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2일 일요일 오후
목포시 달동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지
고하도는 임진왜란때 이충무공에 의해 전략지로 활용되어 왜적의 침투를 막아낸 곳으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기념비(지방유형문화재 39호)가 서 있다.
이충무공 기념비가 있는 고하도 소나무밭
목포팔경 중 '고도설송'이란 말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늘름한 소나무들
마치 이순신 장군과 그의 부하 장수들 같이 기개가 드높다.
군졸들이 곳곳에서 민초들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소나무밭
고하도 섬의 둘레는 불과 12km에 지나지 않지만 이 섬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주는 것은
이곳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왜구에게 내어주는 샘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유달산과 함께 충무공의 전설적 일화와 호국 얼이 서린 섬이며
울돌목과 제주도로 빠지는 해로이기도 한 이 곳은 고화도, 보화도, 비노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충무공은 명량승첩 후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1597년 10월 29일 이곳에 와 진을 치고
그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107일간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비석은 1722년 통제사 오중주에 의해 세워졌고
모충각은 충무공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1949년에 완공되었다.
비문에는 정유재란 때 이충무공이 전진기지로 고하도를 선정하게 된 경위와
전쟁 시 군량미의 중요성, 인조 25년(1647년)에 진영이 당곶진(지금의 하당 일대)으로 옮겨가게 되어
고하도진이 폐진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중주 통제사가 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후임 통제사들에게 고하도진터임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가 썼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던 것을
광복이 되면서 현 위치에 세웠다.
여러 문장가들의 편액은 아마도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대한 찬양의 글들 이리라.
조경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고
모충문을 통해 모충각 안으로 들어온다.
밖에서 본 모충문
모충문 저 아래로 홍살문이 보인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가 났을 때 나라에서 내리는 홍살문
이순신 장군의 호국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충분하며
후손들과 목포시에 의해 잘 관리되어 병든 소나무 하나 없는
이 유적지가 앞으로도 잘 보전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목포시에서는 이충무공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매해 4월 28일이면
이곳에서 공의 정신을 추모하는 탄신제를 봉행하고 있다고 하니
기억해두었다가 올 수 있으면 와 보아야겠다.
첫댓글 그냥 보통은 둘러보고 끝인데
이렇듯 말과 글과 사진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풀어내니
읽기도 펀하고 감동도 받아
댓글을 쓰지 않고는
미안하게 만드는 능력까지 겸비한
선생님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하여
소감 올려봅니다.
충무공 말씀중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지 못하고 수로를 내주었다면 조선은 없다.
제가 저작권을 도용해 봅니다.
약무전교조 시무교욱(若無 全敎組 是無 敎育)
전교조가 없었다면 참교욱은 없다.
교황의 10계명중 9번이 마음에 와 닿는다고 개념가수 '이효리'가 말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을 만나셨지요.
혹시 제가 쌤께 교회 다니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요?
교회다니니 좋은점이 많더라는 얘기한 기억은 있지만...
혹시라도 그랬었다면 용서하소서~~~^^
저작권 도용은 아주 훌륭하십니다.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니
장군께서도 흐뭇해하실 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