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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으로 기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편63:1.4)
[성경말씀] 출애굽기 15:22~23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설교말씀]
마라는 목적지가 아니다
서론 — 홍해를 건넌 지 사흘 만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방금 전에 홍해를 건넜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넜습니다.
뒤따르던 애굽 군대는 물에 잠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미리암은 소고를 들었습니다.
여인들은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예배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이어서 기록합니다.
홍해를 건넌 후 사흘이 지났습니다.
사흘 동안 광야를 걸었는데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목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도 힘들었겠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엄마, 물.”
“조금만 참아.”
“아빠, 목말라.”
그런데 아버지 손에도 물이 없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저 멀리 물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사람들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뱉어버렸습니다.
물이 너무 썼습니다.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 마라, מָרָה(Marah)는 ‘쓰다, 쓰라리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불과 사흘 뒤에 쓴 물을 만났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감사했는데 오늘은 눈물이 납니다.
어제는 응답받았는데 오늘은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좀 살겠다.”
했는데 또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또 이런 일이 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1. 은혜를 경험한 사람도 마라를 만난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라에 도착한 사람들은 불신앙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라를 만났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마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도 수없이 마라를 만났습니다.
요셉은 꿈을 받았지만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쫓겼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이 떨어지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 다음 날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했지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배에 계셨는데도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폭풍이 왔다고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마라를 만났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제일 먼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것인가?”
물론 우리의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난은 때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라를 만났다고 해서 스스로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
그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실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를 만났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광야에 나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라에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마라를 만났다고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쓴 물이 있습니다.
몸 때문에 마음이 쓸 때가 있습니다.
가족 문제 때문에 마음이 쓰릴 때가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가슴을 찌르기도 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칭찬 열 번 들은 것은 금방 잊는데, 서운한 말 한마디는 십 년도 기억합니다.
아마 우리 뇌에는 ‘칭찬 저장 용량’보다 ‘섭섭함 저장 용량’이 훨씬 큰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20년 전 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이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그 사람은 정작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마라입니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쓴 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물맛이 쓰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쓴 것은 아닙니다.
마라는 인생의 한 지점이지, 인생 전체의 이름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은 마라 한복판에서 쓴 물을 바꾸신다
2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백성들은 원망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이해는 됩니다.
사흘 동안 물을 못 마셨습니다.
겨우 물을 찾았는데 써서 못 마십니다.
그러니 불평이 나올 만합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모세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같은 상황입니다.
백성은 원망했고 모세는 부르짖었습니다.
지난주 우리가 한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원통함이 사람을 향하면 원망이 되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가 됩니다.
마라도 똑같습니다.
쓴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사람에게 쏟아내거나 하나님께 가지고 가거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물은 못 먹겠다. 다른 데 가자.”
하나님은 다른 물을 찾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 물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꾸 환경을 바꿔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 좀 바꿔주세요.”
“이 상황 좀 없애주세요.”
“이 문제 좀 해결해주세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환경도 바꾸십니다.
문도 열어주십니다.
병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관계도 회복시키십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바꾸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예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일을 견디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났는데 어느 날부터 마음이 편해집니다.
문제는 아직 그대로 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옵니다.
상황이 해결된 것도 아닌데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경은 먼저 문제를 없애주시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말씀합니다.
문제 한가운데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상황 한가운데서 마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나무를 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의 빛 아래에서 묵상하면 아주 아름다운 연결이 있습니다.
십자가 역시 쓰디쓴 자리였습니다.
배신이 있었습니다.
채찍이 있었습니다.
조롱이 있었습니다.
못 박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던 처절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장 쓰디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 한복판에 들어오시면 고난이 고난이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아픈 것은 여전히 아픕니다.
눈물 날 일은 여전히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더 이상 나를 삼키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고난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다릅니다.
“망하지 아니한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고난 인생에 들어오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마라가 더 이상 마라 아닌 것으로 변했습니다.
이제는 견딜만 하게 되었고 마실만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바뀌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 쓴 물을 없애주세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이 쓴 물 앞에서 제가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는 대단히 깊은 기도입니다.
3. 마라는 목적지가 아니다
이제 오늘 말씀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성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달게 된 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절을 더 기록합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렀다.
엘림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물 샘 열둘. 종려나무 칠십 주.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늘이 있었습니다.
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 서 있을 때는 엘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쓴 물 앞에서는 앞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길을 조금 더 걸어가니 엘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알 수 없는 내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오늘까지만 보지만 하나님은 내일까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우리가 퍼즐 한 조각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완성된 그림을 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무엇입니까.
다 이해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믿고 한 걸음 더 걷는 것이 신앙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은 골짜기가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골짜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다닐지라도.”
골짜기는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곳입니다.
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라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엘림으로 가는 길에 잠시 만난 장소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인생 전체를 결론내리려고 합니다.
“이제 끝이야.”
“앞으로 좋은 일은 없을 거야.”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도 여러분.
한 책을 읽다가 50페이지에서 슬픈 일이 나왔다고 그 책의 결말이 슬프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이 넘어졌다고 그 영화가 비극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봐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마지막 장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힘들다고 인생을 결론짓지 마십시오.
오늘 눈물이 난다고 내일도 눈물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쓴 물을 마주했다고 내 삶 전체에 쓴 물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엘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엘림을 단순히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잘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엘림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회복이 엘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관계의 회복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이전에는 없던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엘림일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엘림일 수도 있습니다.
잊고 살았던 웃음을 되찾는 것이 엘림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엘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엘림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결과를 정해놓고 요구하기보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께서 준비하신 나의 엘림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그곳까지 믿음으로 걷게 해주십시오.”
(예화)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물은 떨어지고 목은 말랐습니다.
거의 포기하려 할 때 오래된 펌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옆에 작은 물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종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지 말고 펌프에 부으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물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갈등했습니다.
지금 이 물을 마시면 당장은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펌프에 부었다가 물이 안 나오면 마지막 물까지 없어집니다.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작은 병의 물을 펌프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펌프질을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계속 펌프질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땅속에서 시원한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는 실컷 마셨습니다.
그리고 빈 물병을 다시 채운 뒤 종이에 한 줄을 더 썼습니다.
“정말입니다. 끝까지 펌프질하십시오.”
신앙이 때때로 그렇습니다.
한두 번 기도했다고 모든 것이 금방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걸었다고 바로 엘림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신다면 우리는 한 걸음 더 갈 수 있습니다.
결론 — 여기서 인생을 결론짓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마라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마라는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마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니 엘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언제까지 가야 할까.”
“앞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
그 질문을 품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라에서 인생을 결론짓지 말아라.
오늘 물맛이 쓰다고 해서 너의 삶 전체가 쓴 것이 아니다.
오늘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엘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엘림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우리의 이야기를 다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라를 만났을 때 원망보다 기도를 선택하십시오.
쓴 물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더 걸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내일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 손을 붙들고 한 걸음 더 걷는 것입니다.
그 한 걸음 끝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엘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마라는 목적지가 아니다.”
마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마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쓴 물 앞에 서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직 우리 이야기를 다 쓰지 않으셨습니다.
마라 다음에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엘림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도 한 걸음 더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길에서 때때로 마라의 쓴 물을 만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너지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픔과 기다림 앞에서 낙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마라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쓴 일을 만날 때 원망보다 기도를 선택하게 하시고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환경이 당장 바뀌지 않아도 우리 마음을 지켜주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을 견딜 힘을 주옵소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엘림이 있음을 믿게 하시며 오늘 하루 한 걸음 더 걸어갈 믿음을 주옵소서.
몸이 지친 이들에게 새 힘을 주시고, 마음이 무너진 이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옵소서.
우리의 마지막 장을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라에서 인생을 결론짓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며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