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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관점이 우선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적 수단으로 인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자신의 재산 일부를 기꺼이 투자하기도 한다. 투자를 통해 얻는 수익이 더 커지면, 어느 사이 자신의 본업에 소홀해지거나 심지어는 직정을 그만두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투자의 액수가 늘어나고 단기간의 수익을 추구하다 보면, 그것은 단순 투자를 넘어 투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이란 일시적으로 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목표가 채워지면 더 큰 목표를 설정하여 그 욕망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투기’에 집착하는 이들은 한번쯤 ‘투자’로 인한 재미를 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투자를 통해 수익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그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언제부턴가 여유 자본을 그냥 가지고 있기보다 투자하여 이익을 창출해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언론을 중심으로 요란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 ‘영혼까지 끌여들인다’는 이른바 ‘영끌’이라는 단어까지 회자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이해된다. 언론에서 유도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금방이라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사람들의 사례가 마구 쏟아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기사거리를 만드는 언론의 폐혜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진다.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세상에서는 누군가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면에 그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진리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의 사례보다 성공한 이들의 경험에 공감하기 마련이다.
‘투자에서 투기까지, 대중투자사회의 역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역사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투자와 투기 행태의 다양한 면모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투자와 투기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는 자본의 역할이 강화되던 20세기 주식시장의 흐름과 다양한 투자 기법들에 대한 흐름을 개관하면서, 투자에 대한 어떤 이론도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제출하고 있다. 여기에 황무지나 다름없던 1920년대 이국의 플로리다에서 시작된 부동산 개발 붐과 과열 투기의 문제를 짚어보고, 일제 강점기 하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적으로 진행되었던 토지 소유의 확대 과정을 진단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을 살피는 연구도 수록되어 있다.
한 논문의 주석에서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투자는 단순히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는 일’이며, ‘투기는 기회를 틈타 (투자보다 크게) 큰 이익을 보려고 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실상 ‘투자’와 ‘투기’는 모두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경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만 제공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른바 ‘영끌’을 해서라도,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는 일’ 곧 투기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 시작된 한국에서의 부동산 투기와 이른바 ‘개미군단’으로 표현되는 증시에 대한 관심을 다룬 글들이, 2부의 ‘투자의 대중화와 저변화’라는 항목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의 활황과 몰락을 보여주는 ‘버블기 일본에서 나타난 투기와 투자의 특징과 그 의미’를 짚어보는 글이 첨부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는 자본을 투자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확장하는, 투자 권하는 사회’라는 제목의 3부를 통해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의 욕망과 이에 편승한 자본 권력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홍콩 문제’라 칭해지는 홍콩의 부동산 재벌들의 이익에 맞춰 정책이 이뤄지는 현상, 사람들의 자가 소유의 욕망에 기대어 경제적 기득권자 위주로 주택 정택을 펼치는 영국의 사례, 그리고 알리바바로 상징되는 ‘중국의 핀테크 기업과 국가’의 관계가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흔히 ‘수익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일컬어 ‘파이를 키운다’는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 그 이익의 대부분은 경제적 권력을 지닌 자본가에게 돌아간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경제의 규모는 커졌겠지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일반인들은 ‘투자’와 ‘투기’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때로는 작은 이익에 열광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일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욕망에 편승하여 적당히 자극적인 흐름을 주도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도 사회의 양극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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