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진이의 항구
윤인숙
여름 방학이 시작 된 후 몇 주일 동안이나 행방을 몰랐던 영진이가 판사의 즉심 판결로 소년원으로 가지 않고 마산 청소년 보호관찰소로 바로 보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늦은 아침 마산 시내를 벗어나 영진이 있는 곳을 찾아 가는 굽은 산길에는 솔나물 개망초 비비추 범부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른장마라는 6월, 메마른 산길 모퉁이를 돌고 돌아 마을로 들어서자 뙤약볕을 피해 정자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축 처진 표정으로 외지인을 쳐다보는 노인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치를 묻는 우리에게 더위에 지쳐 말문을 닫았는지 들고 있던 부채 끝으로 저리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노인들의 손짓 따라 이리저리 헤매며 찾은 후미진 마을 끝자락에 영진이가 있다는 청소년학교의 팻말이 보였다.
미항으로 이름 난 이런 곳에 마치 어린 단종이 생을 마감한 청령포 유배지처럼 온통 사면이 바다로 둘러싼 작은 육지 같은 곳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오래된 폐교를 손질하여 아이들의 활동장소로 쓰고 있는 그곳에는 영진이와 비슷한 처지의 사연을 가진 중,고 학년을 초월한 27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일과를 마치고 함께 지정된 숙소로 가서 생활하다가 법무부에서 정해준 시간을 채워 각자 퇴소하는 날까지 머물러야 하는 곳이었다. 조금 더 높은 산 속에 위치한 숙소에서 막 점심을 끝낸 덩치 큰 아이들이 쏟아지는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런닝셔츠 차림으로 공을 차기 위해 현관 앞에서 신을 신다가 우리를 보고 꾸벅 절을 하고 비켜선다.
아이들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고 계시는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따라간 교실 안에서는 녀석을 포함한 서너 명이 물감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왜 매일 지각을 하냐, 수행평가물이라도 제대로 내라, 공부를 안 하려거든 교복이라도 갖춰 입어라.’
이렇게 채근하는 선생님도 없는 이곳에서 어쩌면 이 녀석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도 없고 배가 고파도 누가 차려줄 밥상도 없이 뿌연 형광등만 기다리는 어두컴컴한 방, 형 누나 각자 알아서 처한 상황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고 일과가 끝나면 들어오든 말든 서로 상관하지 않는 집,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PC방도 없는 곳, 쉬는 시간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매점을 들락거리는 군것질로 인해 옆에서 침을 흘리게 하는 친구들도 없고 최신형 휴대폰도 MP3가 없어도 전혀 구애 받지 않는 모든 것과 단절하고 그동안 마음을 놓고 지내서인지 녀석은 입성도 깨끗한 채 살이 옴팍 오른 흰 꽃 돼지가 되어 있었다.
두 달 전 내 방 회의실에서 자신을 붙잡아 온 경찰에게 찜질방에서 훔친 수표를 대신 돌려주며 손이 닳도록 사죄하며 제대로 선도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테니 선처를 부탁한다며 용서를 구하던 내 모습을 기억이라도 하는지 쳐다보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이제는 말썽부리지 않고 착하게 살겠다고 손가락 걸며 한 약속도 전부 무효라는 듯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씩 쳐다보더니 엉거주춤 일어났다. 타들어 가는 태양의 열기에 가뜩이나 입이 바짝 말랐다. 걱정 한 것과 달리 그동안 먹고 자는 것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인지 살이 올라 두터워진 녀석의 등을 쓸어주며 뺨을 꼬집고 악수를 청했다. ‘이곳까지 나를 찾아 오셨구나’ 하는 감동도 미안한 표정도 없는 무표정한 녀석의 몸짓에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내 눈이 자꾸 따가워졌다.
가져간 상자에서 몇 개의 여름 티셔츠며 팬티며 양말 세면도구 등 이것저것 꺼내 놓고 마치 군대에 면회 온 노모처럼 숙소에서 땀 냄새 안 나게 잘 씻고 챙겨 입으라는 말에 잠시 머쓱해 했다.
현관 앞마루에 몇 개 풀어놓은 수박덩이를 무심히 바라보는 척 하더니‘그냥 딴 생각 않고 1년이고 2년이고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자신의 계획인양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숙명인지 이 녀석의 형 누나 세 형제가 나란히 우리 학교를 5년 동안 거치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래도 선생님들이 부여잡고 끌어안아 둘은 겨우 졸업은 시켰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녀석 옆에 서 있는 담임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 입을 연 녀석에게 왜 그랬느냐, 나하고 한 약속을 잊었느냐, 앞으로 계속해서 여기에 있고 싶다면 복학은 어려운데 어쩔 셈이냐고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선뜻 대답하지 않는 녀석 앞에 놓여있는 경찰 조서에는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도 있어 남의 것을 훔치고, 가슴이 답답해서 무작정 눈에 띄는 남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보고, 비싸 보이는 외제차가 눈에 띄어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실험하고 싶어 훔쳐서 마음대로 몰아보았다고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눈으로 읽고 있는 내게 사고를 저지른 이유는 물론이고 일체의 변명도 없이 앉아 있다가 불쑥
‘지문 때문에 잡혔어요.’
한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 마치 잡힌 원인을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체포될 당시의 상황을 짤막하게 말했다.
그곳에서 생활을 맡아 지도하시는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에게 겨울이 오기 전 늦가을쯤 두꺼운 점퍼와 축구화, 이불을 챙겨 담임과 함께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빨갛게 충혈 된 녀석의 눈에 맑고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내뱉는 한마디,
‘선생님 혹시 할머니가 찾아오면 잘 있다고 전해 주세요.’
‘성경책은 여기 많으니 검정고시 준비할 책을 보내 주세요.’
한다.
누가 그랬던가,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만고의 진리처럼 되어버린 이 말을 문제 많은 이 시대 사도가 사라졌다고 외치는 황망한 이 시대에 남의 새끼를 위해 애면글면하며 애간장을 태우는 선생이 어디 있느냐 라고 누가 감히 그러는가 말이다.
영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목에 펼쳐진 마산의 쪽빛 바다는 여전히 푸르러서 그 녀석이 그곳을 떠나는 날까지 매일 아침 말해줄 것이다.
‘얘야, 오늘 하늘에 구름이 끼었어도 그 속에는 태양이 있다.’라고.
수필가 윤인숙은 경남 거제출신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여 교직생활을 했으며 이사벨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수필부산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 -윤인숙 수필 집<웅동의 봄>중에서-
웅동의 봄/윤인숙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쯤 있어야 한다.
가보고 싶고 갈 수 있어도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이 웅동이다.
스물 넷,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최선일 뿐 내 의지로는 인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당신과 나는 이 세상의 마지막 추억 같은 존재예요.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의 마지막 추억 같은 존재, 당신과 나는 그런 존재예요.’
열아홉 살 여름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만난 라라와 지바고의 영원에 가까운 고백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열정에 가득 찬 꿈도,
‘내 인생에서 두 가지 후회하지 않는 일이란 사르트르를 만난 것과 평생토록 문학의 길을 걸어 온 것이다. 사르트르는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문학은 철저히 현실을 보복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선언한 시몬느 보봐르의 당당함이 나의 야망으로 빛났던 순간들도 기억 저편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노을이 물들어 가는 초저녁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운동장, 나이 들어 잘려진 소나무 밑동에 저물도록 앉아 사그라진 한 움큼 꿈의 재가 아직도 불씨로 남아있는지 더듬어 볼 뿐이었다.
‘네 엄마가 어떻게 너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있었겠느냐.’
사람들의 말은 내 앞에 가로 놓인 돌부리가 되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가고 있었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뿌리에서 뽑아 올리는 나무의 수액처럼 몸속의 진액이 끝없이 스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아! 그렇다. 나도 남에게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불행이란 것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것이구나.’
졸업 시험을 마치고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달려 왔지만 어머니는 이미 입관이 되어 있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 드렸다.
이불 보따리 속에 책 몇 권을 집어넣고 아무도 나를 알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든 웅동, 그렇게 웅동은 나에게 깊고도 깊은 곳이었다.
어머니가 떠나가신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용호동 바닷가 언덕에서 아직도 뿌리 내리지 못한 봉분 위 잔디 사이의 황토 빛 흙만 만져보고 늦은 밤 다시 반겨줄 그 누구도 없는 운둔지로 돌아오곤 했다.
진해행 완행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 저 멀리 용원 앞바다에 떠 있는 밤배의 불빛이 익숙해지기까지 가슴 깊이 묻어 둔 질박한 서러움은 끝도 없이 솟아올랐다.
초저녁부터 군불을 때어 솔가지 탄 연기가 밴 쪽마루에 앉아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던 하숙집 이장님이 안심하며 말없이 돌아서는 등 너머로 보이는 초승달에 이마가 시려왔다.
‘그때는 내가 태어난 날이 아직 밝지 않아 날 수와 달수도 들지 않았더라면, 샛별도 빛을 잃어 동이 트지 않았더라면, 주시는 자도 가져가시는 자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이성적 한계를 뛰어 넘는 욥의 절대적 믿음 그 완벽한 고백을 그때까지 알지도 들어 본적도 없었다.
다시 찾아온 봄, 다투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불어오는 바람 속에 물기 오른 연녹색 나뭇잎을 보며 마치 화롯불에 덴 듯 하늘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끝없는 그리움에 호흡마저 가빠왔다.
‘부모님을 데려 가시고 이제 무엇을 더 빼앗아 갈 것인가요. 내게 무엇이 남아 있나요.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단 5초 만이라도 엄마를 보게 해 주신다면 모든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 생명 5년씩을 단축해도 좋습니다.‘
들어 줄 리 없는 절박한 기도는 계속되었고 아프고 절실한 염원 속에서 내 삶의 빛깔은 온통 무채색이었고 조각 난 인생은 넌더리가 났고 시간은 정말 더디게 흘러갔다.
시간만 나면 물감 통에 이젤을 메고 무작정 바위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녔다. 진해만의 푸른 바다, 다도해의 쪽빛 수평선과 하나가 되어 버린 눈부신 하늘이 아름다워 차라리 눈을 감았다.
발 닿는 산골짜기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윤무는 저 멀리 아랫마을에 분홍 보자기를 펼쳐 놓은 듯 눈조차 뜰 수 없게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애써 금오신화를 바위 밑에 감추고 단종을 그리워하는 시를 나뭇잎에 써서 띄워 보냈다지만 비처럼 흩날리는 꽃잎 속에 나의 그리움은 산화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일과가 끝날 무렵 손수 배를 몰고 나가 잡은 횟감을 들고 교무실에 찾아와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놓고 덕담을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구릿빛 웃음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일렁이는 보리밭을 지나 산기슭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공부가 싫어 결석이 잦은 녀석의 집을 자주 찾았다. 웅천 주씨의 귀한 손이라는 할머니의 자랑만 잔득 듣고 돌아오는 시간, 들을 건너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농악대 징소리 묻어있는 논두렁길을 걸으면 주머니 속에 애써 넣어준 삶은 계란 두 알의 따스한 온기가 멀리 마을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하늘을 향해 생떼를 쓰던 나는 서서히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너는 이담에 화초각시처럼 살 거다’ 라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리고 야생 잡초가 되어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세상을 내다보았다. 한나절을 죽어라고 딴 보리똥 열매 한 됫박을 방문 앞에 놓고 부끄러워 죽어라 도망가 버리는 아이들을 보는 일이 차츰 작은 기쁨으로 변해갔다. 엄마를 졸라 귀한 배춧잎 노란 속만 골라 양념에 버무린 김장김치 보시기를 마루에 놓고 가던 녀석들을 따라 나서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밤이면 용원 바닷가 낙지잡이에 신이난 아이들 틈에 끼어 횃불을 들고 있으면 흐르는 콧물도 아랑곳 않고 저절로 신이 났다.
‘그래, 세상은 참 따뜻한 곳, 한 번 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곳,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구나.’
구천 원 하숙비에 빨래 값 천 원, 어머니가 해주시던 옥양목 풀 먹인 이불이 생각나 덤으로 천 원을 더 드리는 통에 이장님 사모님은 새 이불을 보며 웃는 내 모습이 보기 좋다며 희다 못해 푸른 영청 색 이불 호청을 열심히 갈아 주었다.
입을 닫고 사는 내 정체가 궁금해 일부러 주전부리 할 것을 가지고 와 친절을 베풀며 서성거리는 일도 잦았고 방에 들어와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내놓지도 않은 빨랫감을 찾아내 가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 마을에 들러 사주를 봐 준다는 도사님이 오신다고 사 나흘 전부터 마을이 웅성거렸다. 이장 사모님이라는 권세를 앞세워 황송하게 모시고 왔노라며 어느 날 주인 없는 하숙방에서 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사님의 눈치와 내 반응을 이리저리 살피며 이번에는 꼭 내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사연을 알아내고 말리라는 기대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도사님 입 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주에 천귀와 천문이 들어 있어 앞으로 연필로 묵고 살겠네.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팔자니 공부를 더 하면 좋겠소. 천고가 두 개 들었으나 두 개가 상쇄되어 앞으로 괘안켔소.’
지금도 연필만 잡으면 행복해지니 사주쟁이 도사님 말이 예언대로 적중한 것인가...‘
이제는 모습조차 찾기 어려운 용원의 바닷가, 웅동의 그 분분한 아름다운 꽃잎들의 반란이 젊은 날의 아픔과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 불현 듯 가보고 싶어진다.
끝없이 깊고 깊은 웅동의 봄, 그 봄은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윤인숙 수필 집<웅동의 봄>중에서-
수필가 윤인숙은 경남 거제출신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여 교직생활을 했으며 이사벨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수필부산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