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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구 엄창섭 시인]
신앙고백이 승화된 성찰과 숭고한 공리성 제시
(심은섭 | 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
1. 프롤로그
일찍이 옥타비오 파스는『활과 리라』에서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는 기도이며 탄원(歎願)이고 현현(顯現)이며 현존(現存)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시는 기도이다. 그러나 천의 얼굴을 가지기도 한다. 다수의 시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 시인에 따라 제 각각 모두 다르다는 것이 파악된다. 그것은 시인의 성격적 요소와 사유의 방법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순수서정을 노래하는가 하면, 어떤 시인은 지상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소외와 물질적 외소성(外所性)의 문제에 대해서, 또한 영악한 부조리와 모순된 제도를 비판하는 ‘실천적 타성태(惰性態)’의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또한 자아의 발견이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하나의 대상(세계)에 대해 온몸을 던져 천착하는 시적 태도를 보이는 시인도 있다. 가령 중국 당나라 때 시성(詩聖)이라고 일컫는 두보와 함께 서정시의 최고봉이었던 시선(詩仙) 이태백은 시적 대상을 ‘달’과 ‘술’에 대해 집착하며 시를 썼다. 그러한 나머지 채석강에서 술을 마시고 물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일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달은 이태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시적 대상물이다.
특히 우리나라 문단에서도 ‘반성’이라는 시로 등단하여 지금까지 ‘반성’과 관련된 주제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1000편 넘는 연시(聯詩)로 ‘반성’에 천착하는 특별한 시인도 있다. 그 반성을 통해 세상의 허위와 기만에 대응하기도 하며, 뒤틀림과 외설, 자조, 야유, 탄식 등을 통해 자아 성찰을 위한 노력의 시적 미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어떠한 시류가 찾아와도 미동의 흔들림도 없이 순수서정시만을 지향하는가 하면, 교시적 내용으로 도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의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시적 태도로 삼는 참여의식의 시인도 있다. 이렇게 어떤 분야이든 한 부분을 관통하려는 의지로 시를 쓰는 시인은 확고한 자기만의 시 세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 우리 또한 그 시 정신을 높이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술의 하위범주에 예속된 시라는 문학의 장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가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나름으로 자신의 위상을 과장하여 드러내기를 절제하며, 평인의 사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엄창섭 시인의 시 세계에서도 절대 신앙의 고백이 발견된다. 1977년 문예지『시문학』에서「새벽에 출범」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80년『바다와 해』(시문학사)라는 첫 시집을 출판한 이후 2011년 시선집『사고 가능성』(모던포엠)을 출판하기까지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시를 써왔다.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신앙시가 아니라 절대적 신앙을 고백하는 참회록과 같은 맥락의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이같이 43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기록한 많은 시집과 함께 문학과 관련된 저서를 다수 출간했다.
이 글에서는 평자 그 나름으로 오랫동안 폭넓고 다양한 문단 활동을 해온 엄창섭 시인의 대표작 몇 편을 선정하여 강한 감정의 자생적 분출과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빚어낸 작품을 분석하여 그 자신이 일관성을 지니고 수행해왔던 진정한 신앙고백의 원천이 무엇이며, 그런 이유로 종교적 의식에 천착해온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할 때, 그동안 스스로 진흙 속에 묻어 두었던 엄창섭 시인의 ‘작가개성’과 ‘작가 풍격(風格)’의 동일성 발견이라는 결과물 또한 이 세상에 겨우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임을 감히 말해두고자 한다.
2. 교의(敎義)와 찬송(讚頌)의 신앙고백
모름지기 엄창섭 시인의 시 세계를 두 방향으로 대별 분리하여 결정 지을 수 있다. 먼저 신성지향(神性志向)이나 신앙고백, 즉 종교성에 시선이 집중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성찰이며, 소명이며, 양심이며, 소망 등이 시 세계의 결정체이다. 그는 영원(永遠)과 시한(時限)을 구별하지 않으며 자기 고백을 노래했다. 또한 그는 법률과 제도로써 의문과 번뇌의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철저한 자기 반성적인 신앙고백, 그리고 엄숙한 자기검열로 성경의 행간을 걸었고, 굳게 닫힌 교회의 문을 주의 기도문을 외며 두드렸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듯이 엄창섭 시인이 바라보는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동시에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의 체험과 정서, 참회, 성찰을 어떻게 생명적으로 시의 본질에 불어 넣어, 그것을 바탕으로 시의 생명적인 창조 속에 신앙화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가를 더없이 고뇌(苦惱)할 따름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감동의 느낌표로
영원의 순백한 자에게 은총 허락하시고
피멍 들어 터진 손 잡아주는 크신 이
한순간 병상의 열 오른 이마와
세세한 숨결로 떨고 있는 심장.
피곤한 우리네 목숨의 비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부탁하나이다.’
통한의 절규 뒤 골고다의 산정山頂은
짙은 흑암과 미망迷妄에 잠겨
까마귀의 비행도 어지러웠지.
‘가시관⇢얼굴⇢두 팔⇢옆구리⇢다리’
찢긴 육체의 부위와 형틀을 타고 내리는
꽃처럼 붉은 피의 강물은 선명한데
참담한 실어증의 비릿한 내음.
-「눈부신 은총의 비늘」 일부
위에서 인용시의 「눈부신 은총의 비늘」에서 지고한 신앙의 향기와 신앙인의 면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가장 가시적으로 다가와 우리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부분이 ‘내 영혼을 당신에게 부탁하나이다.’와 같은 것이다. 이 시행은 ‘피곤한 우리네 목숨의 비늘’이라는 인간 본질의 불안함과 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같은 처연함이다. 이 처연함은 엄창섭 시인의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처연(悽然)함에 비장감이 묻어날 따름이다. 따라서 그 자신은 개인적인 인간 본질의 불안함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비전이며 음악이며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인류를 위해 기도한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 시 의식으로 수용된다. 이처럼 ‘통한의 절규 뒤 골고다의 산정山頂은/짙은 흑암과 미망迷妄에 잠겨’ 있다. 그런 탓에 ‘찢긴 육체의 부위와 형틀을 타고 내리는 /꽃처럼 붉은 피의 강물은 선명’하고 ‘참담한 실어증의 비릿한 내음’이 가득하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는 일상에서 신을 접하는 감동의 느낌표(!)로 믿음과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이 순백한 자에게 은총 허락하시고/피멍 들어 터진 손 잡아주는 크신 이’가 계신다는 굳건한 신념과 절대인 신앙이 시의식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닭에 시인의 절대적인 신앙의 참다운 모습은 하루 이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혹은 신앙인의 조건 없는 비근한 욕구와 절실한 비원의 실체가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거나 그런 것들이 오랫동안 끈질기게 이어져 올 때, 그리고 내면화가 중심을 이룰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엄창섭 시인의 인류에 대한 절망이 궁극적 절망이 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삶의 오류를 통하여 느끼는 비탄의 탄식이나 자신의 삶을 사르게 될 고난의 불꽃, 어떤 치욕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고백과 결코 다름이 아니다.
또 한편 그 자신이 드러내는 시적 사유 속의 기도를 특별히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거나 목숨 보존에는 급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자신의 운명을 확장하려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고난과 부정의 상황 속에서도 오직 절대자의 섭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의지만을 보여준다. 그 한 예가 바로「눈부신 은총의 비늘」에서 신앙인으로서 절대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령, ‘세마포 올올이 풀리는 손길에/천근 무게로 잠긴 돌무덤 열려/새 언약으로 빛나는 천상을 향해/하얗게 비상하는 비둘기의 깃털과/새벽강물에 풀어지는 충만한 생명감’(「눈부신 은총의 비늘」 4연)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즉 부활의 영원성 추구다. 그것은 절대자의 부활이 엄창섭 시인에게 ‘황금 종소리’로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엄창섭 시인은 고독하면서도 고독을 외면한다. 세상 밖의 어지러운 종소리에 현혹되거나 슬픈 일에 슬퍼하지도 않는다. 죽음의 강을 건너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간특한 무리들이 간특한 노래로 푸른 영혼을 흔들어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요寂寥로 장식된 산촌의 회당/못내 구원의 십자가 응시’하고 ‘감동의 눈물에 젖는 막달레나의 눈’이며, ‘열린 무덤 돌문에 총총 돋아나는/푸른 목숨의 빛, 부활의 황금 종소리’(「눈부신 은총의 비늘」 5연)가 들려오고 있다는 믿음이 앞서는 탓이다. 모름지기 러시아의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Turgenev, Ivan Sergeevich)는 “시는 신의 목소리다”라고 시를 정의했다. 투르게네프가 정의한 시의 특성을 어느 누구보다 완전하게, 올곧게 이행하는 시인이 엄창섭 시인이다. 한 줄 한 줄의 시행이 모두 기도문이며 복음이다. 다음의 시에서도 그의 절대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올의 바람도 호흡 정지한
그 정적의 갈보리 산상,
인류구원의 역사라지만
가시관 쓰고 형틀에 못 박힌
처절한 주님의 형상은
참아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한낮의 섬섬한 햇살 속
증오의 독기 묻은 채찍에
깊게 파인 살점의 부위마다
선지 빛 피의 꽃 눈부신데,
타는 목마름 뒤의
축 늘어진 육신 피범벅이다
-「눈물」 1연, 2연
‘아버지도 우셨서요’라는 부제가 달린 위의「눈물」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의 참혹한 실상을 언어로 회화화(繪畵化)한 것이다. 한 폭의 성화(聖畫)를 보는 듯한 실체감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나타내며, 또한 매우 강렬한 시적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타는 목마름 뒤의/축 늘어진 육신 피범벅’은 당시의 상황을 시각적 이미지로 생생하게 환기하고 있다. 이것은 엄창섭 시인이 절대자에게 보여주는 빈틈없는 신뢰이며 무한의 애정이다. 이런 작품을 접하면서 생각되는 것은 엄창섭 시인이 시인에 앞서 깊은 신앙심으로 무장된 기독교인의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시적 화자, 즉 엄창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인류 보편적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라는 반어적 아우성이다. 이것은 삶의 현실에서 스스로 참모습을 지탱해 왔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한 편의 시「눈물」로 성찰하고 있다. ‘혼돈과 통곡 뒤의 온전한 평온’이라는 표현에서 인류구원의 방법이 오직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눈물」에서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은 ‘나’의 ‘희생’이 ‘타인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평범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렇게 오랜 날 엄창섭 시인이 오랜 고뇌 끝에 내린 결정은 「눈물」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파멸과 절망의 연속이 아니라 고난과 치욕의 상황 속에서도 섭리는 결단코 멈추지 않으며, 부활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두레박을 내려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우물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신앙심이 아니면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는 외유내강의 기도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어찌해서 나를 버리셨나요?’
-「눈물」 3연
위의 시구는 「눈물」의 3연 1행에서 인용한 시구다. 이 대화는 예수그리스도가 절대자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적 화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쭙는 중의적 성격을 띤 기도문이다. ‘가시관 쓰고 형틀에 못 박힌/처절한 주님의 형상은/참아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인 것으로, 이것 곧 ‘자기 구원’으로 ‘나의 아버지, 어찌해서 나를 버리셨나요?’라며 절규하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의 고통이 곧 엄창섭 시인 개인의 고통이며, 예수그리스도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죄악을 용서하고 기억하지 아니하며/항상 깊은 영혼의 상처 치유하는/크고 부드러운 손 하나 있어/저토록 세상은 아름다울 뿐이다’(「눈물」 4연)라는 기도로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한없이 보여주며, 확고한 재림의 의지를 「눈물」을 통해 설파하고 있다.
까닭에 엄창섭 시인의 문학(시)의 모든 완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비롯된다. 온갖 고뇌의 불꽃도, 방황의 탄식도, 끝없이 확장되는 절망의 완성도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놀라게도 성장하고 소멸한다. 특히 자신의 개인적인 신상을 위로하고 갈구하는 기원의 시는 쓰지 않는다.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신에게 의탁하거나 소원하지도 않는다. 소리가 없는 기도로, 소리가 나지 않는 시로, 타인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모든 신앙심을 소비한다. 그 까닭을 “피곤한 우리네 목숨의 비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부탁하나이다’”라는 기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시「생명의 나무」 4연에서도 같은 맥락의 근거가 제시된다. 이를테면 ‘저토록 가난한 이웃의 거친 손/잡아주는 일상적인 삶은,/받은 것 허락한 그분께 돌려주는 일/임만을 명증하는 오늘의 신앙’이라는 부분을 일례로 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모처럼 절대자에 대한 지극한 신뢰는 지속되는 것이리라. 따라서 그 자신의 엄창섭 시편인「생명의 나무」에서 절대자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다음의 작품을 보면 이해의 폭이 가중되리라 예감(豫感)이 된다.
기억하고 순종하라 엘리사의 말 쫓아
요단강에 몸 씻는 낮아짐이
생명의 나무에 진리의 꽃 피우나니.
뉘우침의 눈물로 절절한 기도드릴 때
목숨 빚어준 만군의 주님은,
닫혀 있는 문밖의 서성임 아닌
활짝 열고 들어가는 축복 허락하리라.
-「생명의 나무」 3연
한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정서적 강렬성을 자신의 정신 내부로 투사(投射, projection)하여 신앙심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특히 ‘닫혀 있는 문밖의 서성임 아닌/활짝 열고 들어가는 축복 허락하리라.’라는 희망과 자기반성으로 ‘뉘우침의 눈물로 절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엄창섭 시인의 시세계는 결국 인류구원이라는 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에서 논의했던 「눈물」이 절대자의 희생을 노래하고, 그 희생을 안타까워했던 시작품이라면 「눈부신 은총의 비늘」은 일상적인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고통에 대한 구원의 형식이며, 「생명의 나무」는 사후의 세계를 기원하는 노래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위의 인용시에서 사용된 ‘요단강’은 신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건너는 강이다. 상징적으로 가나안이 천국을 표상함으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사후에 하느님의 나라, 즉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나무」에서 사후의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시라는 점은 바로 ‘요단강’과 ‘문밖’이라는 두 시어에서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요단강은 죽음의 이후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이미 밝힌 바가 있으며, ‘문밖’은 천국 바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밖’의 엄창섭 시인은 지금 나의 위치가 ‘문밖’이지만 절대자가 분명히 ‘축복 허락하리라’라는 확신은 못내 유념할 점이다.
이처럼 모두가 주지하듯이 천국은 누구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절대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타적(利他的)인 기도를 생활화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가 천국의 문을 들어서는 것에 대해 절대자가 축복해 줄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엄창섭 시인의 삶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삶의 흔적은 곧 한 편의 시다. 시 속엔 삶의 양식과 삶의 내용과 삶의 깊이와 넓이가 모두 들어 있다. 뷔퐁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고 했듯이 엄창섭 시인의 시 한 편 한편은 곧 그의 올곧은 삶이다. 요컨대 ‘삶=시’라는 등가를 가지며, ‘삶=신앙’이라는 맥락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3. 느림의 미학에서 찾은 대자(對自)적 삶
모름지기 ‘교의(敎義)와 찬송(讚頌)의 신앙고백’이라는 소주제에서 논의 된 사항은 엄창섭 시인의 참다운 신앙적 모습의 발견이었다면 이 장(章)에서는 또 다른 측면의 삶의 무늬를 찾아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엄창섭 시인의 ‘느림의 미학에서 찾은 대자(對自)적 삶’이란 신앙인으로서 참다운 삶의 양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엄정하리만큼 이타적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바다와 해』(1980)에서부터 『땅에 쓴 장시』(1987), 『눈부신 약속』(1990), 『생명의 나무』(1991), 『골고다의 새』(1993), 『열매따기』(1994), 『신의 나라는 열매를 팔지 않아』(2004), 그리고 시선집 『사고 가능성』(2011)이라는 시집 및 시선집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어떤 시를 써왔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종교의식이 내재화된 작품들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종교적인 시 외의 작품들도 자연과 관련이 있거나 교훈적인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몇 편의 시를 선정하여 시적 경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연)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여명에
톰슨가젤이 잠에서 눈을 뜬다.
정글의 사자보다 더 빠르게
못 달리면 먹힌다는 것 예감하여
역풍 가르며 본능적으로 질주한다.
(2연)
새벽 푸른빛 일어서는 밀림에서
맹수의 제왕 사자가 깨어난다.
가젤보다 힘차게 역주하지 않으면
허기로 죽는 까닭 알고 있기에
온몸으로 해 뜨는 초원에서
가젤 앞지르는 야성을 발동한다.
(3연)
그대 또한 가젤이든, 사자이든
아침 해가 뜨기 전 삶의 처소에서
열중의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역풍 속에서도 질주의 끈 팽팽하게
삶의 업보業報라 늦출 수 없다.
-「삶의 교시(敎示)」 전문
공자가 시를 정의함에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말한 시의 정의가 엄창섭 시인의 두 번째 시 세계와 일맥상통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엄창섭 시인의 시 세계는 사악함이 없다. 오로지 자연에 순응하고 약자의 일면(一面에)서 그들을 대변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느림의 미학’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존중한다.
앞의 시는 「삶의 교시(敎示)」라는 시의 전문(全文)이다. 이 시작품 전체를 살펴보면 케냐, 탄자니아, 수단 등의 아프리카 동부지방에서 서식하는 초식 동물 톰슨가젤의 이야기이다. (1연)에서는 약자의 생존전략을 들려준다. 시적 화자는 ‘정글의 사자보다 더 빠르게/못 달리면 먹힌다는 것 예감’이 든다고 했다. 이 표현은 강렬한 부성애이며, 오랫동안 교단에서 생활해온 교육자라는 본능적 행동에서 나오는 염려와 관심이다. 이런 약자에 대한 배려는 엄창섭 시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그의 삶의 궤적이며, 좌우명이 화석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다. 2연에서는 1연과 대립되는 강자의 생존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 선다는 말이 있으나 대체로 우리가 몸담은 사회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라고 볼 때 「삶의 교시(敎示)」에서 던지는 메시지처럼 약자와 강자의 동반 생존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시적 발생이며, 그런 까닭에 ‘삶의 교시’라는 대의명분을 얻는 데 성공적이다. 또 1연과 2연에 비해 3연은 해체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선과 악, 약자와 강자의 대립적인 구도로 시적 전략을 구사하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를 해체하여 새로운 삶의 세계를 건설(construction)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흔히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비해 약자와 강자의 동시 생존전략을 제시하는 혜안은 엄창섭 시인의 종교적 신앙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의식된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선 시는 교육자이면서 도덕이고 계시이며 신앙이다. 이 같은 점이 화자 자신을 이타적 시인으로 바라보는 이유이며, 그를 진정한 풍격(風格)의 시인임을 말할 수 있는 연유이다.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조국의 참담한 현상 앞에서
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 당기는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도
억장은 내려앉고 뜨거운 눈물 울컥 솟아난다.
‘아들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환상을 보라’며 저토록 비통 속에서
세기의 강물을 깨우는 눈부신 음성,
무한의 자유공간을 향해
하얗게 비상을 시도하는 갈매기
불끈 치솟는 장엄한 태양
정녕 이 땅의 건강한 아침은 밝아오고.
-「어머니의 교훈」 3, 4연
위의 「어머니의 교훈」은 교훈시(敎訓詩)다. 이런 유(類)의 시들은 서구 문학의 전통에서 도덕적, 종교적, 처세적인 교훈이나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전달할 목적으로 쓴 시다. 또 교훈시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격언시(格言詩, gnomic poetry)가 있다. 그리스어 ‘그노메(gnome)는 ’도덕적 경구‘나 ’격언’을 뜻하는 말로 전통적 지혜와 도덕을 짧고 기억하기 쉬운 구절로 표현한 경구적인 시를 일컫는다.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는 한겨울의 두터운 솜옷보다 따뜻하다”라는 속담은 말의 순기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중상모략이나 독설은 역기능에 속하는 말이다. 송나라의 임포(林逋)는 ‘성심록(省心綠)’에서 말하기를 ‘이언상인자 이어도부 이술해인자 독어호랑(以言傷人者以於刀斧 以術害人者 毒於虎狼)’이라고 했다. 즉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칼이나 도끼보다 날카롭고, 술수로 남을 해치는 것은 호랑이나 승냥이보다 사납다’라고 했다. 이러한 명제들을 전제로「어머니의 교훈」을 살펴보면, 그것은 도덕적 경구로써 ‘그노메’와 같은 역할을 한다. 부연하자면 「어머니의 교훈」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겨울의 두터운 솜옷보다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뜻함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 우리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란 “‘아들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환상을 보라’며 저토록 비통 속에서/세기의 강물을 깨우는 눈부신 음성”은 어떤 따뜻함에 비길 데 없다. 「어머니의 교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들을 깨우치게 하는 경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가 설정한 ‘어머니’는 상징성을 갖는 것으로, 좀처럼 원관념을 드러내지 않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3연의 시행 중에서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조국의 참담한 현상 앞에서/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 당기는/어머니’라고 말했다. 이 어머니는 조국과 관련이 있으며,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엄창섭 시인은 신앙을 고백하되 개인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그의 시편 면면에 자리매김한 기도의 의미가 대부분 ‘개인’이 아닌 ‘전체’, 또는 ‘나’가 아닌 ‘우리’로 귀결된다. 즉 그 자신의 대부분 시편은 ‘나’와 ‘우리’가 만나는 장소이며, 형식과 본질이 동일하다. 따라서 「어머니의 교훈」은 우리의 자아 성찰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또 하나의 이례적인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채선의 풍광에 흔들리는 홍장의 긴 머릿결
깊은 밤, 어화는 금화처럼 반짝이고
어린 사임당 뛰놀던 북평촌의 낮은 산자락도
수련 꽃송이 꺾어 던지던 초희의 수줍음도
꿈결인 듯 초당취연草堂炊煙의 그 솔숲 위로
유년의 지연紙鳶처럼 바람꽃에 새가 된다.
-「강릉 수채화」 2연
일단 엄창섭 시인은 자신의 고향 강릉에 대해 투사(鬪士, fighter)적으로 사랑한다. 대관령 바람 소리이며, 온몸을 뒤척이며 밤새 흐르는 남대천 강물 소리이며, 화부산 벚꽃 지는 소리이며, 국적을 알 수 없는 철새들의 울음이며, 충혈된 눈으로 밤새 중천을 걷다가 끝내 서산을 넘지 못한 정오의 낮달이며, 칠성산 기슭에 핀 야생화 홀아비바람꽃 등, 어느 것 하나 시인 자신의 심중으로부터 떨쳐버리지 않는다. 전래되는 신화이든 전설이든, 고향 강릉에 서식하는 풀 한 포기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방증이라도 하듯이 「강릉 수채화」에서 사용된 시어 중에서 강릉 경포호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 ‘홍장’이나 강릉시 강문동 앞바다의 ‘어화’와 북평촌(지금의 지변동)에서 뛰놀던 ‘사임당’도, 조선시대의 비운의 여인 초당의 ‘허초희(난설헌)’ 등을 생각하는 시적 사유는 시인의 삶과 등가(等價)의 가치관을 가지며,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사의 투사 정신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일련(一連)의 시적 사유를 보여 오던 화자인 그 자신이 「강릉 수채화」 1연에서 ‘최후에 빛날 하슬라何瑟羅, 그 영광의 땅/품격 담백한 강릉인의 자존감은 훨훨 꿈의 날개’라고 강릉 사람으로서의 자기선언을 확고히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이 풀꽃의 목숨 살려내고’ 있다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최후에 빛날 하슬라’임을 세계에 선언한다. 이런 행위 또한 삼라만상에 대한 자기 고백이며, 실천의 의지를 표방한 확고한 다짐이며, 미래지향적인 시 의식을 보여준 대자적(對自的)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을 즉자적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자적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자연은 인간의 위에 있지도 않으면 또한 아래에 있지도 않다는 등가의 개념으로 시적 대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이 곧 총체임의 자인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인의 고향에 핀 야생화 꽃 한 송이라도 불평등관계를 해소하려는 시적 사유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으로 추대하여도 결코 무리는 아닌 듯하다. 그것은 객관적 시적 사유로 출생과 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언어의 고통을 감수하며 세계(대상)와 싸워온 날이 벌써 4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특히 엄창섭 시인은 고향에 대한 투사적인 애정을 통해 ‘유년의 지연紙鳶처럼 바람꽃에 새’를 세계화하고 있다. 그것도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에서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향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하여 실존을 본질에 앞세우며 사랑한다. 따라서 그 자신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존재인 동시에 만물의 불평등 관계를 해소하려고 애쓰는 존재이다.
지난밤 수줍어 시린 그 별빛은
등 뒤에서 흐느적이다 점멸하고
달리 풍風의 낮달은 우두커니
느림보의 산책에 유연한 감속이다.
맑고 상쾌한 공기 한결 가벼운데
갈대숲 잘잘 흔드는 자유로운 바람
눈물겹게 순백의 영혼 담아내는
작은 천국 소망하는 감동의 인자因子,
피에르 상소의 깊고 오랜 사유 닮은
눈부신 존재의 꽃, 느림의 미학이다.
- 「느림의 빛남과 감수성」 2연, 3연
얼핏 보아도 매우 추상적인 시다. 빠른 속도와 높은 생산성만을 강조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롭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의 의미를 전하는 시다. 비록 짧은 시작품이지만 다향(茶香), 문향(文香), 도향(都香)을 느끼게 하는 시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느림의 빛남과 감수성」은 프랑스의 저술가 피에르 상소(Porerre Sansot, 1928~2005)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이르기를 ‘나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으른 상태라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 선택’이라고 설파했다. 덧붙여 말하면 피에르 상소는 “느림의 미학”에서 행복은 빠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림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느림의 미학은 행복한 삶의 방식을 찾아주는 것이다.
모처럼 엄창섭 시인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낮달, 아침 해가 떠오른 뒤에도 유유자적하는 여유의 달, 그것에서 시인은 도태나 일탈이 아닌 '여유로움'이라는 내적 통찰과 맞닥뜨린다. 시인이 말하는 프랑스의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의 깊고 오랜 사유 닮은/눈부신 존재의 꽃, 느림의 미학’은 게으름과 권태를 즐김으로 인해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가치를 찾아낸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 풍風의 낮달은 우두커니/느림보의 산책에 유연한 감속’과 같이 음악에서도 쉼표가 없다면 아름다운 선율의 곡을 만들 수가 없다. 까닭에 ‘느림의 미학’은 그 자신의 상생과 통섭을 추구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생의 가치다.
특히 「느림의 빛남과 감수성」은 한국사회 저변에 깊숙이 갈려있는 ‘빨리빨리’라는 조급함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와 같다. 상대방에게 하루의 근황을 물으면 “오늘은 무척 바쁜 하루였다”라고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무척 여유로운 하루였다”고 말하는 한국인은 보기 드물다. 이러한 24시간 동안 여유를 갖지 못하고 생산성을 끌어 올리는데 급급한 현대인들에게 엄창섭 시인은 삶의 속도 조절의 필요성을 시를 통해 주문하고 있다. 이것 또한 시인 그 자신이 느림의 미학을 구사하면 산다는 즉자적 시적 사유가 아니라 인류의 모두에게 공익적인 염려로 미학적 정서를 환기하고 있음은 더없이 유념할 바다.
또 한편 ‘바쁨’의 대척점에 있는 ‘느림’의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느림이란 ‘나’의 삶을 조급하게 다루지 않고, 스스로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여심(女心)’ 또한 기다림이며, 이 기다림은 ‘느림의 미학’에서 온다. 얼마나 엄창섭 시인의 아름다운 사유인가? 이것은 평범한 삶 속에서 진리를 찾은 듯한 기쁨의 순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시세계는 의미의 세계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
4. 에필로그
일단 앞에서 시편을 인용하여 엄창섭 시인의 작품을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몇 편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적 창조에서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디까지나 한 편의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며 언어를 초월한 그 어떤 것이라는 점을 일러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의 특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 반성은 내향적 자기성찰로 이어지고, 다시 그 성찰은 절대자에게 신앙고백으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인의 성찰은 ‘너’와 ‘나’의 소통을 굳건하게 만든다. 기도란 신(神)과의 대화이며 영적인 만남이다. 엄창섭 시인에게 대화의 수단은 시라는 매개체였으며, 그런 까닭에 그를 향해 ‘시의 사제(司祭)’라고 칭함이 마땅하다. 까닭에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시의 사제로서 절대자에게 시의 성찬을 받치고 있다. 한편 그 자신의 시는 영혼이 지친 자에게 영생의 생명수가 되고 있다.
특히 이쯤에서 우리는 무엇이, 그리고 왜 엄창섭 시인을 “시의 사제로 부를 수 있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태생적 성품이 그 시작점이다. 고독하면서 고독을 말하지 않는 시인이며, 슬프면서도 슬픔을 말하지 않는 시인이다. 즉 인내로 점철된 시인이다. 어쩌면 가족력에 의한 유전자적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 나아가 꽃이 사람이며, 사람이 꽃이라고 말하고, 허공으로 흐르는 바람결을 ‘나’와 같은 동일화로 사유하는 시인이다. 달콤한 것은 달콤한 맛대로 받아들여 사랑하고, 쓴 것은 쓴맛대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인류 보편적 박애정신을 작품 속에 육화(肉化)하여 세계에 보급하는 시의 사제이다.
신앙에 대한 절대 순응은 그 자신의 삶의 토대이며, 과업이다. 곧 운명적 과업이 아니라 숙명적 과업이다. 그래서 그의 시 쓰기는 자아 성찰의 본질로 귀납되며,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신(神)의 관념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런 시작(詩作)행위는 자기 고유의 음역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거기에다가 모든 사물이 품고 있는 내적 비의(秘儀)를 투시하는 차분한 관조와 숭고한 종교의식이 반영된 시작(詩作) 태도로 사실성과 우회성을 적절하게 펼치는 형상성이 상상력의 수원(水源)이었다. 따라서 엄창섭 시인이 세계(대상)를 바라보는 통합적 시선은 주객 분리에 익숙한 현대인의 물신적 사고를 극복하게 만들고 채우기 위해 뼛속까지 비워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여는 소중한 시간을 깨닫게 했다.
두 번째로 그 자신의 시 세계는 교시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동질성을 갖는 등가의 미학적 개념을 펼쳐 보인다. 이 교시적 기능은 문학의 기능 중에 하나로써 공리성 혹은 유용성의 측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따라서 엄창섭 시인의 교훈성은 문학의 기능으로써 문학의 소비자들에게 공리성을 부여하고 인생관을 제시하는 그 역할의 충분성이 담보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첨언하면 그 자신의 시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의 목적으로 삼은 쾌락성이 교시성과 함께 겉으로는 즐거움을 주고 안으로는 가르침을 준다는 의미의 당의정설(糖衣錠設)을 가져다준다는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다. 여기서의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자극을 통해 얻어지는 쾌락이라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이처럼 정신적 쾌락을 주는 것이 예술이며, 이를 예술지상주의를 실천하는 시인이 곧 엄창섭 시인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체로 그 자신의 작품들이 단순히 교훈만을 준다는 결정론이 아니다. 이 교훈성을 통해 생의 진실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가치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또 한편 엄창섭 시인은 오랜 교단생활로 도덕이란 굴레로부터 이탈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은 각성을 요구하는 엄숙한 시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숙성된 정신만이 혜안의 시를 생산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결(結) 곱고 촘촘하게 천을 직조하는 장인정신의 일체감(一切感)이다. 모처럼 영성(靈性)의 소유자인 그 자신의 맑고 투명한 시 정신은, 늘 공익성(公益性)을 앞세웠으며, 대자적 입장에서 세계를 위로했다. 이토록 우리가 엄창섭 시인을 시의 사제로 보는 것은 공익성과 만물의 직위를 동일화하는 대자적 장인정신의 시인임에 그 존재감은 끝내 빛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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