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테마파크를 다녀오며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을 생각하다
사촌과 함께 광한루와 춘향테마파크에 갔다가 왔다.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고 하면서 고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의 본분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을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5)라고 말한다. 물론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스데반의 경우를 보아도 산헤드린 공회는 엉터리 죄목을 들먹이며 죽이고자 하였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권한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기들의 명예와 영광, 부와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인가?
오늘날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도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기에 바쁘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입법 활동도 행정 활동도, 사법 활동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일당의 부귀와 명예와 쾌락을 위하여 하는 것이 도를 넘고 있다.
『목민심서』를 읽으면서 오늘날의 사회 모습과 너무나 같은 글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사도(司徒)가 만민(萬民)을 가르침으로써 각기 수신(修身)하도록 함이요, 다른 하나는 대학(大學)에서 국자(國子)를 가르침으로써 각기 수신하고 치민(治民)하도록 하는 것이니, 치민이란 곧 목민이다. 따라서 군자(君子)의 학은 수신함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이 난 지 오래되어 그 말씀도 없어지고 그 도(道)가 점점 어두워졌다. 오늘날의 사목들이 오직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조급하고 어떻게 목민을 해야 하는 줄을 몰라서 백성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사목하는 자들은 바야흐로 아름다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혼자 살이 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