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출지의 진실
글/여세주
용신신앙과 불교의 갈등
정월 대보름날 찰밥을 지어 먹는 풍속은, 신라 비처왕(소지왕) 때의 오기일(烏忌日)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오기일 풍속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까마귀밥이라고 하며 감나무 둥치에 붙여놓던 기억이 떠오른다. 까마귀 제삿날의 유래를 전하는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나선다. 기왕이면 비처왕이 천천정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정월 대보름날, 서출지에 가 보기로 한다.
비처왕 9년에 월성으로 왕궁을 옮겼으니, 왕은 반월성에서 나와 천천정으로 나들이를 하였을 것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제21대 비처왕(毗處王; 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10년 무진(戊辰, 488년)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 한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에 분향 참배하러 가는 길에, 여러 마리 쥐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제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따라가 찾아보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잘못이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壤避寺村이니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비처왕(毗處王)에게 바치니 왕은 말한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奸通)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첫 번째 돼지·쥐·말의 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니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한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말이다. 그 못을 편지 나온 못[書出池]이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1, 射琹匣)
신라 ‘비처왕’이 못에서 나온 노옹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궁내에서 간통하고 있는 ‘승려와 궁주’를 처형했다는 이야기이다. 정월 대보름에 찰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도 덧붙였다.
은밀한 비밀을 쥐가 알려주고 까마귀 떼가 안내해 주었다고 한 게 예사롭지 않다.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까마귀는 태양신의 정령인 삼족오(三足烏)를 연상하게 한다. 쥐나 까마귀의 문화적 상징을, 당시 사람들은 쉽게 이해했을 법하다.
이 이야기는,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년) 이전의 일인데, 궁중 내전에 분향수도하고 있던 승려가 있었다고 하여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궁주(宮主)는 공주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으나, 왕비나 후궁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왕의 비빈이라야 서사적 논리에 맞다. 화랑세기(1세 위화랑)에 비처왕의 비빈인 선혜부인이 묘심과 사통하여 오도라는 딸을 낳았다고 하였다. 노옹은 못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형상으로 비유된 용신(龍神)이거나 양피못 용왕님을 모시고 살아가던 토착민들의 우두머리라고 해야, 이 이야기의 의미하는 바가 비로소 풀린다. 용신 신앙을 숭배하는 토착집단이 이미 궁궐의 내전에까지 깊이 파고 든 승려의 폐단을 들춰내어, 불교의 전파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생성된 이야기가 아닐까.
본래의 서출지는 양피못
피촌(避村), 남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 양피사(壤避寺)가 있는 마을의 연못에서 노옹이 나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틀리지 않는다면, ‘서출지’라고 안내되어 있는 현재의 연못은 본래의 서출지가 아니다. 이 연못에서 남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양피못이 본래의 서출지이다. 마을 사람들도 이렇게 말한다. 남산리 마을은 풍천 임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에 문화재 등록을 하면서 초라한 양피못 대신에, 1664년 임적(任勣)이란 이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이요당(二樂堂)을 걸터앉힌 이 연못을 서출지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이요당 연못에는 마른 연꽃 대궁이(줄기)만이 따스한 햇살 아래 고개를 꺾고 앉아 졸고 있다.
비처왕의 기사가 까마귀를 좇아 말을 달렸을지도 모를 길을 따라, 이 연못의 남쪽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때마침 까마귀 떼들이 하늘 높이에서 군무를 추며 날더니 서출지를 안내하겠다는 듯이 양피촌이었던 남산리에 내려앉는다. 전생에 내가 비처왕의 기사였던가. 신라 시대 그날처럼 까마귀 떼가 나를 앙피촌으로 이끈다.
남산리 3층 석탑. 안내판엔 이렇게 적혀있다. 동탑은 모전탑이고 서탑은 일반적인 석탑이다. 동시에 만들어진 쌍탑이 아니라 각각 만들어진 탑이라 한다. 이곳이 양피사지임에 틀림없다. 이 마을을 양피촌 또는 피리(避里)라고 불렀다고 하니. 우리가 찾아 나선 서출지는, 양피못이라는 이름으로 양피사 동탑에서 동남 10여 미터 정도에 위치해 있다. 양피못, 아니 서출지는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외롭다.
이 마을에는 양피사 외에도 염불사라고 이름을 바꾼 피리사(避里寺)가 있었다.(삼국유사, 제8, 避隱) 양피사에서 남쪽으로 200m 가량 걸으면, 쌍탑이 복원된 피리사, 즉 염불사 터가 나타난다. 이 절의 남문이 있었던 자리 앞으로, 칠불암 올라가는 산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