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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정감과 시 심리의 변주(變奏)
- 유혜목 시인, 일상적인 맑은 영혼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문입협회 고문)
1. 자아의 차별성과 관조적 담론
모름지기 책(冊)의 그늘은 넓고 깊어 피폐한 영혼도 정화할뿐더러 감동의 회복과 미적 주권을 확립시키는 내적 충만의 그 적합성은 못내 경이롭다. 까닭에 결단력 있게 도치법을 구사(構思)하며 시집 『노래하라 아름다움을』(창조문예사, 2024) 출간하는 전북출생의 유혜목 시인은 1984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서정주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한편 나사렛대학교 교수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제33대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제29회 기독교문학상 수상경력과 시집『눈을 감으면 바깥보다 눈부시다』를 포함해 다수의 논저가 있으며, 한국 평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적 질료보다 깊숙이 내면의식에 수용해 아직 외연(外延)에 표출되지 않은 직물 대상에 관해 시 세계를 펼쳐낸 따뜻한 감성과 경건한 종교시인”으로 비중 있게 논의되는 눈부신 존재감의 실체다.
각론하고 화자(話者)가 자서격(自序格)인 |시인의 말|에서 “기독교인으로 사십여 년간 살아오는 동안에 저자 또한 삶의 길을 물어가며 생활하고 시를 썼다. 그렇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떠올리면서 시를 쓰곤 했다. 그 이유는 비유를 즐겨 사용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 대자연의 무수한 소재들이 등장하고 있어서였다.”라는 시적 변명은 못내 비장감이 묻어있다. 일단 시집의 편집 구도는 “|시인의 말|에 이어 1부_물에서 떠오르기(28편), 2부_꿈조차 숨조차(22편), 3부_푸른 성전(22편), 4부_잠깐인 나(24편), 5부_노래하라 아름다움을(6편), 시해설”의 일면에서 102편의 시편이 결(結) 고운 옷감으로 직조(織造)되어 다채롭다.
모처럼 시 창작의 주체는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시인이지만 폭넓은 시각에서 독자 또한 시인에 견주어질 것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시편에서 ‘비판적, 즉물적, 전체적, 정의(情意)와 지성의 종합, 유물적, 구성적, 객관적 특성’을 지니고 주의 집중할 것이나 비정한 시장 논리가 지배적인 후기산업사회에서 다양성을 수용해야 할 일이다. 특히 삶의 일상에서 부대끼는 사물을 여과하여 엄밀히 구성된 새로움을 표출할 일이기에 그간의 낡고 고루한 시각은 접어두고 새로운 변주(變奏)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그 같은 맥락에서 그 자신의 시 인식은 담백한 품격을 지닐뿐더러 맑은 영혼의 울림이기에 대다수 충직한 독자라면 응당 미국 문학의 혁명적인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무덤 위 풀은 아름답게 자란 머리카락인 듯하다.”라는 <풀잎>처럼 여린 듯 강한 생명력의 결속을 응당 꾀할 일이다.
그렇다. 비록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비정한 시간대에서 병폐성을 치유하는 역동성은 「1부 물에서 떠오르기」에 수록된 몇 편의 시편 중에서 ‘봄꽃 피는 그 힘으로 발바닥에 진홍 피가 도는’ 그 같은 현상에서도, “꽃 폭풍 일구우며/너희들처럼 그렇게/그렇게 불타듯 한번/살아보는 거다(꽃 폭풍)”에서 새삼 확증되듯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금속적이거나 동물적인 언어를 배제하고 푸른 식물성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감정의 절제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까닭에 “올이 풀린 채로/줄줄 흘러내리는 삶(기쁨 그리고 감사)”을 통해 놀랍게도 확증되듯 이 지상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하늘의 언어가 감사임’에 ‘기쁨 살아 움직임의 가만한 감사’야말로 창조주의 절대적 은총이다.
이같이 삶의 격랑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떠받들며 체득한 삶의 잠언(箴言)인 시 쓰기에 전념하는 따듯한 감성의 유혜목 시인은 ‘비정한 문화충돌의 정보화 세기에서도 ‘진정한 예언자 그리고 담백한 시격(詩格)의 소유자’이다. 비록 ‘꽃은 비에 젖어도 향기는 비에 젖지 아니하듯 나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늘 버리고 내려오신 그 슬픔만 할까요?’라는 물음 앞에서 그 자신이 십자가상의 주님을 응시하는 두 눈은 온통 눈물에 젖어 “나무 위에 달리신/그 아픔만 할까요//나 혼자선 감당 못 할/저 슬픔과 아픔(내미신 그 어깨)”이야말로 회한 뒤의 통곡이며 무릎 꿇는 낮아짐이다.
차제에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잠든 내면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그 나름의 시적 변명에서 끊임없는 자기성찰에 비장감이 묻어남도 그렇거니와 조락(凋落)의 계절에 나뭇잎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젖어 드는 소스라치는 기쁨이기’에 “되새기는 것만으로도/섬뜩한 전율이/온몸을 태워줍니다(그 말씀)”의 일면처럼 그 생명의 말씀(logos)은 신비한 은총이다. 또 한편 비교적 반복법 수사를 보여주는 시편 <수직에의 그리움>도 그렇거니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의 ‘촛불의 상징성’에 견주어 불꽃이라는 대상을 하나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세계이기에, 그 자신이 불꽃의 운명에 대해 명상하는 몽상가는 아닐지라도 ‘어둡다 어둡다 한탄하기에 앞서 내가 빛 되어서 어둠 쫓을 길’도 “너의 불꽃 한 송이 피어나면서/방 안이 그 빛으로 생기 얻는다(촛불을 바라보며)”에 분별력을 지니고 응시하는 작위(作爲)는 더없이 유의미하다.
무엇보다 그 자신의 개별성을 통해 수시로 확인되듯 비록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에서 따뜻한 정감에 저토록 그리움이 묻어나는 아득한 정신풍경화는 또 하나의 정겨움으로 독자의 눈망울을 붉혀낼 것이다. 이처럼 침상(寢牀)에서 ‘눈뜨는 아침마다 당신을 생각하며’ 창조주께 드려지는 기도는 ‘살아 숨 쉬는 작은 일이 감사이기’를 소망하는 연유로 “오늘의 이 하루도/당신의 사람 되어//기쁨과 평안함이/흘러가게 하옵소서(눈 뜨는 아침마다)”라는 그 간절함도 못내 느꺼울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이 ‘인향만리(人香萬里)’를 상기시키듯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일깨워줄 지극한 관심사(關心事)는 “이리 큰 행복감을 포식해도 될까//오늘/탐스러운 목화밭 속에서/사람 향기로 몸을 씻었다(사람의 향기)”라는 맞물림이다.
2. 맑은 영성(靈性)과 감성적 충동
보편적으로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미국의 생태주의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역설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먼저 무너트려야 한다.’라는 관점에서, 차고 처연(悽然)하되 담백한 시적 이미지는 고통을 눈 뜨게 하고 또 빛나는 응결체로 작동한다. 서정성이 수용된 그 자신의 시편은 현대의 불안의식과 감각적 표현 등에 삶의 중량감이 눈부신 목가적 서정성과 맞물려 있다. 또 하나 그 자신의 다양한 시적 질료로 사용된 오브제(object)는 통제를 거부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시적 분위기를 지탱하기에, 주어지는 막연한 의구심은 행간의 틈새를 좁혀 거리감 없는 전의식(前意識)이 해체되는 놀라움으로 또 하나의 신선한 충동인 탓에 탯줄이 살아 숨 쉬고 유년의 아득한 정신풍경이 자리한 만경의 달콤한 젖줄인 “내 고향 조촌면 감수리에는/언제라도 나를 일곱 살이 되게 하는/태반이 살아 숨 쉬고 있다(내 고향)”라는 그 향수(鄕愁)는 못내 느꺼움을 안겨줄 따름이다.
특히 다소 호흡이 단조롭고 시 의미가 응축(凝縮)된 ‘사랑은 누룩이고 불꽃이라’라는 시편 <사랑은>이나 또 인용하는 <동터 오름>은 호흡을 가다듬고 식별할 바다.
사랑은/내가 없어져/그가 되는/신비이어라//
아픔의 눈물이/술 되어 익고/타오르던 살에/진주가 남는//
-<사랑은>에서
철없던 이 마음을/속절없이 덮었네//
몸은 서산에 이우는데/웬일인가 내 마음 저편//
주홍빛 소망이/동터 오름은//
-<동터 오름>에서
차제에 ‘무게가 다를 거야 살빛도 다를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音調)로 읊어낸 “꽃 같은 하루해가/오늘도 피었다 진다//내일도 같은 자리에/같은 해가 피고 질까//아니야 아니야(피고 지는 해)”의 보기나 일단 향일성(向日性)의 사전적 의미는 ‘식물의 줄기나 잎 따위가 햇볕이 강한 쪽을 향하여 자라는 성질’을 뜻하나 ‘길을 걷고 누워도 내 마음 굽이굽이 당신을 향합니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그 집념이랄까? 일체감 뒤의 “잠을 자고 깨어도 제 눈을 덮어오는 건/해와 같은 그 눈빛(나의 향일성)”은 그 자신의 ‘느낌, 육성, 체취’에 영원 자존자(自存者)인 엘로힘(Elohim)을 지향한 믿음의 확신이기에 못내 경건함이 묻어난다.
또 한편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5행의 힘인 디카시(Dica-Poem)로 처리하여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는 형식상 호흡이 단조로운 <사람의 향기>는 직물 대상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한 ‘5줄의 힘, 서정성이 돋보이는 성공적인 시편’은 생산적 결과물이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날/환한 웃음 띠며 만났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탐진 목화송이처럼 터진/우리들의 하이얀 웃음//
-<사람의 향기> 전문
그렇다. 시적 대상을 응시하는 그 자신의 시선은 천상을 오르는 층계와도 잇닿아 있다. 보편적으로 생각이 짧은 이들의 ‘인간의 삶을 피 흘리게 하는 화살표(→)를 무한공간으로 날아오르는 새표(↫)’로 변형시키는 고정인식의 틀 깨기가 반드시 합의된 결과다. 가끔 그의 시편에서 입증되는 시적 향방과 표출의 이행은 ‘새와 하늘’에 관한 시적 메타포가 특이하게도 존재의 꽃으로 발화(發花)되고 있다. 까닭에 “지금 걸치고 있는 것들/물에 들어가기 전에는/모두 벗어던져야 한단다(물에서 떠오르기)”의 시편의 보기나 ‘풀처럼 파랗게 버텨줘야 해’라는 메르헨적인 순수한 기대감으로 “우리 사는 이곳이 살 만하려면/작은 풀들이 대접받아야 해/작은 벌레가 사랑받아야 해(식물성 나의 발)”에서 유추(類推)되듯 그 자신의 명백한 시 인식의 그물망(網)은 ‘물→식물성→작은 풀’로의 추이(推移)를 짐짓 지켜볼 때『詩經』에서 화조시(花鳥詩)가 한시(漢詩)의 주된 영역임을 다시금 가늠할 바다.
또 한편 일상의 삶과 연계된 동식물이 주된 음영(吟詠)의 대상일 것이나 기실 특정한 시인에게 새의 표징은 ‘현실의 고난과 비극을 토로하고 자아 의지를 극복하려는 자유로운 비상과 초월’이다. 까닭에 백로(白鷺)는 왜가리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일 것이나 그 자신은 비록 도시의 빌딩 숲에 처할지라도 ‘봄날 그 벌판의 백로’에 대한 아득함을 지워내지 못하기에 황혼의 인생길을 만보(漫步)하다가 “봄 벌판을 놀라게 한/긴 열차의 굉음 한 줄//하늘로 귀를 열고선/백로가 하이얗게 놀란다(봄 벌판의 백로)”의 일면에서 “눈부신 화염이다/가슴속 어둠을/불어서 내쫒는/살가운 폭력이다(벚꽃의 폭력)” 또한 기억에서 지워낼 수 없다. 따라서 미래지향적 기대감은 정신작업의 종사자에게 막중한 시대적 소임이기에 사물에 관한 그 자신의 시적 반응을 주의 깊게 파헤쳐 점철시키는 차별성은 더없이 신선하다.
까닭 모를 분망한 삶에서 ‘차창 밖의 나 참 오랜만이다’라는 심상(心象)의 술회는 그렇게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도/완곡한 웃음으로 지켜주고//내가 글을 쓰면 저도 따라 쓰는/저만치 차창 밖 또 하나의 나(차창 밖의 나)”의 보기도 그렇거니와 아직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온통 껍질이 벗겨진 두만강 강변의 도문에서 바라보는 민둥산은 서럽다 못해’ “저 마른 땅들을 내려다보며//아무것도 쏟아주지 못하는/파란 하늘이 서럽도록 슬프다(두만강 가 도문에서)”라는 비장감은 못내 참담하다.
그렇다. 푸른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으로 시적 형상화에 전념하며 현실적으로 지구상에 분단된 조국의 비극이지만, 북한의 주민들이 기아(飢餓)로 ‘흙조차도 쌀가루로 보인다’라는 참담함을 나직이 갈 앉은 음조로 읊어내며 “단지 휴전선 위아래에 산다는/차이는 오로지 그 하나뿐인데//북녘은 굶는 일로 세 끼를 때우고/남녘은 맛 기행으로 하루를 채운다(휴전선의 위 아래)”라는 정황을 못내 외면할 수 없다. 한편 “통증이 온몸을 거머쥐려 할 때에도/두 눈 들어 오직 당신만 올려보게 하옵소서(풍랑 속 감사)”를 통해 ‘잠잠하라~꾸짖으셨던 당신 저도 이제 풍랑을 꾸짖으며 살겠습니다’라며 창조주께 드려질 기탄잘리(GitanjalI)는 경건해 매혹적이다.
특히 ‘몸소 그 자신을 태우는 불꽃이 어둠을 밝히듯’ 그 자신의 시집에 수록된 1백여 편의 시편 양식에 견주어 일단 긴 호흡의 산문시 형식으로 풀어쓴 “밥 타는 냄새 나무 타는 냄새를 비롯해서 애간장 타는 냄새에 이르기까지 형이하학의 탄내로부터 형이상학적 탄내까지 골고루 좋아한다.(탄내에 관한 생각)”의 보기나 “묵근한 내 몸을 공중에 냅다 띄워 보았다. 공기의 뜨거운 후원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내 몸은 3초도 지탱 못 하고 돌멩이처럼 툭하니 떨어진다.(중력 확인)”를 외면할 수 없기에 시 형식의 차별성을 비교문학적 차원에서 응시하면, 시의 본말(本末)인 순수서정성을 시적 묘미(妙味)로 한껏 살려주는 충동은 한껏 신선하다. 따라서 가뜩이나 그 자신의 시 의식은 까닭 모를 ‘비탄의 울음’ 뒤에도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정취를 시적으로 승화시켜 중량감이 실린 징후도 그렇거니와 창조적 영혼을 단절의 슬픔이나 치밀하게 직조된 시 의식의 심층에서 건져 올린 반짝이는 언어의 확증은 끝내 가슴 뭉클한 설렘을 가증시켜주기에 소홀하게 지나칠 수 없다.
3. 묵상의 조응(照應)과 지탱하는 힘
모름지기 영국의 스펜더(Spender)가 「시작의 과정(a making of poem)」에서 제시한 '기억력'은 특정한 감각적 인상으로 시인의 천부적 재능과 맞물린 상상력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언어학자 바트겐 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은 곧 행동이다.’라는 지론은 스키마(schema)로 오래 기억하여야 한다. 까닭에 지나친 언희(言戱)나 과장된 수사적 기교 없이 그 나름의 담백한 격조의 언어 구사는 “슬픔에 덮였던 마음 벗음이라(내 영혼의 새처럼)”에 잇닿아 ‘기쁨의 노래 부르며 해처럼 솟으라’라는 비상(飛上)의 나래 짓은 한순간의 몽환(夢幻)처럼 이채로운 역동감이다.
또 한편 깊은 밤, 자유로운 영혼의 바람 앞에서 시에 대한 열망으로 밤잠을 설치는 그 자신의 시 인식은 ‘삶에 괴로움 많으나 감사할 일 또 많으리’라는 일념(一念)으로 시집의 대표 시격(詩格)인 <노래하라 아름다움을>의 시편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삶의 일상에서 영혼의 닻줄 움켜잡고 갈보리 산상(山上) 오르는 행위는 끝내 창조주께 드려지는 글로리아(Gloria)다. 비록 덧없이 흘려보낸 세월이지만, ‘나사렛대학 교수와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장, 그리고 시인이라’는 삶의 족적(足跡)은 이처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충동하여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타자의 영혼에 또 하나의 랩소디(Rhapsody)로 ‘천상(天上)의 선물’을 안겨줄 따름이다.
2. 내 영혼 해처럼 솟아오름은/슬픔에 덮였던 마음 벗음이라//
영혼아 솟구쳐라 어둠을 사르면서/기쁨의 노래 부르며 해처럼 솟으라//
-<내 영혼 새처럼>에서
1. 마음이 무겁고 어둘 때/노래하라 아름다움을//
세상에 숨어 있는 작은 것/하나씩 되새기면서//
삶에는 어두움이 많으나/기뻐할 일 또한 많으리//
마음이 무겁고 어둘 때/노래하라 아름다움을//
2. 마음에 외로움이 스밀 때/노래하라 아름다움을//
아스름 잊혀져 간 작은 일/하나씩 되새기면서//
삶에는 괴로움이 많으나/감사할 일 또한 많으리//
마음에 외로움이 스밀 때/노래하라 아름다움을//
-<노래하라 아름다움을> 전문
특히 그 자신이 시집의「‘5부 노래하라 아름다움을」의 시편 중 <눈물엔>에서 ’눈물엔 나를 키우는 자양이 있어 내가 당신 안에서 자라 갑니다’를 신앙의 간증으로 토(吐)해낼지라도 오랜 날 십자가 부둥켜안고 지나온 세월이기에 그 자신의 ‘평안→기쁨→감사’라는 삼각대위(三角代位)는 마침내 “감사할지라 감사할지라/주님의 그 아픔 오늘도 머금고(평안 있으라)”의 일면에서 확증될 것이나 끝내 ‘생명 있는 그곳으로 당신께로 발 돌리죠’라는 그 자신의 합리적 해법이랄까? “당신과 한 맥이 뛰어//쉼 없는 기도가/당신 향해 이울지요(멀리 가지 못해요)”라는 그 자신의 스스럼없는 변명은 존재감의 빛남이며 퇴색됨이 없는 신앙심의 올곧은 일체감(一切感)이다. 모처럼 이상주의적 찬미와 그의 시 정신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려는 의중은 아니나 ‘좋은 시란 정서와 상상을 통한 문학으로서 인생의 표현이며 푸른 생명의 재해석이기’에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성을 소유자에게 절대적 신앙심’은 이처럼 배경 지식으로 기억에 담아 분별할 일이다.
결론적으로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초조와 불안감에 이끌리는 우리네 삶의 일상은 안타깝다. 까닭에 어딘가 선명하지 못한 부분들이 최소한의 양심에 그 실체를 숨긴 탓도 그렇거니와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 시키듯 작은 신의 대행자’로서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을 위해 화해와 통섭(通涉)의 물꼬를 열어갈 맑은 영성(靈性)을 회복하여 얼어버린 눈물도 끊임없이 녹여내는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모쪼록 절망의 끝을 예견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간대일지라도 유혜목 시인의 간절한 기대치라면, 경건한 믿음으로 사물의 실체를 분할·통합하되 본래의 형질을 회복하는 고독한 작업에 생각의 속도를 조절하고 ‘푸른 생명 기호를 교신하는 행위’로 존재감을 지켜내는 창조적 정신작업의 엄격한 역할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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