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소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발자취를 찾아서―
짙은 회색빛 하늘 아래 파랗게 펼쳐진 바다.
엔도 슈사쿠 문학비는 일본 나가사키 시츠(出津) 해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파랗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비문은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는 그분에 대한 작가 엔도의 푸념이었을까. 그가 앉았음직한 바위에 걸터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침묵>의 주인공들이 하나둘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로도리코 신부와 그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 배교를 회유하는 이노우에, 인자(仁慈)의 길을 설파하는 세이쇼오지 (西勝寺)의 노스님, 교활한 배교자 기치지로….
420여 년 전, 일본의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학살과 고문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참수형은 물론이고 결박한 채 바다에 수장시키는가 하면, 바다 가장자리 목책에다 묶어두고 밀물 썰물에 시달리며 시나브로 말라 죽게 했다. 또한 깊은 구덩이 위에 통돼지 바비큐 하듯 거꾸로 매단 후 귀 뒤쪽에 구멍을 뚫어 조금씩 핏방울을 흘리게 함으로써 서서히 죽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가려내는 방법으로는 밀고를 받은 자나 의심쩍다 싶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예수나 마리아의 초상이 새겨진 성화(聖畵) 널쪽을 밟게 하는 ‘후미에(踏繪)’가 사용되었다. 눈속임으로 밟는다 싶으면 다시 불러 세워 성화에다 침을 뱉고 욕을 하게 했다. 신심이 깊은 사람은 차마 그 짓까지는 하지 못해 목숨을 잃었지만, 약삭빠른 자들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침을 뱉고 “마리아는 몸을 파는 창녀였다!” 외치고 무사히 빠져나갔다.
저자 엔도는 ‘후미에’ 과정을 통해 가려진 순교자와 배교자의 고통과 번민을 함께 다루면서도 무게중심은 순교자 쪽이 아닌 배교자 쪽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따라 열 살 때 마지못해 입교한 기독교가 ‘잘 맞지 않는 양복’ 같았지만, 벗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자신의 어정쩡한 실존적 모습을 배교자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라 토로했다. 그가 몸에 맞지 않는 양복처럼 느꼈다면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지옥과 천당처럼 이분법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당시 포르투갈 외방 선교회의 교리 탓이 아니었을까. 또한 다른 종교를 우상숭배로 몰아붙이는 선교회의 지독한 배타주의가 더욱 마뜩잖았을지도 모른다.
세이쇼오지의 노스님은 배교자 페레이라 신부를 향해 조용조용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인자의 길이란 필경 자아를 버리는 것, 자아란 쓸데없이 종파에만 사로잡힌 것을 말한 것이오. 사람들을 위해 힘을 다함은 부처의 길도 그리스도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중요한 건 그 길을 가느냐 않느냐 요.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한 지점으로 가는 여러 갈래 길인 셈이요. 목적지가 같은 한,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가려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배타적인 종교에 대한 점잖은 타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엔도는 가톨릭 신자지만 가톨릭에만 머물지 않고, 우주 전체를 총체적 신의 사랑으로 감싸보려는 휴머니스트였을지도 모른다.
《침묵》에는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같은 기치지로 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겁쟁이에다 교활하기까지 했으며 형과 누이가 성화 밟기를 거부하는데도 혼자 성화를 밟고 도망쳤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따르던 로도리코 신부마저 관아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저자는 그에게 배교자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준다. “제가 좋아서 성화를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밟는 내 발도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시고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훗날 엔도는 “기치지로는 제 모습입니다. 그의 약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나는 기치지로를 사랑하면서 그 인물을 묘사했습니다.”라 고백했다.
저자는 일본에 머무른 지 33년, 교구장이라는 최고의 직위에서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에게도 해명의 기회를 준다. “내가 배교한 것은 신자들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드렸지만, 그분께서는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침묵》 최고의 감동은 로도리코 신부의 배교 장면일 것이다. 망설이는 로도리코 신부의 회유를 위해 이노우에는 그의 스승이며 먼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불러온다. 로도리코 신부를 질책하는 페레이라 신부. “구덩이 속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저 농부들의 신음이 들리지 않는가? 그대가 배교하면 저 사람들은 구덩이 속에서 끌어올려져 목숨을 구한다. 성직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고 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곳에 계신다면, 분명히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더라도.”
로도리코 신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성스럽고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주님의 얼굴 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순간,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 “밟아도 좋다. 밟는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어서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로도리코의 배교 장면을 통해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밟아도 좋다’는 주님의 음성을 환청으로 들으면서 비몽사몽간에 성화를 밟고 배교자가 된 로도리코 신부, 본국의 선교회를 향해 항변을 쏟아낸다. “나는 선교회에서 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부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성직자들로부터는 부끄러운 오점처럼 간주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의 마음을 재판하는 것은 당신들이 아니고 오로지 주님뿐이다. 나는 당신들을 배반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로도리코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가 420여 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해 근래 서울 하늘에 메아리쳤다면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달막한 키에 둥글넓적 선한 얼굴, 큰 눈에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늘 미소를 잃지 않던 K 신부, 그는 ‘꾸르실료’라는 신자 재교육프로그램의 지도신부로서 3박 4일 동안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다. 얼마 후 그가 어느 장애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신자들에게 월부책을 판다는 사실이었다.
성직을 버리고 결혼함은 곧바로 배교자로 치부되는 풍토에서 그가 신자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존경의 대상에서 하루아침에 박대의 대상이 되고 만 K 신부. “내가 당신들을 배반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라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첫댓글 회장님 작품인가요? 작가를 따로 명시 안 하셔서 그런가 싶습니다.
이해되고 공감 가는 글입니다.
여, 제 글입니다.
번번히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