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시 2편>
음압병동 5
공포가 가득 차서 들리지 않는
귀
구원의 기도문조차 볼 수 없는
눈
누가 무엇으로 붙여 놓았는지 떨어지지 않는
입이 있을 뿐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풍경도 떠오르지 않는
빨래처럼 뭉쳐져 그리움도 닿지 않는
별의 부스러기도 뜨지 않는
십자가도 없는
엄마도 없는
지구의 변방
끝에. . .
음압병동 6
오늘은
밀쳐놓은 수 만개의 미안과 용서를 꺼내 본다
마주한 미안함이 너무 많아서
고개를 쳐들 수도
숙일 수도 없다
용서하지 못한 오만과 편견이
하얀 병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쿡 쿡 화살촉으로 날아든다
미안과 용서에 가 닿을 수 없는 눈물이
겨울 숲 나목 같은 육신을 적신다
함께 붉었던 산과 호수도 울어 주던 날
-더 이상 毒杯의 잔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것이 설령 나의 마지막 독백이어도
이제
괞찮겠다
<근작시 3편>
음압병동 1
새야
너는 날면서 꿈을 꾸고
나는 걸으면서 꿈을 꾸지
그러나 우린
횡단보도 아이처럼 위험해
햇빛 뒤꿈치도 볼 수 없는데
하늘 귀퉁이가 머리위로 뚝뚝 떨어지고
내 뼈와 너의 날개는
지독한 제프티*에 모두 녹아내리지
해 지는 쪽으로 몸이 자꾸 기울어져
밤 지나고 아침이 오면
이름 없는 무엇이 되어
뒤바뀐 영혼과 마주칠까 두려워
그리고 누군가 내게
새 옷을 입히고
꽁꽁 묶어 버리면 어쩌지
사람들이 꽃을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그에게 그 사람에게
그 그 그그
그 그그그그 그 그그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이 수북한데
*코로나 치료제
음압병동 3
맨발로 왔어
뜨거운 맨발로
청춘도 아닌데 나는 지금
맨발이야
들것에 실려 와서
신발이 없어
집에 가야하는데
새로 산 가디건은 입어보지 못했고
새로 산 신발도 박스에 그대로인데
신을 것이 없네
돌아 갈 발이 없네
없네 없네
없는 것은 수북하고
불안과 공포는 빽빽하네
다시 사람이고 싶은
신발을 신고 싶은
비틀즈의 노란 잠수함을 다시 보고 싶은
내 곁엔 지금
아무도 없네
없어서
없어서
나 혼자
우두컨 하네
음압병동 4
말이 하고 싶다
사람의 말이 듣고 싶다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에서
나는 살고 있다
얼굴 없는 긴 꼬리달린 외계인과
하루 한 번 접속 한다
오늘은 외계인이 가져다준 무엇을 먹었다
그들이 주는 먹이를 저녁에도
내일도 먹을 것 같다
내 몸에 닿은 것들은 모두 태워져
돌아 갈 것 하나 없는
살아 있는 것 하나 없는
천길 벼랑 끝에 매달린 방에서
햇빛 뒤꿈치도 볼 수 없는 방에서
십자가도 없는 방에서
나는 산다
움직이는 것 하나 없는 괴괴한 방에서
이채민 시인 약력
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 서울과학기술대,대학원
시집 『빛의 뿌리』 『까마득한 연인들』 『동백을 뒤적이다』 외 2권
미네르바문학상. 서정주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현,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 한국시인 주간
-------------------------------------------------------------------------------------------------------------------------------------------
<작품론>
두려움에서 배우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몇 년 전 꽤 오랜 시간 동안 전지구적인 재앙을 경험한 바 있다. 코비드19 팬데믹이 그것이다. 이 팬데믹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많은 만남은 유예되거나 취소되고 오직 온라인을 통한 만남만이 안전한 것으로 허락되었다. 모두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거나 비대면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면서 우리는 모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풍부한 표정을 잃고 숨어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적지 않다.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삶이 그간 얼마나 많은 허상에 집착해 허망한 번영을 구가하고 살아왔는가에 대해 일깨우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 재앙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고 또한 가르침이기도 했다.
이채민 시인의 「음압병동」 연작은 팬데믹 시기 그 위험의 극단까지 간 특별한 경험 속에서 하게 된 생각과 느낌을 전해준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간 그 특별한 상황에서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 과연 어떠했을까? 시인은 그것을 절실한 심정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햇빛 뒤꿈치도 볼 수 없는데
하늘 귀퉁이가 머리위로 뚝뚝 떨어지고
내 뼈와 너의 날개는
지독한 제프티에 모두 녹아내리지
해 지는 쪽으로 몸이 자꾸 기울어져
밤 지나고 아침이 오면
이름 없는 무엇이 되어
뒤바뀐 영혼과 마주칠까 두려워
그리고 누군가 내게
새 옷을 입히고
꽁꽁 묶어 버리면 어쩌지
사람들이 꽃을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그에게 그 사람에게
그 그 그그
그 그그그그 그 그그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이 수북한데
- 「음압병동 1」 부분
시인이 음압병실에 들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시인이 죽음을 왜 두려워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냥 생명이 다한다는 공포감이나 죽음으로 다다르게 되는 육체적 고통 때문에 두려운 것만은 아니다. 죽어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해 그래서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을 시인은 두려워한다. 자신은 “이름 없는 무엇” “뒤바뀐 영혼”이 되어 생전의 관계들을 상실하고 전혀 몰랐던 사람이 자신에게 “새 옷을 입히고/꽁꽁 묶어 버리”게 되는 그런 새로운 인간관계가 더욱 두렵게 만들고 있다. 또한, 그 두려움을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은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그 그그그그 그 그그 그들”이라고 다급하게 말을 더듬으며 말해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나와 관계 맺었던 사람들이 나를 떠난다는 것이고 그들과 나누어야 할 말을 더는 하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시인이 음압병실에서 마주친 최초의 공포이다.
말이 하고 싶다
사람의 말이 듣고 싶다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에서
나는 살고 있다
- 「음압병동 4」 부분
이 시에서도 두려움은 말과 관련된다. 말을 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나는 살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주고받는 말이 없는 삶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음압병실은 나의 모든 것이 차단된 곳이다. 나의 말은 물론 나의 숨결 나의 냄새 나아가서는 나의 감각까지도 모두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이다. 나의 무엇도 다른 사람에게 가 닿지 못하는 공간에 유폐되어 있다. 그런 곳에 갇힌 내가 과연 살아 있는 존재인가 시인은 자문하고 있다.
오늘은
밀쳐놓은 수 만개의 미안과 용서를 꺼내 본다
마주한 미안함이 너무 많아서
고개를 쳐들 수도
숙일 수도 없다
용서하지 못한 오만과 편견이
하얀 병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쿡 쿡 화살촉으로 날아든다
- 「음압병동 6」 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안과 용서”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 두 가지를 통해 사람은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소통은 불가능하고 관계는 끊어진다. 절교는 서로 미안함도 용서할 마음도 없을 때 이루어진다. 시인은 음압병실에 갇혀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하지 못한 용서를 생각한다. 미안함과 용서를 통해 사람들과 함께했어야 했던 소통이 너무도 그립기 때문이다. 코비드19로 음압병실에 갇혀 그것이 금지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코비드19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깨우침은 소통이 아닌가 한다. 팬데믹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아 소통의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그간 미루거나 하지 못했던 만남과 주고받지 못했던 소통의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리고 그것을 더는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인가를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 셈이다.
새로 산 가디건은 입어보지 못했고
새로 산 신발도 박스에 그대로인데
신을 것이 없네
돌아갈 발이 없네
없네 없네
없는 것은 수북하고
불안과 공포는 빽빽하네
...(중략)...
없어서
없어서
나 혼자
우두컨 하네
- 「음압병동 3」 부분
이 시에서 공포는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없다는 것은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 결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시인에게는 신발도 없고 옷도 없다. 사실은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없다. 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제로 결핍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인에게 그것을 채울 욕망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욕망과 그 욕망의 결핍을 메울 대상 사이는 너무 멀리 있다. 이렇게 욕망의 빈자리가 너무 큰 존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의미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없는 것이 수북할수록 “불안과 공포는 빽빽해”진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채워야 할 욕망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 음압병실에 들어와 있는 시인은 사물의 부재로 인한 결핍과 그로 인한 욕망을 크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불필요함으로 나의 욕망마저 부정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 욕망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 시인은 “돌아갈 발이 없”는 공포에 휩싸인다. 신발이 없는 발은 없는 발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사물로 나를 확인한다. 그것들이 나의 욕망을 채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지금 우리의 문명은 이 욕망의 확대를 통해 발전해 왔다. 더 많이 욕망하게 하고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든다. 코로나19가 실험실에서 시작했든 동물에서 전파된 것이든 그것은 이러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확대와 관련된다. 팬더믹은 결국 과도한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다. 이 시에서의 공포도 이와 같다. 내가 사라질 지경에 놓여있을 때 비로소 시인은 그 공포의 근원을 경험한다.
공포가 가득 차서 들리지 않는
귀
구원의 기도문조차 볼 수 없는
눈
누가 무엇으로 붙여 놓았는지 떨어지지 않는
입이 있을 뿐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풍경도 떠오르지 않는
빨래처럼 뭉쳐져 그리움도 닿지 않는
별의 부스러기도 뜨지 않는
십자가도 없는
엄마도 없는
지구의 변방
끝에 . . . .
- 「음압병동 5」 전문
감각이 없는 신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각을 통해 나는 나와 세계와의 접점을 만든다. 그 접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나의 정체성도 세상의 모습도 확인할 수 없다. 시인은 그것을 “빨래처럼 뭉쳐져 그리움도 닿지 않는”이라고 아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감각이 불필요한 상황에서도 감각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고투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도 없는 // 엄마도 없는” 그런 곳이다. 희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는 바로 그런 곳이라는 말이다.
시인에게 가장 큰 공포는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각이 사라질 때 언어도 소통도 나의 육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매몰되고 사라진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인은 음압병실의 공포 속에서도 사라져 가는 감각의 끝을 놓지 않으려 “지구의 변방 //끝”까지 애쓰고 있다. 이렇듯 이채민 시인은 시인이 시를 써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시인은 공포에서 배우지만 공포에 지지 않는다.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약력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이 있다.
|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