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선교사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민로아(閔老雅)라는 한국 이름으로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두 번째, 휴 밀러(Hugh Miller)선교사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민휴(閔休)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세 번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 선교사는 190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밀의두(密義斗)라는 한국 이름으로 경신학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서교동교회 등에서 교역자로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한 선교사이다. 이밖에 한국에서 활동한 밀러 선교사는 더 있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Anna R. Miller)" 선교사를 제1묘역 사-16 위치에 안장하였다. 안나 밀러는 1892년 11월 15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1903년 6월 17일 3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밀러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Miller, Fred S., 18980∼1899)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사-17에 위치). 또한 그들의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Miller, Frank, 1902∼1902)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사-18)에 묻혔다.
양화진 제2묘역에는 가문이 다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ughes, 密義斗)의 가족(나-8에 위치)도 안장되어 있으며 이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별도로 기술할 예정이다.
◇ 충북지방 최초 선교사 밀러(Miller, 閔老雅,1866-1937)
프레드릭 S.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 閔老雅 1866-1937)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1866년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1889)과 유니언 신학교(1892)를 졸업하였다. 그는 1892년 11월 15일 부인(Anna Reineck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安昌浩)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Doty, Susan A.)와 재혼하였다.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Dean M. Lillian)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로는 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한 청주 신대교회, 청원 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 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 등이 있다. 그는 1936년 정년 은퇴후 필리핀 중국을 여행하고 청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37년 별세하였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2-27 (95 호)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