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걷는 길 Homo est Viator. 인간이란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길 위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도인(道人)이다. 흔한 말로 도통한 사람인 도사님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누구나 길 위의 존재, 도인인 것이다. 사람만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길 위에 있는 존재이다. 길을 벗어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나무는 나무의 길을, 꽃은 꽃의 길을, 강물은 강물의 길을, 구름은 구름의 길을, 바람은 바람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그분’이 가르쳐 주신 길을 걸어가야 사랑받는 자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분’ 이 가르쳐 주신 길은 어떤 길이고 그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내 순례의 화두로 삼고 걸어보련다. .................................................................................... 아침 8시 버스로 길을 나선다. 예루살렘의 아침은 우기가 시작하는 겨울답지 않고 햇볕이 따가웠고 화사한 봄날인가? 예리코로 가는 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해발 750미터의 예루살렘에서 해저 225미터인 예리코로 가는 길이라 지표차이가 무려 1000여m에 달한다. 예루살렘은 가로수도 싱싱했고 푸른 잔디가 깔린 잘 조성된 도시다. 물이 아주 귀한 땅이라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예루살렘을 벗어나자 금새 을씨년스러운 광야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입안이 까슬해지는 메마른 구릉에는 양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 고개를 쳐 박고 풀을 뜯는 듯했다. 하지만 풀이라 했지 먼지더미를 덮어쓴 듯 누런 풀 더미에 먹을 게 뭐가 있다고 연신 고개를 쳐 박고 꾸물거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끔 보이는 조잡한 텐트가 목동들의 거처라고 했다. 길나선지 조금 되었을까, 오른쪽 차창 밖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에 나오는 여관이라고 했건만 이내 지나고 말았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었던 그 여관이 실제 여기 있었는지 어떻게 증명할 건가? 잠시 버스가 멈춰 선다. 유다 광야를 보여주는 전망대였다. 와~ 한눈에 끝 모르게 펼쳐진 광야, 유다광야가 아닌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갈릴레아로 저마다의 고향으로 가는 자그마한 길이 얼키설키 구릉을 타고 넘나든다. 구릉이 꺼진 우묵한 곳은 몇 포기 풀이 자라는 듯 쑥색더미가 언뜻 보이곤 온통 광야는 누렇다 못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눈이 부신다. 광야에는 이 고장 사람들이 라다브라고 부르는 가시나무만 자라고 있다. 그 가시나무 외에는 동물의 이빨같이 뾰족뾰족한 바위가 흩어져 있는 구릉과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지평선에는 주름투성이의 풍화된 산이 포개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목이 타오르고 입안이 바짝 메마르다. 다들 선글라스를 쓴다. 유다광야를 끼고 버스는 달린다. 민둥산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민둥산 뒤에 똑 같은 민둥산이 갈색 파도처럼 이어져 있었다. 산자락에는 관목이 무리져 점점이 자라고 있었지만 풍화된 산의 정상은 오직 모래의 집적으로만 이루어져 산 사이를 칼로 깎은 것 같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것은 와디를 이루고 있는데, 비가 세차게 내리면 와디에는 갑자기 거센 물살이 흘러내린다고 한다. 햇빛은 강하고 눈부시면서도 조용했다. 깊은 정적이 언제까지 민둥산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정적은 이미 몇천 년이나 이 모래 구릉과 함께해 온 것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서도 동물이 살 수 있을까?” 가이드는 독사가 있다고 했다. 또 극성스러운 모기가 살고 있다니 이상한 노릇이다. 모기가 서식할 물웅덩이도 없는데. 유다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주 나를 이끌어주네...” 시편 23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생각이 나는가? 그땐 우스웠다. 우리야 나가면 사방이 풀밭이고 개울이 지천으로 흐르는데..... 이제야 내 눈으로 확인 사살까지 하니 성경 구절이 이해가 된다. 이들에게 풀과 마실 물이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었겠나. 광야란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가? 성경에는 광야를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체험을 하는 장소이며 기다림, 순례와 성장, 사랑을 언약하는 약혼, 배반, 계시, 유혹의 장소이기도 하다. 생명이 없는 광야에서 하느님은 유일한 희망이요 구원의 원천으로 나타난다. 메추라기· 만나· 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상징한다. 인간은 늘 반항하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이토록 반항하고 불평하는데도 하느님은 한결같이 지켜보시며 당신을 ‘풀 먹는 소의 형상’(시편 106,20)으로 취급할 때도 그냥 내버려 두신다. 울끈불끈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걸어서 예리코를, 다시 사마리아를 찾아 떠난 예수님의 발자취가 눈에 잡힐 듯 선하다. 계속되는 내리막을 따라 예리코를 찾아간다. 재미난 것은 도로를 내느라 베어낸 산허리에 푸른 페인트로 ‘sea lebel’이라고 쓴 표지가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해수면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예리코(jericho), 뜻은 향기. 예로부터 향기의 도시,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어 왔다. 예리코는 다마스쿠스와 함께 지금부터 1만여 년 전 신석기 시대가 도래 한 무렵인 기원전 8000년께 세워져 내려온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그들이 살았던 집터와 성벽과 둥근 망대까지 남아 있다. 또한 예리코는 해저 225m, 세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며 서쪽으로 40km 떨어진 예루살렘과는 무려 1000여m가 넘는 고도차를 보인다. 기원 전 1230년께 여호수아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이 팔레스티나 지역을 정복하기 전까지 예리코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이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철조망으로 갈라낸 입구에서 순례객을 태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하는데 운전수가 유다인이면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바꿔야 들어 갈 수가 있다. 우리 버스 기사님은 팔레스타인, 콧수염을 기른 멋쟁이라 무사히 통과했다.
신명기 34장3절에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부른 예리코는 젖과 꿀이 흐르는 도시로 풍요와 쾌락의 상징이었다. 40여 년간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한 이스라엘 민족이 요르단 강 동편에서 내려다본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맨 처음 발걸음을 디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예리코를 점령했던가?(여호 6,3-21) 메마른 광야가 금방 끝나자마자 높이 10여m가 넘는 대추야자가 시원한 초록을 띤 반듯하게 가꾼 농장이 나온다. 번듯하게 길이 나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버스를 멈춘다. 이곳이 정녕 사막 안의 오아시스가 아닌가? '착한목자 성당', 오늘 미사 드릴 곳이다. 순례의 첫 미사가 아닌가. 아담하게 가꾸어진 성당 마당에는 두어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다. 예리코라니 온통 무화과나무로 뒤덮인 곳이다. 왜냐고? 자캐오가 살았던 곳이 아닌가. 첫 미사여서 긴장이 되었지만 이내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써 본다. 하지만 신부님의 강론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좀처럼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성당 중앙 벽에는 많은 양떼에 둘러싸인 예수님이 품에 양 한 마리를 안고 계신 게 아닌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신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번져 나온다. 착한 목자 예수를 표현한 것이렸다. 성당 벽에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럼 종려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흔히 대추야자(date palm)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증들이 환영하는 의례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소철같이 생긴 키가 얼추 20여m가 넘는 대추야자나무 가지를 낫 같은 도구로 베어내는 건 상당히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또 대추야자나무는 삐죽삐죽한 가시 때문에 찔리기 쉽다. 예수님의 입성을 두고 메시아가 오신다고 환호하는 군중이 어찌 그리 재빠르게 대추야자나무 가지를 벨 수 있었을까? 가이드에 따르면 군중들이 들었던 나무 가지는 쉽게 꺾을 수 있고 주위에 흔하게 자라는 올리브나무 가지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림이야 대추야자나무 가지가 폼 날 테지만 가이드 해설도 그럴듯하지 않은가? 오랜 기간 이스라엘 성지 순례만 맡아온 가이드가 괜한 소리한 거 같진 않다. 아~ 성모님이 예수를 잉태하시고 어려운 시기를 겪어낸 데는 대추야자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꾸란이 말하고 있다. 신학연구소에서 낸 책에서 본 것이니 믿을만하다. 그만큼 대추야자 열매는 온갖 영양분이 풍부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성경 말씀에 나오는 꿀은 벌꿀이 아니라 바로 대추야자즙과 포도즙을 일컫는 말이다. 송봉모 신부님은 자몽을 일러 꿀이라고 했다. 대추야자 꿀은 대추야자 열매를 물에 넣고 끓여 꼭 짠 후 뭉근 불에서 걸쭉하게 졸인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 표현은 고대에는 포도 경작과 양 사육에 적당한 지역의 비옥함을, 후대에 와서는 종말론적 번영(이사 66,11-12)과 지혜(잠언 24, 13-14;집회 24,20)를 상징했다. 무엇보다 예리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유혹 산’이 있기 때문이다. 유다광야가 치달리다가 예리코를 앞두고 끝난 곳이라 높이 솟은 산꼭대기에 허물어진 교회 기초만 남은 구축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 헬레나가 세운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 있던 곳이다. 이슬람 시대에 파괴되고 담장만 남은 흔적이다. 세례를 받고난 예수님은 유다광야에서 단식을 하신다. 40일간의 단식이 끝나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구절이 나오지 않는가? 이 유혹은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삽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속해서 반복된다. 이곳이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치열한 유혹의 현장이다.
마태 4,8-9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고 하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이것이 세 번째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이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예수님의 셋째 유혹에 관해 이렇게 묵상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도,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복지와 번영도, 좀 더 살기 좋은 세상도 가져다주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셨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셔왔다.”(나자렛 예수1권 2장 ‘예수의 유혹’에서) 유혹산을 올려다보며 느낀 거 하나. 악마가 뭐 이런 황량한 유다광야에 자리 잡은 예리코를 보여줄 게 뭐람. 호화찬란한 성곽이라도 보여주며 유혹을 했어야하지. 하지만 예리코에는 엘리사의 샘이 있어 분당 4천 리터가 넘는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고 한다. 예언자 엘리사가 이 샘의 수질을 달게 만들어 낸 다음부터 엘리사의 샘이라고 부른다(2열왕 2,21).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대단한 샘이 아닌가? 그래서 예리코는 광야 안에서도 풍부한 물 때문에 대추야자나 무화과, 바나나, 포도, 감귤, 오렌지 같은 과일과 곡물이 풍성하다. 단지 물이 풍부해서 푸른빛을 띤 도시, 예리코가 악마의 눈에도 그 어떤 도시보다 예수님을 유혹하기에 적당하다고 볼 정도로 풍요한 도시가 아닌가?
무엇보다 예벨 카란탈, 콰란테나(Quarantena 산), 유혹의 산이란 말에 압도된다. 산허리에 정교회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며 산에 오르시다가 넘어지고 기도한 곳에 세운 수도원이다. 우린 올라가지 못했지만 유혹의 산 밑에서 올려다본 산은 웅장하다. 아~ 여기서 대추야자를 사서 먹어본다. 아주 달다. 우리나라 대추보다는 서너 배 크고 달기도 달다. 흡사 대추를 꿀에 절여놓았다가 꺼내 먹는 것 같다. 특히 예리코 대추야자는 달기로 소문이 난 거라 한다. 음~ 수레에 과일을 싣고 피는 행상 한테 대추야자를 사야하는데 뭐라고 불러야할까?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그냥 데이트 달라고 하면 대추야자를 준다. 데이트라니, 무슨 뙤약볕이 내려쬐는 사막에서 데이트를 한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 대추야자 정식 이름이 바로 대추야자(date palm다. 다시 버스로 예리코 시가지를 둘러본다. 시가지 중심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둘레를 사슬로 막아놓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이게 바로 자캐오가 쪼르륵 올랐던 무화과나무란다.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자케오는 달려갔다. 메시아의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은 자케오에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자캐오는 길옆에 서있는 돌무화과나무를 타고 올랐다는 바로 그 나무인가? 하지만 이 나무는 수령이 7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는 예리코 주민들이 심은 게 아니었을까? 눈으로 어림짐작해본다. 이십여 미터는 족히 될 키에 세 아름정도 넘는 고목에 지금이라도 자캐오가 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 묵상 중에 자캐오가 무척 부러웠던 적이 있다. 키가 작은 자캐오가 구원을 찾는 모습이 이상적이지 않은가? 구원을 얻는데에 장애가 있다면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라도 만나려고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예리코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가로수로 심어진 부갠베리아라는 나무에 활짝 핀 꽃이 아니었을까? 손톱크기의 붉은 꽃이 여간 예쁘지 않다. 눈에 보이는 붉은 꽃은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란다. 받침 안에 꽃술 같은 노란 것이 꽃이라는데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예쁜 것은 분명하다. 에리코 시가지 담장 위에 점점히 달려 있는 부겐베리 새빨간 꽃이 있어 에리코가 더 아름답다.
어떤가? 아직도 예리코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첫날, 예리코로 끝낼 수야......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그분'의 발자취를 맹렬하게 쫒아가야 잖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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