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김영필)
신천에 동서를 잇는 돌다리가 몇 개 있다. 고마운 다리다. 담장과는 달리 다리는 서로를 잇는다. 담장은 높이 쌓지만, 징검다리는 낮게 놓는다.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이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겸손하게 엎드리고 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모습이다. 혹시나 건너는 사람이 불안해할까 싶어 힘주어 받힌다. 누군가를 위해 징검다리와 같은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험한 세상에 누군가의 다리가 되어 본 적이 없다. 힘들고 지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의 편이 되어 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참 이기적으로 산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철학에 유아론(唯我論)이 있다. 말 그대로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자아중심적 세계관이다. 내가 진리의 척도이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다. 나와 타자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실종된다. ‘타자’란 존재가 실종되었다.
담장은 경계를 짓지만, 다리는 경계를 허문다. 타자를 나의 섬으로부터 추방하고 나와 타자 사이의 높은 담장을 쌓는다. 데카르트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을 나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담장을 쌓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와 몸으로서의 나를 분리한다. 단지 마음만 생각할 수 있고, 몸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유로. 담장을 쌓아 놓고, 이쪽과 저쪽을 이어줄 다리를 찾아낸 것이 뇌 내부의 ‘송과선’이다. 마치 솔방울처럼 생겨 ‘송과선’이다. 데카르트는 뇌가 마음과 몸을 이어주는 다리라고 생각한다.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 역시 담장과 다리의 메타포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는 서로 담장을 쌓고 자신의 섬 안에 산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서로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이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人間)이란 한자가 말해 주듯, 인간은 사이(inter, 間)를 산다. 인간은 사이-존재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 산다. 관계(relation)란 말은 ‘상호의존적’이란 뜻이다.
마음은 창문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이미 타자로 향해져 있다. 그것이 신이든 사람이든, 마음은 항상 무언가로 향해져 있다. 나와 타자 사이에는 이미 다리가 놓여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항상 사랑하고 미워하는 누군가에 대한 것이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비록 짝사랑이라 해도 짝사랑의 대상은 있다. 그래서 마음은 막힌 상자가 아니다. 흘러가는 물과 같다. 마치 타자로 흘러가는 다리와 같다. 우린 서로의 다리가 되어 함께 살아야 할 존재이다. 혼자 두면 참 힘들고 외로운 존재들이다. 누군가가 내가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준다는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자연은 담장이 필요 없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담장고치기」(Mending Wall)의 첫 구절은 ‘무엇인가 담장을 사랑하지 않는 게 있나 보다’로 시작한다. 화자는 담장 쌓기를 싫어하는 자연주의 시인이다. 자연은 그 어디에도 스스로 담장을 쌓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쌓아 놓은 담장을 허문다. 하지만 담장 쌓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허물어진 담장을 고치면서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고 중얼댄다. 자연은 얼은 땅을 녹여 부풀게 하여 담 위의 돌들을 햇빛 속으로 흩어지게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틈을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봄이 되면 담장을 수리해 다시 쌓는다.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명해야 서로 다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보면 담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담장 쌓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중국은 담장 안에 담장을 쌓는다. 일본은 겉으론 담장이 없다. 그들에겐 바다가 해자(垓子)이고 담장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여러 개의 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담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물리적 경계일 뿐이다. 헛담 이란 게 있다. 있으나 마나 한 담이다. 고 이어령 박사는 한국 담은 어른이 까치발을 들면 밖에서 안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라고 말한다. 너무 낮아서 안이 훤이 다 보인다. 그러니 안은 밖에서 경치를 빌려 온다. 이걸 ‘차경’(借景)이라 한다. 안은 밖의 덕을 입어서 아름답다. 나는 타자에게 빚지고 산다. 나와 타자 사이의 담을 허물자! 그때 타자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내가 타자이고, 타자가 나이다. 서로에게 징검다리가 된다.
[출처] 7월 24일(일) 징검다리|작성자 김영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