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글
설성제
딸과 함께 명태 요리집 ‘맛태’에 들렀다. 명태는 비린내가 덜하고 담백한 맛으로 일품이다. 북어나 황태를 물에 불려 양념장을 바른 구이가 입에 착착 감기는가 하면 간장에 졸인 달짝지근한 코다리 조림도 그만이다. 무를 숨벙숨벙 삐져 넣은 시원한 탕도 속을 풀기에 한성맞춤이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 이릴 적 가장 많이 맛 본 생선이라 내 안에 최고의 어물로 자리 잡은지도 모른다.
막상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명태요리는 없다. 간단한 전이나 북어국 정도가 전부다. 그러니 여기저기 명태를 취급하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먹고선 맛을 평하며 요리법을 논하다 입을 닦으며 씩 일어나곤 한다.
식당이 왁자하다. 한 뼘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독서에 관한 내용이다.
“이번에 ‘이상 문학상’ 받은 거 읽어봤어?”
이상 문학상이 어떻고, 소설과 시가 어떻고, 에세이는 어떻고 한다. 그러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주고받는다. 명태찜 만큼이나 솔깃하고 맛있는 이야기다.
“수필은 쉽잖아, 굳이 서점에서 살 필요까진 없고.”
명태 대가리를 찢다가 젓가락을 날릴 뻔했다. 쉽지 않다. 수필을 쓰는 것도 명태 대가리 뼈를 바르는 것도 쉬운 것은 없다. 어렵지만 해야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있다. 수필을 쓰지 않아도 누가 나무라지 않고, 명태 대가리를 통째 내버려도 누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수필을 쓰고 싶고, 명태 대가리 뼈를 바르고 싶다.
“야, 그런 책은 고물상에 팔아버려.”
명태 눈깔인가. 물컹한 눈깔이 입안에서 툭 터지는 줄 알고 “퉤퉤” 뱉어낸다. 입가에 묻은 양념장을 닦으며 곁눈질을 한다. 이들이 고물상에 판 책을 어쩌면 헌 책방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 어떤 작품은 헌 책방에서 권 당 백만 원 가까이 되는 가격으로 매매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책도 그럴 수만 있다면 팔려가는 일이 나쁘진 않겠다. 상 위에 뱉어진 눈깔을 보며 어떻게 이 혐오스런 것이 내 입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싶다. 섬뜩하다. 나도 모르게 차임벨을 누른다.
“사리 하나 추가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도대체 뭐야?”
이번에는 지느러미가 이 사이에 낀다. 공교롭게도 가시가 목에 걸린다. 이런 날이 없었는데 괜히 앞에 앉은 딸에게 좀 맛있게 먹으라고 한다.
“엄마, 난 스테이크 먹고 싶었는데. 명태는 너무 흔해.”
딸이 눈을 흘긴다. 지느러미와 가시를 구분해 떼어내느라 코가 접시에 닿을 듯 머리를 바짝 숙인 나에게 물수건을 건네며 말한다.
“엄마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눈이 침침해서 그렇지 뭘.”
귀가 다른 데로 가 있으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옆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이 명태꼬리 부분을 한 입에 쓱 넣더니 뼈만 달랑 빼낸다.
“수필이 젤 쉽지. 그냥 일상이잖아.”
빙빙 돌리는 젓가락에서 라면사리가 기름에 튀긴 핫도그처럼 부풀어 오른다. 풀어서 다시 감을까 하다가 그냥 입속에 넣는다. 보나마나 입가에 양념장 칠갑이 되었을 것이다. 젓가락질이 서투른 딸이 명태 살을 엉망진창으로 발라 놓는다. 딸도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는 눈치다.
“그래도 진짜 좋은 수필은 정신이 아찔해지더라.”
나는 정신이 아찔해진다. 수필은 웃으며 들어왔다가 울어도 못 나가는 장르라고 자칭한다.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인데, 그 어려움이라는 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수필기법과 문장은 습작할수록 좋아질 수 있지만 자신의 뼛속에 녹아있는 아픔이나 상처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드러낸 후에는 치유가 찾아온다. 마음에 묻어둔 이야기를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달고 맑은 우물을 마셨을 때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그 맛을 알고 나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수필쓰기가 힘들어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판이하게 다르면서도 판에 박은 듯 같을 때도 허다하다. 같은 공감대를 만나면 감동이 따라오고, 감동 받으면 잊지 못한다. 마음에 새겨진다. 새겨진 대로 살아보려고도 한다. 한 편의 글로 삶의 변화를 맛보는 희열이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작가가 길어낸 삶의 사유를 독자와 함께 나누는 희열은 진미(珍味)보다 강하다.
얼마 전 여든이 넘으신 김 선생님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만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신 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글을 쓰고 계신다. 나이가 한참 어린 문우들에게도 언제나 깍듯하게 대하며 겸손과 배려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분별하신다.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시기로 소문나 있는 그분 앞에 서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수필 잘 쓰시고 계시냐는 나의 외람된 질문에 얘기 조금 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 글 쓰는 사람들은 되도록 상대의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 눈치를 보곤 하는데, 그날은 서로 타이밍이 잘 맞은 셈이다.
“사실, 수필이 가장 쉬울 줄 알고 했는데 할수록 어렵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장르로 갔지요. 허나 막상 첫 정이 그리운지라 다시 수필로 돌아왔어요. 새로 공부해보니, 이제 시로 말하면 은유 같은 것, 그러니까 수필의 의미화가 뭔지는 겨우 조금 알겠더라고요. 의미화는 조금씩 되어 가는가 싶은데 사유에 부딪쳐 다시 손을 들고 말았지요.”
사유!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한평생 책을 가까이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며 매사를 진지하게 사유하며 살아오신 흔적이 보이는 분조차 글을 쓰며 부딪쳤다는 말씀에 나는 왜 수필을 붙잡고 있는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글쓰기는 중독이다. 수작이든 졸작이든, 몸 상태가 최상이든 최악이든, 글이 오든, 글을 찾아 나서든 글과 날마다 조우하면 머지않아 빠져들고 만다. 글을 쓰지 못하면 불안해진다. 삶이 재미없어진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도 크게 기쁘지 않다. 어떤 색깔의 졸작이라도 한 편 쓰고 나면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가신다. 육체를 괴롭히고 정신을 갉아먹는 글쓰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입술을 물티슈로 박박 문질렀더니 양념불에 기름을 부은 듯 입가가 화끈거린다.
“엄마, 입술이 토인 것 같아.”
토인 것 같은 입술로 옆자리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기요, 제가 책 한 권 드리고 싶어요. 괜찮으시겠어요? 저 글 쓰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니 모두 환하게 웃음기를 머금는다. 어쩌면 지금 나의 대문니 사이에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끼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었어요. 즐거웠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단숨에 잘못되어버린 것 같다. 낯선 사람들 모임이나 혹은 사석에서, 더군다나 길에서 만난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나의 작품집을 준 적이 없다.
아무리 좋아해도 직접 요리를 하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고, 엉덩이 눌러앉아 글을 쓰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은연중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선 사람들이지만 그대로 도망칠 수 없어 주차장에 세워둔 차 트렁크에서 책을 꺼내온다. 그들이 아찔해질 만한 글 한편, 아니 문장 하나, 단어 하나만 들어있어도 좋으련만 생각하며 책을 건넨 후 딸의 손을 낚아채듯 후다닥 신발을 꿰차고 나온다
첫댓글 씁쓸한 한편 공감이 갑니다.
개미지옥 같은 수필쓰기입니다.
수필의 현실, 수필 쓰는 사람의 심경을
식사 과정에 빚어넣으며 코믹하게 그려내
재밌으면서도 씁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