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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緣)의 매듭과 따뜻한 교감(交感)
- 최승학 시인의『가갸 노래』와 눈부신 언약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모던포엠」 주간)
1. 자존감의 빛남과 시적 차별화
한 편의 시는 특정한 시인에게 시적 논리의 합리성이며 가끔 조화로운 언어의 미학으로 가늠된다. 까닭에 최승학 시인의 「그 연(緣)의 매듭과 따뜻한 교감(交感) - 최승학 시인의 『가갸 노래』와 눈부신 언약」의 평설 모두(冒頭)에서 20세기 신비주의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의 제기는 응당 가늠할 점이다. 일단 언어공해가 심각한 지식·정보화 사회에 처한 대다수 이들 중 푸른 식물성 언어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명백히 밝히고 차별성을 지닌 시적 작위(作爲)를 시대적 소임으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는 창조적 영혼은 지극히 매혹적이다.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목어(木魚)의 울림 뒤 교교(皎皎)한 월광에 선잠인 듯 아득할지라도’ 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알파벳인 한글은 국보 제70호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26년 9월 <조선어연구회>는 한글을 ‘가갸글’로 확정했음도 그렇거니와 영국의 문화학자 존 맨(John Man)이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또 『大地』의 펄 벅(Pearl S. Buck)도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역설도 가늠할 점이다. 지정학적으로 ‘천년의 땅 하슬라(何瑟羅)!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강릉(江陵)’에 탯줄을 묻은 월대산인(月臺山人) 최승학(崔乘鶴) 시인은 가깝게는 고교동문으로 현재 평자가 상임고문인 월간 『한맥문학』을 통해 1997년 등단한 이후, 따뜻한 서정성이 감미로운 시흥에 감응된 첫 시집 『허튼소리』(2000)를 포함하여 묶어내는 제10 시집 『가갸 노래』(2025)는 동시대의 어느 시인에 견주어도 빛나는 자존감은 끝내 신선한 충격(衝擊)이다.
무엇보다 시집의 모두 격(冒頭格)인 <시인의 말>에서 ‘살아낸 삶의 짙푸른 흔적이랄까?’ 끝내 “들꽃 다발을 안개처럼 지워가는 세월/한낱 꿈밖의 꿈길로 여길지라도/나뭇잎 무성한 달맞이 터에서/온몸으로 맞는 달빛에 어찌 비할까.”라는 반문(反問) 뒤에 비장감(悲壯感)은 끝내 허망한 정조(情調)다. 까닭에 ‘주어진 오늘은 내 삶에 있어 최초의 날이며 최후의 날이다.’라는 그 절박함에 맞물린 깊은 사유로 시 쓰기에 몰두해온 화자(persona)의 의중이지만, 시집의 편집구조는 「Ⅰ. 꽃의 언어(12편), Ⅱ. 젊은 나무들(12편), Ⅲ. 경포, 물소리(12편), Ⅳ. 사람과 사람(12편), Ⅴ. 들녘에 서서(12편), Ⅵ. 몽혼에서 깨어(12편)」와 같이 결(結) 고운 옷감처럼 제6부의 각각 12편이 균형감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대다수 시인의 경우와 상이하게 짜신의 표제시(標題詩)를 다소 파격적으로 시집의 맨 끝에 수록함은 그 나름의 동일성을 일탈(逸脫)한 차별화다. 그처럼 끈끈하고도 소중한 삶의 연계 선상에서 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성은 감정의 절제와 깊은 사변성(思辨性)에 의해 ‘바람에게 물어보는 그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으로 어둠의 경계를 헐어버리는 맑은 음조의 페르마타(fermata)다.
비교적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푸른 생명의 식물성 언어로 생명외경심(生命畏敬心)에 의한 탐색과 성찰에 몰입하여 서정적 양감(量感)은 한층 경이롭다. 까닭에 ‘겨울의 고요를 깨우는 꽃’ 매화를 직물 대상으로 확정하되 그것도 ‘견고히 빛나는 희디흰 미소’와의 대비(對比)로 “꽃잎 꽃잎에/매우 여리게/향내 눕혀 놓고서/우아하게 부르는/한 소절/소리 없는 노래.(푸른 매화)”로 빚어낸 시적 해법도 그렇거니와 꽃말이 ‘비밀스러운 사랑의 상징’인 해당화의 매혹 앞에서 “밤이슬에 담뿍 젖어도/파도 소리 너무 깊어/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네.(해당화)”라는 그 자신의 설렘은 황홀감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누구보다 ‘꽃의 언어’가 지대한 관심사(關心事)이기에 “가느다란 봄비 마시고/기어이 일어선 민들레/시냇물 소리 들리는 한낮/푸릇푸릇 초록 손들이 받쳐 든 꽃.(민들레 홀씨 되어)”도 ‘모두 감사할 일’이기에 그 자신의 여유로운 일상은 ‘미래가 자라는 모습 흐뭇하게 응시하며 마음에 새긴 꽃말의 뜻’ 헤아리며 ‘풀냄새 그윽한 들녘 낭랑한 바람 향한 가지런히 손 모은 기도이기를’ 소망하는 일이다.
또 한편 시 형식에서 다소 긴 호흡으로 형상화된 “어두운 느티나무 그루터기에 스러졌다./한걸음에 달려 건너던 다리 옆 코스모스 길/긴 긴 터널을 지나며 갈피를 잃었다./마음 두고 사람 떠나는 소멸의 풍경이었을까(접시꽃의 결석)”의 반문(反問) 앞에서 그 자신은 한평생을 교직에 몸담았기에 ‘창문은 하나같이 조금씩 열려있었던’ 그 아득한 기억의 정신풍경화에는 못내 비장감이 묻어있다. 짐짓 예술사회학자인 하우저(Arnold Hauser)가 "작가는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할지 모르나 자기 시대의 주인 노릇을 하려면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라고 언급하였듯 성숙된 개아(個我)의 당혹감은 수용되지 않기에, 시혼을 태우는 특정한 시인의 차별성을 점차 무화(無化)시키며 융합과 상승의 역동성을 좌우하는 그 행태는 매혹적이다.
2. 삶의 일상화와 맑은 영혼의 울림
모름지기 인식의 깨어남에 충실하여 감동의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관념의 일탈에서 “우리가 덧없이 흘려보낸 오늘은 앞서간 어제의 그들이 그렇게 소망하던 내일이었다.”라는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지적은 엄숙하다. 따라서 “시는 체험이다.”라는 마리아 릴케(Josef Maria Rilke)의 주장처럼 사유의 존재로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은, 생명 기표에 의한 영혼의 잔잔한 울림으로 시적 상상력을 작동시켜주는 이데아(idea)의 본질을 내포한 시어의 한계성은 서정적 미감에 응축되어 못내 빛난다.
일단 시집의 편집상 「Ⅱ부. 젊은 나무들」에서 가끔 흔들리는 차창 밖의 ‘자잘하게 부서지는 하늘빛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옥돌’로 느꺼움이 주어지기에 “옥돌이라 한들 갈고 닦지 않으면/이름 없는 잡석이나 다름없는 돌/진솔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청맹과니 눈이다.(하늘빛 나뭇결)”라는 체득한 삶의 잠언(箴言)도 유의미하지만, ‘사람 견주는 버릇 버리고 하늘빛에 담겨보라는 듯이’ 그렇게 “나뭇빛을 많이 품을수록 윤택해지는 나무 시간이 더해지고 흙의 은혜를 먹으며 몸은 굵어진다. 잎 사이로/하늘이 손짓한다.(나뭇잎 사이로)”라는 일면이나 다소 호흡이 긴 ‘빛을 많이 품을수록 윤택해지는 나무 시간이 더해지고 흙의 은혜를 먹으며 몸은 굵어진다.’라는 현상에 ‘기도하는 성자의 표징’인 나무에 곁들인 “보일까말까 언덕을 돌아가는 아카시아 흩날리는 꽃잎/그들의 꿈은 무리 지어 자라나 숲을 이루는 것(젊어지는 나무)”처럼 푸른 식물성 언어로 채색된 한 폭의 사생화는 못내 고요한 분위기(情調)다.
모처럼 <사시나무의 독백>의 일면도 그렇거니와 ‘그림자마저 불그레한 시간일지라도’ “잎 피는 계절을/화사한 깊고 푸름을/넉넉한 열매 시절을/풋것인 채 담고 싶어//숲길 열어/봄 노을을 기다립니다.(혼자 서있는 나무)”에서도 확증되듯 그 자신이 시적 기법의 일례로 종결어미 ‘-었네’와 ‘-렸네’를 반복적으로 작동시켜 “야생성을 잃은 꽃들이 편을 가르는데 경건한 척 검은 피부를 가진 꽃들은 우아하게 웃으려 애쓰며 다른 쪽으로 파닥이는 꽃잎 날림에 단물 빠진 비난을 날렸네.(검은 벚나무)”라는 모호함은 ‘경포대 가는 길가에 해돋이가 출타하여 검은 벚꽃 잎들을 까마득히 뿌렸네.’라는 시적 변명은 조락(凋落) 뒤의 그 허망함이다.
특히 그 자신이 ‘뒤꼍에 발 구르며 흐르는 물소리 가져와 빛나는 정황’에 비춰 “흘렀으므로 거세게 떨어지고/머리로 내는 소리의 공명으로/새벽의 피부를 두드린다.(새벽 물소리)”의 일면도 그렇거니와 ‘하루 종일 바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음에는 불현듯 보이는 시점’에서 “수억만 년 지났으면 또 어떤가./파도 바라보며 멍한 오늘 그냥 좋지 않은가.(바다의 눈짓)”라며 그렇게 반복되는 물음의 시적 감응(感應)은 이처럼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까닭에 ‘간간이 불어주는 실바람이 접어주는 물 주름 머문, 거기’를 아우르는 <경포습지에서> “말인즉/가시연 탓이라지만/그 그늘/날카로운 가시 있어/떼를 지은 어리연꽃/키 얕은 미소 때문일 터.”를 식별하지 않더라도 ‘어림짐작 갸웃거림의 바스러진 세월’을 빗껴가다가 끝내 “냇물 따라 사라진 곳 어디였는지/거부의 몸짓도 못 남기고 스러졌는지/고사목처럼 삭아버린 한(恨) 아득하였다.(느릅나무 냇가)”라는 그날의 감회는 눈물겹다.
또 한편 ‘마른 잎 구르듯 고요 부르는 몸짓 고무신 끄는 소리’에 잇닿은 그 자신의 시적 형상화는 “동자스님에서/행자스님으로/노스님까지 섬긴/발의 발원이여.(하얀 고무신)”를 통해서 확증되는 의미망도 그렇거니와 ‘가진 것 없어 마음이 비어있는 사람’의 <가벼운 사람>의 시적 통로는 마침내 “꽃바람 일어나는 벌판/깊이 팔수록 서술이 진부하다.//대본에서 밀려난 내 물결/땅 멀미하며 구겨져 낡아간다.(느린 편지)”에서 지상에 갈 앉은 낮은 음조(音調)로 시적 정감을 못내 일깨워줄 것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다음의 시편 <빨랫줄>이나 <마음 깊은 이>에서 새삼 유추되는 바라면 시의 큰 틀 짜기와 맞물린 그 자신의 시편을 통해 현실적으로 이 땅에 창조한 소중한 생명체는 바로 ‘서로에게 빛을 나눠주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꿈을 상실한 소외된 타자에게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시상을 응축시켜 놓은 그 존재감은 생명의 은총으로 읊어낸 눈부심이다. 따라서 진정한 그 자신의 지나온 삶에 있어 감회(感懷)의 서술이라면 프란시스코(Franciscus) 교황의 “살아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라는 일깨움에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별개일 수 없다. 한편 “어미의 가슴가리개를 찌그러뜨린 딸의 빨간 브래지어//바람에 맡겨두었던 얼굴들 가볍게 말랐다.(빨랫줄)”의 보기나 “갯바위에 부딪혀 산산 조각난/꿈을 꿰어맞추느라/물보라는 그리도 애써 형형색색 되었던가.(마음 깊은 이)”라는 물음 앞에서 시적 의미망을 가늠할 바다.
혹여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정신작업에 종사하는 그 자신이 ‘어쩌다 그냥 지나칠 때가 있어 이날만은 하늘 귀퉁이에 매어두기로 했을지라도’ “오월에 씨 뿌려/오월에 피어난 것처럼/오월 어느 날은 나를 품어 길렀다.(오월 어느 날)”에서 시적 감응(感應)을 체득할지라도, 또 그렇게 ‘오뉴월 서리가 내렸을까? 손이 차가운 정황’도 때로는 감내할 일이지만, 그 자신의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침묵하는 아픔>에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차가움, 차가운 떨림이/데리고 온 흐느낌을 버린, 버려진 작은 소리를/삼켜버린, 고요의 살결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에서 비교적 호흡이 단조로워 메르헨(Märchen)적인 분위기를 회화로 그려내는 “열린 귀엔/새소리 청아하고/가슴 여니/아침이 들어와/창을 연다.(아침에)”는 신선한 충동이다. 까닭에 ‘새들은 발자국을 쪼며 부리를 경쾌하게 닦는’ 그 같은 현상 뒤 “박새가 앉은 자리에는 박새 발자국/삐비새 앉은 자리에는 삐비 삐이빗/바람이 다가와 지워보지만/또렷이 남은 흔적(작은 새)”의 일면에서 맑은 음조(音調)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처럼 어지럼증으로 변주되기에 묵언으로 지켜볼 점이다. 이같이 따뜻한 영성과 엄숙한 생명감을 그 자신의 시편에 견주어 심층적으로 분할․통합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산정(山頂)을 오르는 서정성의 동일화 현상은 새삼 차별성을 지니기에 이채롭다.
또 한편 뒤돌아보면 지나쳐온 ‘어렵고 추워 하소연조차 힘들었던 시절’이어도 “보릿고개를 기어서 넘을지라도 버틴 건/조밥나물 망초 달맞이꽃 쑥부쟁이 능쟁이/순전히 봄나물 덕이었다 말하면/건망증이 심해 하얀 요즘 사람들 떼쓰듯/거짓말에 투표지가 과반은 더 몰릴 텐데(쑥버무리)”라는 아쉬움에도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던 그 다감한 정경(情景)이 지워지지 않는 문신(文身)처럼 기억에 또렷하다. 이같이 삶의 일상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순한 모성의 위대한 사랑과 지극한 희생을 헤아릴 따름이다. 까닭에 자잘한 직물 대상에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한 오라기 끈」처럼 증오심이 생명 세포를 죽이는 현상을 그 자신은 식별하고 있기에 ‘존재의 뿌리인 가정’에 대한 기대감은 공감대의 맞물림으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의 궤’를 함께하는 끝내 ‘감동의 느낌표!’다.
특히 창조적 행위의 등가물(等價物)로 제시된 ‘꽃과 별, 그리고 열매’는 자연 본래의 의미이며 질료(質料)인 까닭에 지상의 꽃은 울음을 동반하고 승화하여 천상의 별과 끝내 시(詩)가 된다. 한편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 또한 자연 친화적인 바탕 위에 뿌리를 내려 지극히 천상의 영성과도 접맥된다. 바로 그것은 삶에 대한 진지하고 절박한 소망으로 한순간 끝남이 아닌 지난(至難)한 몸부림이다.
3. 감동의 느낌표와 산정의 만보(漫步)
여기서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생명력을 지닌 창조적인 작품을 가지고 응당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기에’ 심리학에서 ‘감사(gratitude)’도 능력의 개인차와 결부되고 있음은 유념할 바다. 차제에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비정한 시간대에서 점차 효(孝) 문화가 퇴색되어 부모에 대한 무관심의 보편화는 실로 안쓰럽다. 비록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인을 데폰타니(Depontani)라 지칭했는데 ‘다리에서 떠민다.’라는 의미로 부양에 지쳐 그 자신의 부모를 다리에서 떠밀어 익사시켰던 폐습과 연관성을 지니기에 시적 상상의 자유로운 교감을 거쳐 빚어낸 그 자신의 시편은 안식할 처소가 없어 방황하는 상처 입은 영혼에 ‘존재의 뿌리’인 가정을 통해 신선한 감동 또한 안겨줄 일이다.
이같이 최승학 시인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중량감 있게 형상화하였듯 호흡하는 삶의 공간에서 ‘모성(母性)이나 모국어에 관한 느낌과 공감’은 응당 집념의 징표인 공의를 밝히는 불(燈)이며, 푸른 생명의 기표이다. 무엇보다「Ⅵ. 몽혼에서 깨어나」에 수록된 시편 중 ‘봄꽃들 차례 지키기에 실패하고 모두 흙으로 돌아갔을지라도’ “담쟁이는 붉으락푸르락 오르내리다 외진 데 쌓이고/생강나무 잎은 한 곳에 지고 싶어도 흩어지는데/마로니에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순서)”의 양상은 시적 해법의 당위성이다. 차제에 ‘쉰에 들어서면서 걷는 걸음 수만큼, 예순을 맞아서 걷는 거리만큼 목숨 부지가 길어진다는 유언비어를 확신하는’ 연유로, “깡창대는 종아리의 날렵한 뜀질 바라보며,/앞서가는 젊은 넓적다리 힘찬 발 디딤 부러워/이렇게라도 몸놀림에 골몰하여 삐끗삐끗 어긋나지 않음에 마음을 놓고는(귀가 얇아져서)”을 통해 확증됨도 그렇지만 이채롭게도 다음 인용하는 기승전결(起承轉結) 4단 구조의 시편인 <몽혼(曚昏)>에서 긴장감이 응축된 그만의 존재감은 눈부심이다.
캄캄한 세계 들어가기 전
머릿속은 소독 솜 짜듯 비운다.
하늘의 하얀 별들이 들앉게
··········· 멍하니
-<몽혼(曚昏)> 전문
모름지기 그 자신의 필명인 ‘월대산인(月臺山人)’과 연계 층위인 담백한 시격(詩格)의 시편에서 ‘흘러가는 삶에 대한 미련 버렸으니 산꼭대기는 쳐다보지 말자.’를 가늠하면서도 “그늘진 진흙탕에 허덕였으며/마음 아파 죽고 싶었다가도/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다리 힘 하나로/무작정 돌아왔다.(월대산 기슭에게)”라는 일면의 막연한 기대감은 ‘월대산 나무들 싱그러운 몸 그리워 여태 푸르지 못할지라도’ 삶의 황혼 녘을 만보(漫步)하는 ‘느림의 미학’으로 울컥 나직한 통곡(痛哭)을 토해낸다.
특히 시집의 표제 시격(詩格)에 잇닿은 <가갸 노래>는 그 자신의 <시작 노트>에서 서술하였듯 “이 노래는 엄밀하게 밝히면 나의 작품이 아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노래 아닌 소리다. 제목도 본래 없었는데 ‘가갸 노래’라 임의로 필자가 붙인 것이다. 한글을 배우기 위해 민간에서 사용된 방법 가운데 한 예로 생각된다. ‘가’자는 밖에 한 점을 붙인다는 뜻이고, ‘거’자는 안쪽에 한 점을 붙인다는 것이고, ‘고’자는 위로 한 점을 찍으라는 의미이며, ‘구’자는 발 쪽으로 즉, 아래쪽으로 한 점을 붙인다는 뜻이다.”라는 그 식별력은 아름다운 삶의 지혜요, 교시(敎示)에 해당한다.
가자는 밖에 한 점/갸자는 밖에 두 점/
거자는 안에 한 점/겨자는 안에 두 점/
고자는 위에 한 점/교자는 위에 두 점/
구자는 발로 한 점/규자는 발로 두 점/
그자는 가로 긋고/기자는 내려 그었네라./
-<가갸 노래> 전문
그렇다. 빈자(貧者)의 성녀인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of Calcutta)나 오늘도 지구촌의 고통받는 타자를 위해 가스펠 송을 부르는 스웨덴의 레나 마리아(Lena Maria)처럼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베풀며 밝은 미소로 일관했던 모친에 대한 회감(懷感)은 아득한 담채색의 정신풍경화로 확대되어 때로는 와락 억장이 내려앉기에 ‘다 부르지 못한 사모곡의 아쉬움’엔 오늘도 <가갸 노래>로 끝내 다정다감이다.
결론적으로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오랜 날 평자의 지론처럼 ‘삶의 지혜와 수분(守分)의 시학’에 스스럼없이 충직하며 지상에 갈 앉은 나직한 음조로 항상 자애로운 모친의 심성을 순은(純銀)이 빛나는 아침 창가에서 비록 서툰 음조로 <가갸 노래>의 시첩(詩帖)에 담아내어 밤하늘의 성좌로 빚어낸 그 이미지의 형상화는 존재감의 빛남이다. 까닭에 깊은 사유를 걸쳐 빚어진 그만의 시편에서 소박한 삶의 통찰이 예감될뿐더러 응축된 시 의미의 감수성은 더없이 느껍다. 따라서 푸른 식물성 언어로 빚어낸 나뭇가지에 ‘물오르는 소리며 새싹 트는 떡잎의 기지개, 그리고 목숨 가진 것의 경건한 자리매김에 신선한 감동의 울림 폭은 지대하다. 모쪼록 따뜻한 감성과 자존감이 올곧은 최승학 시인은 지극히 인간적인 심성의 일념(一念)에 이끌려 애증(愛憎)을 끊어버리지 못할지라도 평자의 각별한 기대감은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엄숙한 역사적 소임의 명백한 수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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