다.
사찰이라 음악회를 위한 시설은 전무하지 않겠는가…..걱정된 거죠.
그래 다음 날 시간을 정해 다시 주지스님을 뵈러 갔습니다.
이번에는 절 마당이 아니라 종무소로 음악감독을 안내한 주지스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와 조목조목 여쭤보는 음악감독 말에 스님, 예의 ‘네에 네에” 하십니다.
“음향은 저희가 설비해야겠죠?”
“저희 절은 대중법회를 위한 음향시설이 있습니다. 충분할 겁니다”
“조명은요?”
“저녁에 언제든지 켜보십시오. 음악회를 할 정도는 될 겁니다”
“관객수가 많은데 뒷풀이 때 뜨거운 물을 담을 대용량 시스템이 있는지요?”
“ 200인분까지 대접할 장치가 있습니다”
마침내 근심걱정이 싹 사라진 음악감독.
“저는 정말 허락 받기 어려울 줄 알았어요. 이렇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허용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절은 모두의 것인데 마땅히 모두가 쓰게 해드려야죠.”
“그런데…저희가 비영리 단체라 행사 끝나면 남지가 않습니다. 시주라도 해야할 텐데….”
“좋은 일 하시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 생각은 마십시오”
파주시내 한옥을 뒤지다 실망해 모두가 힘 빠진 상황이어서 더 그랬을까요.
초면에 인사 건네고 우리 일을 전달 드리는 과정에서 그저 모두 네에,네에 하시다가
이것 필요하고 저것 필요하고 주문도 까탈이 많았는데도
그저 ”좋습니다. 있습니다. 됐습니다” 하셨던 스님의 환대는 감사를 넘어 감격이었습니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저희의 제3회 산사음악회는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3회 공연을 위해 연주자 인터뷰를 한 뒤 저는 요즈음
‘한 여자 때문에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 이야기도 하려 합니다.
그리고 한 여자, 가야금은 내 운명……
앞서 말했듯 3회 국악 공연은 가야금, 해금, 대금, 타악 등으로 이뤄집니다.
서울대학교 국악과 출신들로 이뤄진 소리공감의 주역들인데 이번 연주의 대표주자는 송정아의 가야금입니다.
그래서 음악감독과 함께 송정아님을 인터뷰하게 됐습니다.
2주전, 전철역 근처의 스타벅스 커피점.
첫 눈에 아티스트의 포스가 느껴지지만 어찌 보면 첼로 같은 악기를 둘러매고 다니면 더 어울릴 듯한
나이가 쉬이 짐작 되지 않는 단아한 여성이 문을 열고 다가왔습니다.
앉자마자 미리 준비한 연주 레파토리를 음악감독에게 내밀던 송정아님.
슬쩍 곁눈질로 본 내용은 일단 구미를 끌어 당깁니다.
우리의 첫 번째 남자 김영일씨가 남은 인생을 걸고 싶다는 음악 ‘가야금 산조’를 비롯
제가 개인적으로 시간 날 때마다 즐겨 듣는 해금연주,
그리고 그 유명한, 남자의 마른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다는 대금의 ‘청송곡’ 등을 보고 혹했지만
동시에 슬며시 걱정도 올라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프로그램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는 음악감독 옆에서 문외한의 자유를 빙자해
한마디 묻습니다.
“전통 곡과 현대 곡이 7:3 정도네요? 개인적으로 국악을 좋아하지만, 사실 우리 음악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잖습니까? 그래서요, 크로스 오버(crossover)곡을 좀 더 넣을 수 없는지요?”
한마디로 국악기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요나 팝송 달콤한 클래식 등을 더 많이 넣어달라고
주문을 넣은 거죠.
그러자 송정아님 표정이 단호해집니다.
“왜 사람들이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 하시죠? 지금까지 하우스 콘서트를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관객들의 반응을 제가 잘 압니다. 지금 제가 들고 나온 곡들은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좋았던 곡들입니다.
염려 전혀, 전혀 안 하셔도 됩니다”
“……아,그래요”
“그리고 저는 요즘 국악 공연 때 크로스오버가 너무 주가 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우리 악기로 다른 나라 음악이나 요새 가요를 연주해 달라는 건데
우리 악기는 우리 음악에 맞게 만들어진 겁니다.
관객들한테 우리 음악을 우리 악기로 연주했을 때의 감흥을 전할 자신이 있으니 믿고 맡겨주시죠.”
한 달에 두 서너 번 국악을 찾아 듣는 제가 20년 이상의 삶을 국악에 바쳐온 그녀 앞에서
무슨 말을 더 잇겠습니까? 그런데 왜일까요.
살짝 면박 당했다는 무안 보다는 기분 좋은 안도가 올라오는 이 느낌 말이죠.
그녀의 국악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보며 ‘이번 공연은 잘 되겠다’ 라는 기대가 올라와서 아니었을까.
인터뷰 말미에 “가야금을 선택한 후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줍니다..
“중학교 때 시작 했는데, 20년 동안 단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가야금의 무엇이 그렇게 당신을 사로잡았습니까?”
백 번도 더 받은 질문이겠지만 그녀, 아주 진지하게 천천히 답합니다.
“서양 현악기는 활로 켜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악기 가야금은 손으로 직접 뜯습니다.
그래서 가야금 현에서는 날 것의 소리가 나죠. 또 따뜻하기도 하구요.
그 느낌을 떠날 수 없어서, 그래서 다른 악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날 것이면서 따뜻하다……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두 단어는 공연까지 화두로 가져가기로 합니다.
이번 7월 12일 공연에서 혹시 그 화두를 깰 깨달음의 언저리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해봅니다..
인터뷰 이후 서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게 되면서 그녀의 카카오톡 문패에 달아놓은 글귀를 보았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빨리 보고 싶어지게 한.
‘가야금은 내 운명’
* 우천시에도 공연은 진행됩니다.
* 저녁 산속 공연이니 복장은 긴팔, 긴바지를 권장합니다.
* 예약문의 http://cafe.daum.net/podohcon (다음카페 포도나무하우스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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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분의 소개가 두번 되어있어요^^
체크해 보셔야 할것 같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원고를 옮기면서 착오가 있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
공연 관람을 원하는데 여기에 댓글 쓰면 되는건가요?금요일 저녁이라 가족들과 함께 가려합니다.가까운 약천사에서 하는 공연이라 더 반갑네요.
사실은 젤 행복해 할 분이 남편이 아닐까 싶어요.대한민국 이빠들 너무 힘들게 살고 있잖아여.공연날 뵈요
정말 너~무 가고싶은데요.. 공연 소개글 읽으면서 이번에는 지인들도 같이 가자고 해볼까.. 별 궁리를 다하면서 읽어내려오다 날짜보고..헉~ 가족들끼리 1년에 한두번 가는 여행 날짜랑 하필 겹쳤네요. 아~ 아쉬워라 ㅠㅠ
다음 공연에 뵙고 꼭 인사 나눴으면 합니다.여행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