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석굴암에서
눈이 멀어도 좋았다. 서역의 모래바람이 광풍이 되어 그들을 에워싸고, 발우의 밥을 모래 밥으로 만들어 놓았어도, 그들은 좋았다. 대상인이 끄는 낙타의 등에 출렁, 하고 물이 흐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좋았다. 오아시스는 손에 잡힐 듯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오아시스가 눈 닿는 곳마다 있으며,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행복도 불행도 사막에서는 모두 짧은 환영이었다.
때로는 열대의 나라를 지나는 적도 있었다. 울창한 숲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생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주장자로 쿵, 쿵. 땅의 진동을 전하며 걸어갔다. 뭇 생명이 미리 비껴가라는 의미다. 마주쳐서 싸우지도 말고, 혹 발 끝에 채이지도 말고 미리 도망가라는 의미이다.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기에 숲은 아무리 작아도 작지 않았다.
설산을 지나는 때도 있었다. 발우에 쌓인 눈이 밥처럼 수북해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낡은 옷 한 벌을 걸치고, 책과 약을 든 제자들은 스승을 우러러보는 자세로 서 있었다. 오랜 공부 탓인지 하나같이 거북목을 하고 그들은 스승에게 묻고 있다.
“나를 나라고 부르는 이, 나는 누구입니까?”
이 영원한 질문 앞에서 부처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버지는 뺨에 닿는 햇살을 만지며 “한 11시쯤 됐나 몰라.”라고 하셨다. 핸드폰을 보니 11시 20분이었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나는 석굴암으로 왔다. 아버지는 석굴암을 스무 번도 더 다녀가셨으니, 마음으로 석굴암을 보시는 중이었다. 아버지께 소원을 빌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이 나이에 무슨 소원이 있겠니?”라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석굴암에는 낯익은 신라 천년의 바람이 불고, 천년을 빌어도 다 못 비는 소원들은 석실 아래 누워 잠을 잔다.
석실 측면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단단하기가 10인 화강암인데도 미세한 옷의 주름,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옷고름까지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온화하고 둥근 웃음에는 조금의 모서리도 없다. 어찌하여 세상의 어머니들이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자주 부르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언젠가 석굴암에 왔을 때, 해설사는 말했었다.
“여러분, 지금 보시는 금강역사는 석실 안의 보살보다 급이 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돌도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닙니다.”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는 우락부락한 얼굴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내리칠 기세였다. 나는 그런 금강역사가 무서웠다기보다는 차라리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웠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석굴 안의 조각된 인물들처럼 이름 붙여진 대로의 배역을 잠깐 맡았다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맡은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누구는 스스로 꽃이 되고 누구는 스스로 잎이 된다. 그리고 그 축에도 못 끼는 풀도 있다. 새벽바람에 통통거리다 앞발을 차며 같이 놀자고 불러내는 풀만 있어도, 나는 기꺼이 엑스트라로 남을 것이다.
달을 머금어 함월산(含月山)이라 하듯, 미소를 머금어 ‘신라의 미소’라 한다. 본존불은 우리의 얼굴처럼 친숙하지만, 꼭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려 깊은 눈,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 그리고 저 멀리 떨어져서 불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광배. 절 한 번 하고 보면 부처는 눈 살짝 내려 감고 있고, 또 절 한 번 하고 보면 부처의 눈은 반쯤 열려있다. 그 사이에도 절을 하는 이의 마음에는 무수한 중생의 마음이 일어났다, 부처의 마음도 일어나기를 수천 번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석굴암의 유리 벽을 더듬더듬 짚으며 구석에 지팡이를 놓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날은 더워 바람 한 점 없는 날인데, 절 마당의 배롱나무도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아버지는 누가 볼세라, 부처만 들으시라고 소리를 한껏 낮추어 기도를 드렸다.
“…관절염….관절염….”
아버지는 내 관절염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드리고 있었다. 90이 지난 노인이 ‘아침에는 신선이 되고, 저녁에는 귀신이 된다.’는 노인이 오직 딸자식의 관절염을 낫게 해달라 빌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을 했던가? 언니들을 모아놓고 나만 자식이냐고, 그래서 다들 편안하게 잘 사느냐고 울부짖었다. 언니들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거나, 아이가 고3이거나 그랬다. 첫째 언니가 너도 쉬어야 한다며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의견을 내었다. 나도 더는 반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편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그러니 이번 석굴암 여행은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인 셈이다. 나는 두고두고 이 여행을 가슴 아파할 것이다.
절을 마친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석굴암 옆 계단으로 내려오셨다. 맑은 하늘 아래, 절 마당에서는 기와 불사가 한창이다. 아버지는 너럭바위에 앉아 지팡이 위에 턱을 고이고 숨을 고르셨다.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 고무신 신고 쌀 포대 바지 입고 이 세상 왔다 갑니다. 90 평생, 등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나도록 삶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눈멀어가는 아비 봉양한다고 십수 년을 뒷바라지한 딸이 있어 눈칫밥 한 번 안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착한 우리 딸의 관절염을 반드시 고쳐 주십시오.”
아버지의 사연은 너무 길어서 다 받아적을 수 없었다. 흰색 물감이 번져 글자들은 이내 뭉개졌다. 나는 아까부터 울고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약 20%의 위약금을 물고 나는 아버지의 입월을 취소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오자, 아버지는 햇빛을 쐬며 앉아 있었다. 눈이 아파 햇빛을 정면으로 보지는 못하고 아버지는 정수리 가득 햇빛을 받고 있었다. 햇빛에 탈색된 둥근 정수리가 우리 아버지 정수리였다.
“나는 네가 나를 버리고 간 줄 알았다. 앞이 잘 안 보이니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세상이 변해도 우리 막내딸은 안 변하지. 그건 내가 잘 알지.”
아버지의 입술에 흡족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저 오래된 웃음을 두고, 가슴속에 박제된 저 웃음을 두고 나는 아버지를 어디로 보내려 했던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현란한 오후 두 시의 햇살이 절 마당의 사루비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가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