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며 산다
안유환
편지는 써서 즐겁고 받아서 기쁘다. 말없이 조용히 흐르는 세월을 토막 내어 헤아리고 싶지는 않다. 까마득한 옛날얘기―. 반세기 전에 흘러간 물을 끌어다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란 생각을 하며 혼자 미소 짓는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길에 동해남부선 철길을 달리는 두 간 짜리 동차 옆자리에서 볼살이 통통한 단발머리 소녀를 만났다. 세일러복의 여중 3학년인 그녀는 동해안 K 읍의 초등학교 교사인 오빠 집에 놀러 간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고 혼자서 자취하며 산다고. 친구들 얘기, 학교생활 등 여러 이야기를 자연스레 주고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흡사 조카가 삼촌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종착역이 가까워져도 얘기는 끝날 줄 몰랐다. 헤어지기 전에 혹, 물어볼 일이 있으면 편지를 해도 좋다면서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아직도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혼자서 자취생활을 하다니! 애처로운 마음을 쓰다듬으며 답장했으나 그 편지는 나에게도 활력소로 작용했다. 이듬해 내가 입대했을 때는 ‘위문 편지’를 보내왔고, 2년이 넘도록 이야기는 그윽하게 왕래했다. 첫 휴가를 받았을 때는 부모님을 뵙기 전에 그녀의 자취방을 먼저 찾았고, 밤 11시 군용열차가 오기까지 나란히 낙동강 변을 산책했다. 어떨 때는 편지지 17매에 깨알 같은 글을 써 보냈으나 어떤 사연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어느 편지에는 노천명의 시 ‘오월의 노래’도 한 구절 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전설을 찾아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불로초 같은 오후(오시)의 생각을 오늘도 달린다. 부르다 목은 쉬어 산에 메아리만 하는 이름…” 그때쯤 우리의 편지지는 아마 분홍색으로 조금씩 물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고등학생이 된 그녀는 체육 시간에 평균대 위에서 실족해 다리를 다치고 코끼리 다리처럼 부푼 상처를 안고 달포 동안 병상에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야 그 소식을 보내왔다. 나는 그때 영천 부관학교에서 행정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병문안을 할 수도 없었다. 대학입시를 준비한다는 그녀는 어느 날 단짝 친구로부터 그런 사귐(군인과의)은 찬성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아듀ㅡ’ 라고 적은 마지막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받는 것이 슬프기도 한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는 군복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는 자기에게 쓰는 편지였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기까지 오늘의 반성, 내일의 꿈, 독후감 등으로 일기 쓰기는 1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것 같다. 결혼을 앞두고는 총각 때 쓰던 일기장은 모두 태워버리라는 인생 선배의 말을 따라 내 분신 같은 일기장과 편지들을 모두 정리했다. 첫 직장에서는 2 백자 원고지로 글을 썼다. 문화부 기자가 쓰는 기사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한 번씩 ‘편지’ 잘 읽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지만 어떤 기사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편지쓰기 12년이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한 우물을 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일은 인생의 한 우물이었다. 신학교 시절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썼던 편지와 받은 답장은 아직도 내 가슴높이의 목회자료 함 아래 칸에 세 뭉치나 누런 종이봉투에 쌓여있다. 가족에게 쓰는 편지는 더욱 즐거웠다.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23년 동안 교회 앞에서 편지를 썼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 전하는 것이지만 목회자의 자리에서 보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아마 성도들에게 전하는 편지만큼 정성으로 쓴 편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66권이나 되는 긴 편지를 썼다. 그것은 하나뿐인 아들의 피로 쓴 사랑의 고백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목회에서 은퇴하고 보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교회를 섬길 때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봉사 하던 사람들이 한 세대가 지난 세월에도 ‘처음 사랑’을 변치 않는 성도들이 있었다. 그 은혜와 사랑을 기리기 위해 나는 ‘사랑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차례씩, 보통 A4 용지 한 장 내외를 썼으나 분량은 제한이 없이 긴 얘기를 쓰기도 했다. 신학교 때 절친한 친구들까지 포함하여 50여 통,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엮으며 수작업을 했다. 내가 쓴 편지를 출력하고, 아내와 함께 주소를 오려 붙이고, 우체국에 가는 일까지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쩌다가 답장을 보내오는 분도 있었고, 어떤 이는 털실로 뜬 장갑을 ‘답신’으로 보내왔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잊지 않고 꼭 전화로 인사를 전해오는 장로님도 있었다. 은혜를 갚으려는 일이 오히려 은혜를 입었다.
사랑의 편지를 쓰고 10년이 되는 연말 나는 마지막 편지를 띄웠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던 수신자들 가운데 두 분이 하늘나라로 떠나가시자 ‘내가 편지를 너무 오래 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지를 끝내기 얼마 전에는 사랑의 편지 로고와 우리 집 주소를 인쇄한 봉투 1,000장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붙박이장 맨 위 칸에 올려놓았던 종이 상자를 내려보니 누렇게 곰팡이가 핀 편지 봉투 네 묶음(400장)이 아직 남아있었다. 세월의 흔적처럼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쌓인 편지는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ㅡ 『주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 ‘사랑의 편지’ 10년(신국판, 268쪽) ㅡ ‘책 머리’에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서문을 붙였다. “사랑하며 기도하며 편지를 써왔다. 그 고마움, 끊어지지 않는 사랑에 감사의 인사를 계속하다 보니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쓰기는 기다려지는 즐거움이었다. 언젠가는 어떤 일 때문에 몇 달 동안 편지를 쉬고 있었다. 이때 한 권사님의 아들이 내 안부를 물으며 ‘병석에 계신 어머니가 목사님의 편지를 몹시 기다립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말이 ‘알람’처럼 들려 잠을 깨듯 그동안 쉬었던 편지쓰기를 다시 이어갔다.……” 책으로 묶은 편지는 사랑하는 수신자들과 가까운 분들에게 한 권씩 나누었다. 10년 동안의 사랑의 편지를 마무리했으나 나의 편지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소설을 쓰며 산다. 소설은 독자에게 보내는 내 정성 들인 편지이다.(2025년 <수필과 비평>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