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식탁을 지키는 사람들, 자신의 건강은 놓치고 있다.
"산재는 형식뿐"... 227일 걸리는 승인, 만성 질환은 포기
“산재 신청은 해봤지만, 결국 치료받을 시간도 여유도 없어서 포기했어요.”
정씨(71)는 강원특별자치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10년 넘게 조리사로 일해 온 노동자다.
출근길 낙상으로 인한 골절은 산업재해로 승인받았지만, 장시간 서서 일하며 생긴 관절통과 청력 저하, 피로 누적 같은 만성 직업병은 “신청 자체가 부담스럽다”며 포기하고 지내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2025년 산재보상제도 개선 추진계획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업무상 질병 산재 승인에는 평균 227.7일이 소요된다. 같은 계획에서 정부는 2027년까지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 기간을 평균 120일 이내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현재 구조에서는 긴 심사 기간이 노동자의 ‘치료 포기’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50명 식사를 2명이… 서서 10시간, 진료시간은 이미 끝난다
정씨가 일하는 요양병원은 약 50명의 입원 환자에게 하루 세 끼를 제공한다.
이 50명의 모든 식사를 준비·배식·설거지·기기세척까지 담당하는 조리사는 정씨를 포함해 단 2명뿐이다.
정씨의 근무시간은 새벽 5시 20분 출근, 오후 5시 20분경 퇴근으로 명시돼 있다.
서류상 휴게시간을 제외해도 실제로는 10시간 이상을 거의 서서 보내며, “조리·배식·청소·세척을 한 번에 소화하다 보니 앉아서 쉬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조리가 이루어지는 ‘집단급식소’ 환경에서는 단시간 고강도 작업이 반복된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다.
퇴근 시간에는 이미 병원 외래와 물리치료실 운영이 끝나 있어, 같은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내 질병을 치료할 시간은 확보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장시간 노동과 의료 이용시간의 불일치가 만성질환의 조기 치료를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리실의 소음과 조리흄: 법과 연구가 ‘위험’이라고 말하는 것들
정씨는 하루 10시간 가까이를 강한 배기팬·기기 소음 속에서 보내며 “후드와 배기팬 소리가 너무 커 귀가 울릴 정도”라고 호소한다.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해석에서 1일 8시간 기준 85데시벨 이상 소음이 발생하는 작업을 ‘소음작업’으로 보고, 이 수준 이상에 장기간 노출되는 노동자를 소음성 난청 위험군으로 분류해 특수건강진단 대상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정리한 소음성 난청 산재 인정 기준 역시 8시간 시간가중평균 85데시벨 이상 소음에 수년간 노출된 경우를 대표적인 업무상 질병 위험으로 제시한다.
조리실의 소음과 조리흄: 법과 연구가 ‘위험’이라고 말하는 것들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기와 연무, 이른바 ‘조리흄’은 병원 조리실 노동자의 주요 위험요인이다. Journal of Korean Society of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Hygiene(2024)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고온 기름 조리 시 발생하는 조리흄에는 포름알데히드(1군 발암물질), 아세트알데히드(2B군 발암물질),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s, 2A/2B군) 등 다양한 유해물질이 포함되며, 국제암연구소(IARC)는 이를 인간 발암 가능성 Group 2A로 분류한다.
[조리흄 발암물질 구성과 농도 변화]
같은 연구에서 학교 급식 조리실 공기질 평가 결과, 조리 중 포름알데히드 농도가 조리 전 대비 4배 이상 상승해 일부 지점에서 실내공기질 권고기준(60μg/m³)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검출됐다. 공단 보고서는 “조리흄 장기 노출이 호흡기·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할 수 있어 환기설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씨는 하루 10시간 배기팬 소음 속에서 “귀가 울릴 정도”라고 호소한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은 8시간 85dB 이상을 소음작업으로 규정하며 특수건강진단 대상을 지정한다.
제도는 있는데 닿지 않는다: 특수건강진단 의무와 환기 가이드의 사각지대
정씨는 정부와 병원 측 안전 대책에 대해 “10점 만점에 1점”이라고 말하며, “정기건강검진도 각자 알아서 받는 수준”이라고 증언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시행규칙은 분진·소음 등 유해 요인에 노출되는 근로자에 대해 사업주가 특수건강진단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며, 소음의 경우 8시간 시간가중평균 85데시벨 이상 노출 근로자를 대상으로 정기적인 특수건강진단을 받게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씨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실제 병원 조리실에서는 직무 특성과 유해요인을 반영한 특수건강진단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집단급식 조리환경과 관련해서는 이미 정부 차원의 가이드도 일부 마련돼 있다.
고용노동부는 학교 급식실 종사자의 폐암이 최초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이후, 산업안전보건공단 연구진과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학교 급식 종사자 폐암 건강진단 실시 기준을 만들고, 55세 이상 또는 경력 10년 이상 급식종사자를 대상으로 저선량 폐 CT 검사를 시행했다.
같은 맥락에서 고용노동부와 교육부는 「학교 급식 조리실 표준 환기 가이드」를 공동 개발해, 학교 조리실 환기설비 용량·배치 기준과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과 기준은 대부분 학교 급식실을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병원·요양병원 조리실은 별도의 환기·안전 매뉴얼이나 건강검진 프로그램 없이 사실상 관리체계 밖에 놓여 있다.
집단급식소를 포괄적으로 다룬 최근 연구 역시, 병원과 사회복지시설 등 집단급식소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에 대한 정의·규제·관리 기준이 거의 부재하며, 교육부·환경부·고용노동부 등 부처별 대응이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데 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병원 조리실에 필요한 것: 이미 있는 근거를 ‘적용’하는 일
집단급식소 조리환경을 분석한 국내 연구는 조리흄과 소음, 미세먼지 등 오염물질이 작업·실내·대기 환경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조리실 노동자의 장기 노출이 건강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학교 급식 종사자 폐암 검진, 조리실 환기설비 가이드 제정 등 일부 대책을 내놓았지만, 같은 유형의 유해요인에 노출되는 병원 조리사·요양병원 조리사는 제도 밖에 머물러 있다.
정씨의 말처럼 “산재는 형식뿐”인 상황에서, 긴 심사 기간과 치료 시간 부재, 특수건강진단 미이행은 만성질환을 ‘개인 문제’로 떠넘기는 구조를 만든다.
이미 국제암연구소와 국내 직업환경보건 연구, 산업안전보건법령이 조리흄·소음·분진의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 병원 조리실을 집단급식소 관리 체계 안으로 편입하고, 특수건강진단·환기설비·근무시간·인력기준을 병상 규모에 맞게 구체화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한국조리사협회중앙회 현황
한국조리사협회중앙회는 1950년에 설립된 조리사 직능 단체로, 전국 16개 시·도 지회를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조리사 단체다. 협회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위탁으로 급식 조리사 대상 위생 교육을 담당하며, 조리사 권익 및 조리 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다만 협회 직원 규모는 소규모로, 공식적으로는 직원 수 10명 미만인 비영리 단체로 운영되고 있다. 조리사 자격증 보유자는 2023년 기준 약 10만 명에 달하나, 협회 정식 회원은 자격증 소지자 중 일부로 추정된다.
병원·요양병원 조리사 인력은 만성적인 부족 상태다. 2023년 한국외식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단체급식(병원 포함) 분야 조리인력 수요는 지속 증가하지만,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해 구인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병원급식은 365일 3식을 제공해야 하고, 치료식 및 멸균식 조리 등 업무가 과중해 인력 수급이 더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종합병원당 평균 조리사 인원은 4.9명에 불과하며, 의원급에서는 0.3명 수준으로 매우 낮다. 이후 노령 인구 증가 및 의료 서비스 이용 증가에도 불구하고 인력 부족은 심화 추세로 추정된다.
이러한 병원 조리사 인력 부족은 조리 환경의 열악함과 노동 강도 상승으로 이어져, 만성 직업병 및 산재 문제와 맞물려 심각한 직업 건강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