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은 두 가지 뜻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의 추상은 '자연의 형상에서 공통된 질서의 형을 뽑아낸다'는 의미 그것이다.
어린이들이 사람의 얼굴은 둥글게, 산은 세모꼴로 그리는 것도 일종의 추상행위이다.
20세기 추상화도 알고보면 19세기 말 사실주의 그림이 고갱이나 세잔느에 의해 단순화되고 피카소에 의해서 선과 면으로 분할되어, 종내는 몽드리안 P.Mondrian 에 이르러 선과 색으로 남게 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림1) 꽃핀 사과나무
그래서인지 추상화는 고도의 정신적 소양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미술양식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몽드리앙은 나무를 점차 단순화시켜 본 결과 결국 수평과 수직의 선만이 남게 됨을 깨닫고 나무와 같이 자연적 대상을 떠나서 엄격한 기하학적 조형(선과 색면)만으로 그림이 가능함을 입증하여 신조형주의라 이름하였다. (그림1)
피카소와 클레의 작품은 서 있는 나체의 형상이나 나뭇가지를 직선이나 곡선으로 분석하거나 요약하여 화면에 나타낸 것으로, 추상화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추상화를 보는 눈(1)의 칸딘스키의 작품 '공상적 즉흥'을 보면 어떠한 대상을 추상화했다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추상의 또다른 의미 하나는 자연적 대상의 추상화와는 달리 애초부터 절대적인 추상적 실재(원,삼각형, 사각형등) 가 근원적으로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일찍부터 자연의 어떤 형상보다도 직선과 곡선등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형태가 훨씬 아름답다 하여 그리스의 비너스상보다도 이집트의 피라밋을 아름다움의 우위로 삼았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기본적 추상형체는 문장에 비유하면 문법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일종의 혼란스러운 자연현상에 부여하는 인간의 질서의식 내지 절대의식의 발로이다. 자연에 친화하고 순응하려는 화가는 자연의 형상을 모방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즐겨하지만, 자연이란 외부세계를 인간과 떼어놓고 보려는 추상화가는 가변적인 자연현상에 대결하여 오히려 선과 색만으로 불변의 절대적인 질서를 신비롭게 확립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나 몽드리안의 작품(그림2)을 다시 본다면, 그것은 자연적 현상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순수한 선과 색의 묶음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림2) 콤포지션
추상화를 보는 눈(1)에서 칸딘스키의'공상적 즉흥'에서 보면 칸딘스키가 화가 자신의 강한 내적 충동을 선과 색으로 격렬하게 표현하였다면, 몽드리앙은 형태에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질서를 선과 색의 비례로 냉정하게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에서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의 양 거봉으로 불린다. 한쪽이 선과 색으로 강한 감성의 표출을 문제삼았다면, 한쪽은 형태적 질감을 엄격한 구성으로 문제 삼았다.
현대음악가 쇤베르크를 친구로 하여 음(소리)을 색으로 나타내는 데 고심한 칸딘스키가 교향곡과 같은 그림을 추상으로 그렸다면, 독신으로 틈틈이 댄싱을 즐겼던 몽드리앙은 댄싱에서의 스텝을 추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양자가 공통되게 비시각적인 음악의 추상성을 조형으로 시각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추상화는 선과 색만으로 감정을 표현할 뿐 아니라, 우주나 사물에 내재한 질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것의 고유성을 보다 작은 양으로 축약해서 나타낸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된다. 화가가 이렇듯 추상화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그쳤을때 자연이 거꾸로 추상화를 닮기 시작한 것이다.
추상화의 작품에서 과학자는 현미경을 통해서 보았던 작은 입자의 모양이 있음을 깨닫고, 화가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한 창조자라고 뒤늦게 경탄을 하게 된 것도 이런사례의 하나이다. 사물의 표면에 나타난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표면의 한계를 넘어선 미지의 세계가 우리들 앞에 펼쳐질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추상화는 단순히 형태만 추상한 것을 넘어 의미의 추상성도 함께 깨쳐 주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차원인 창조성의 문제를 시원하게 열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화가에게 새롭게 문제가 된 추상의지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것에는 화가자신의 창조적 충동이 무엇보다도 우선함은 물론이다. 그림이 자연적인 대상에 추종하는 한, 자연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색채화가 들로네 R.Delaunay의 말을 수정하여 자연적 대상이란 주제마저 완전히 빼어 버린 절대주의 추상화가들은. 조형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점,선,면 그리고 색만을 주제로 삼으려는 지고한 목표를 수립한다.
추상화가의 이러한 지고한 목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으로 치우쳐 장식적인 경향을 낳기도 했지만, 순수한 조형을 주제로 비시각적인 것을 시각화한 그 공적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김해성님의 추상화를 보는 눈 중에서
첫댓글 사과의 맛보다 사과의 구조적 형체와 색깔에 관심을 보였던 세잔느는 당대의 화가들에게 이러한 주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네요
"우리는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것을 잊어 버리고 우리가 보는 것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추상화를 보면 구상화를 볼 때보다 더 가슴이 뛴다. 구상화는 형체에 매어있으나, 추상화는 상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상상은 무한한다. 따라서 추상은 유한한 색상과 형태로 무한에 도전하는 멋진 일이다.
추상은 유한한 색상과 형태로 무한에 도전하는 일이란 말씀이 참 와닿네요..
멋진 말씀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비시각적인 것을 시각화하다.
점 선 면 그리고 색만을 주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려는 화가의 창조성이 요구되는 추상화.
추상화를 설명하는 단어와 글마져도 추상스럽습니다.글을 읽을수록 어렵네요.
예전엔 몬드리안류(?)의 그림이 지루했는데 설명을 보니
이런 그림이 나오기까지 노력하고 애쓴 화가의 노고와 소요된 시간들.. 절제된 화면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우리에게 주려했을까...
곰곰히 생각할 수 있게 되어 감사~^^
창조성은 인간의식에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람의 의미를 묻지않고 바람을 느끼듯이, 꽃의 의미를 묻지 않고 꽃향기를 맡듯이,즐겁게 편하게 그림과 글을 즐겨보세요^^
파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파도에 몸을 맡기듯이, 예술작품은 그리 즐겁게 편하게 즐기다 보면 가까이 다가와 속삭여주고 마음으로 보는 눈을 열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