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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버락 오바마 지음·노승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 920쪽 | 3만3000원
관저와 집무실을 잇는 ‘웨스트 콜로네이드’를 걷는 장면으로 책의 첫 장이 열린다.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백악관과 그 부지의 모든 방과 랜드마크 중에서 가장 좋아한 곳”이다. “걸음이 느린” 그가 “나를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목련이 높이 솟아” 있는 정원을 지나간다. 첫 장부터 오바마의 ‘필력’에 은근히 빠져든다. 저녁이 되면 집무를 마친 오바마가 아침에 왔던 길을 되짚어 퇴근한다. “흙과 풀과 꽃가루 내음이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백악관의 웅장한 위용, 지붕 높이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본다. 마침내 밤이 되자 장면은 전환된다. “나는 정치인 가문 출신이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두번째 장면이 열린다.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내가 물려받은 혈통적 유산”에 대한 언급들이 이어진다. 행간의 맥락으로 유추하건대, 어머니 앤 더넘(1942~1995, 인류학자)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리(어린 오바마의 애칭)가 학교에서 “딴 아이들과 함께 한 아이를 괴롭히자” “실망감에 입을 앙다문 어머니”가 아들에게 호통을 친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려고 남을 깔아뭉개다니!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이 질문은 오래도록 자신을 따라다녔다고 오바마는 고백한다. 어린 시절의 그는 “나를 혐오”했다. 그 반대급부는 대학 시절의 “사납고 엄숙한” 모습이었다. 파티에 얼씬도 않던 이 ‘헤비 스모커’에게 친구들은 “인상 좀 펴고 살라”고 핀잔을 줬다. 지금도 지니고 있는 당시의 일기를 되짚어보면서 오바마는 말한다. “나는 행동보다 사변을 좋아했다. 거절당하거나 한심해보이는 것에 예민했다. 게으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의 천성인지도 모른다.”
오바마가 퇴임 직후부터 집필한 회고록의 첫째 권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하기까지의 과정과 임기 첫 2년 반 동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임 중에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 교류한 인물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행정부가 맞닥뜨린 과제와 그에 대응해 우리 팀과 내가 내린 선택, 그 선택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흐름을 일부나마 설명”하겠다는 것이 머리말에서 밝힌 집필 취지다.
서술이 구체적이고 문장도 직설적인 편이어서 읽는 재미가 적지 않다. 오바마는 “단선적 서사”를 지양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선거운동 초창기 이야기든, 우리 행정부의 금융위기 대처든, 러시아와 협상한 핵무기 감축이든, 아랍의 봄을 이끌어낸 시위에 관해서든” “맥락까지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은 ‘공직자 오바마’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다.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곳곳에 스며 있다. 어쩌면 이 지점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재미의 본령이다. 이렇듯이 공적 기록과 개인적 고백이 교차하다보니 원고의 분량이 막대해졌다. 첫째 권만 920쪽(원서는 768쪽)에 달한다. 출판사의 전언에 따르면 오바마는 현재 두번째 권을 집필 중이다.
책은 모두 7개 챕터로 이뤄졌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시작한 1부는 연방상원의원 당선에 이어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로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 시점까지다. 2부는 2007년 선거를 기록했다. 첫 격전지 아이오와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곧바로 이어졌던 뉴햄프셔에서의 충격적인 패배, ‘마무리 투수’ 역할을 해냈던 미셸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3부는 백악관 입성 직후다. 집권 초기의 정책들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아울러 이라크 철군 계획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둘러싸고 백악관과 펜타곤 사이에 갈등이 펼쳐진다. 4부에서는 ‘오마마케어’를 통과시키는 과정이 소개된다. 다수당이라는 유리한 입지에도 오바마는 야당(공화당)과의 협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정치”라면서 끈기 있는 면모를 드러낸다.
5부에서 오바마는 러시아의 푸틴과 대면한다. 이어 아시아를 순방하면서 중국과 ‘위태로운 줄타기’를 펼친다. 6부는 임기 2년차의 상황이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고전했다. 공화당과 티파티의 공격은 극심해졌고 민주당은 2010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군대 내 동성애 차별 폐지를 이끌어내는 등 99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7부는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박감이 넘친다. ‘아랍의 봄’으로 불린 정세 속에서 오바마가 리비아 공습을 명령하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내면에서 오간 생각들이 기록돼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빈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는 과정이다. 오바마는 상황실에서 그 군사작전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마지막 화면에서 들려온 소리는 “제로니모 신원 확인… 제로니모 이케이아이에이”였다. 코드명 ‘제로니모’는 빈라덴을 지칭했고, ‘이케이아이에이’는 ‘작전 중 적 사살’(Enemy killed in action)의 약자였다.
이 책은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전 회고록인 <내 아버지의 꿈>(330만부), <담대한 희망>(420만부)보다 더 많이 팔렸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500만부를 넘겼다. 오바마는 책의 402쪽에서 “나는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가였고 기질적으로 보수적이다”라면서 “내가 보여준 것이 지혜인지 나약함인지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첫댓글 전 이 분을 좋아해서 책을 사 보고 싶은데 쪽수를 보니 하품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