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맞이하고 봄에 보낸 우산 하진규 선생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은 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또 봄은 간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면 봄이 온 것이고 모란이 지면 봄은 가는 것이다. 봄날이 좋았다는 것은 봄이 올 때가 아니라 갈 때다. 그렇지만 자연의 섭리에서 보면 봄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순환되는 날짜를 사람들이 약속한 대로 묶고 명칭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나의 고등학교 동기인 우산 하진규 선생이 2012년 봄부터 진주 향교에서 유생들에게 한문 강의를 시작 하였다. 첫 강의교재는 학민문화사발행 통감절요(通鑑節要)였다. 통감절요는 중국역사를 기전체로 기술한 책이다.
저자 사마광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역대의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고, 왕조 흥망성쇠의 원인과 통치자의 통치행위에 대해 대의명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기보다는 위정자의 옳고 그름을 따져 후대에 올바른 정치의 교훈으로 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기에는 ‘사마광이 말하기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자신의 논평을 병기한 책이다.
그런데 처음 이 책의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한문에 대한 기본 소양이 부족하여 학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 자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문지상에 혼용되는 상용한자나 교양서적에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한자를 읽을 따름이지 글자의 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통감의 문장은 당시 중국 상류사회 선비들과 교감할 수 있는 고급문장이었기에 쓰이는 글자도 어려운 글자가 많고, 전문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글자 한자마다 함축적인 의미가 포함된 문장이 대부분이어서 이해하는데 난해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사마공의 예리한 사평과 미려한 문장으로 인해 흥미를 잃지는 않았다. 다만 작자가 문장의 기교를 부리기 위해 전주(轉注)나 가차(假借)를 서슴지 않고 사용한 점은 초심자들을 질리게 한 또 다른 요인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어 보려고 해도 어느 곳에서 떼고 어떤 토를 달아야 할지 난감하였다. 그래서 통감절요(通鑑節要) 天(천)을 마칠 무렵에 수강생들이 중국 역사 대신 우리나라 역사가 수록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강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여 2018년 3월 8일까지 강의를 한 것이다.
해수로 만 6년간이다. 우산 선생은 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에서 한문학과 고전번역에 대한 공부를 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가 주도한 조선왕조실록 번역 작업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전통적 서당식 공부와 학문에 대한 현대적 방법론을 겸하여 문․사․철(文史哲)의 영역을 두루 익힌 분이다. 그래서 강의 교재에 서술된 통치제도, 문물, 경제, 자연현상, 제례, 법률, 천문, 인물, 지명, 관직명, 유물, 유적, 풍습, 유래, 일화를 종횡으로 꿰뚫어 어떤 때는 글자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장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하여 수강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우산이 그렇게 유생들을 지도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자신이 성리학의 법통을 이어 받은 유학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다년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터득한 지도력이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민족문화추진회의 번역요원 전문가 교육과정을 거쳐 조선왕조실록 등 고전국역에 참여한 경험도 강의를 심도 있게 이끌 수 있었던 근원이었으리라.
교재의 학습에서 터득한 학문보다 더 유익했던 것은 교재에 기술되지 않은 영역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풍습이나 문물이었다. 수강생들이 평소 의문을 가졌던 의례나 제례 등 다양한 예의범절에 대해 질의를 하면 각 사항마다 유학의 본질적인 측면과 우리나라의 관습적인 측면을 비교하면서 명쾌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조상의 남긴 기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문의하면 귀찮을 법도 한데 내색하지 않고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덕택에 조상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잘 정리하여 내 카페에 수록해 두었는데 문중에서 참고로 활용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한문을 터득하기는 불가능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6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는지 지금은 쉬운 문장은 눈에 들어온다. 사찰이나 재실에 붙어 있는 주련에도 눈이 머물고, 한시를 보면 스스로 마음속으로 음미해 보기도 한다.
몇 해만 더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것은 수강생의 욕심이다. 선생의 건강이 더 중요하니 하루 빨리 정양하셔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우산 선생이 마지막 강의 시간에 칠판에 쓴 생자필멸(生者必滅)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글귀가 맴돈다. 인간이나 자연은 모두 회자정리나 생자필멸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결국 봄에 만나 봄에 떠나보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떠나보내려니 존재의 소중함이 절실해 진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전립선 관련 병은 그렇게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삼사 개월 고생을 하면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와 평소와 같은 생활을 영위 하더라. 그 때 다시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아니라 이자필회(離者必會)가 되기를....
첫댓글 離者必會가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南國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뒤늦게 전하게 되어 무척이나 부끄럽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갑자기 송별연을 하고난 뒤 왠지 모르게 하는 것도 없으면서 동분서주하면서 지금에 이르고나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가 어지러울 따릅입니다. 友山 선생님을 그렇게 보내드린 것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아프게 하는군요~~~ 離者必會가 될 수 있다면 錦上添花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