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사이드갤러리 / 이정희
베를린에서의 첫날 아침이 밝았다. 내리쬐는 햇빛은 투명하고 코끝에 닿는 공기는 청정했다. 전날 긴 시간 비행기 탑승에서 온 피로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나서는 문학기행 일행의 눈동자들은 너나없이 반짝였다.
버스를 타고 첫 번째로 가 닿은 곳은 베를린 장벽이었다. 옛 동독 땅이어서인지 가는 도로변의 건물들이 비교적 칙칙하고 단조롭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시선을 당기는 대담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벽화들이 나타났다.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아니, 저것이 그 철통같았던 장벽이었단 말이야?”
나는 얼마간 흥분되었고 둘씩셋씩 아무데고 어울려 서서 사진을 찍었다. 어디에서 찍어도 배경은 개성 있는 그림이었으니까. 우리가 서 있던 곳이 바로 ‘이스트사이드갤러리’였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란 시의 중심을 흐르는 슈프레강과 나란히 선 베를린 장벽의 한 부분으로 벽화가 그러진 1.3킬로미터의 철근콘크리트 동쪽 장벽을 가리킨다. 통일의 단초로 장벽을 허물면서 상징적인 의미로 드문드문 남겨놓은, 합하면 3킬로미터 정도 되는 베를린 장벽 중 제일 길게 남은 곳이다. 1961년 이래로 분단 독일의 제일가는 징표였고 1989년 헐리면서 독일을 하나로 만든 역사적 기념물이었다.
1990년 21개국에서 모인 118명의 화가들이 그 장벽을 캔버스로 삼아 통일의 감격과 자유,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의 희망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 자체가 역사적 기념물인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조형물이 된 것이다. 그렇게 길고도 거대한 캔버스가 어디 있을까. 그러니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미술관이다. 냉전의 상징이던 장벽이 예술작품으로 얼굴을 바꾼 것이다. 이 ‘벽화 프로젝트’는 베를린예술대학교의 독일인 학생들과 외국인유학생이 주죽이 되어 행해졌다.
여전히 분단국 상태의 국민의 한 사람인 나,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어찌 예사롭기만 했겠는가. 그들은 결국 통일을 이루어 냈고 분단으로 인한 오랜 고통과 상처의 흔적을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통일이 부러웠고, 아픈 과거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그들의 각오를 세계인의 염원을 담아 형상화했다는 것이 부러웠다.
2차 대전 후 베를린은 미, 영, 프, 소 네 나라의 분할통치 하에 들어갔다. 그 기간 동안 간단한 통과의례만 거치면 다른 지역으로의 왕래가 가능했다. 그러나 점차 동독과 서독의 정치이념이 굳어지고 냉전이 심화되면서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동독정부는 1961년 8월 중순에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통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할 수 있었고, 네 차례에 걸친 경계선의 보완 끝에 1989년까지 버티던 철근콘크리트 장벽이 동서를 가로막았다. 통일의 첫 작업으로 장벽을 무너뜨릴 때까지 28년 동안 이 국경을 넘다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나 되었다.
갤러리 오픈 후 10년. 보호문화재단이긴 했으나 오염된 공기와 습기, 바람, 무엇보다 세월의 탓으로 화가들이 원래 그렸던 그림의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장벽 자체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더러 화가가 개인적으로 손본 것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형체나 색체가 훼손되어 희미해지고 더러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갤러리는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고 베를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한편에서는 “보지 않으면 생각히지도 않는다.”고 점차 잊혀져갔다. 종내는 그렇게 소멸되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다.
결국 장벽을 없애버리자는 논의가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원래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 화가협회’를 결성하여 등록했고, 장벽이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권익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2009년에 베를린 시가 대대적인 복구작업을 주관했다. 먼저 장벽을 정비하고 원래 참여했던 화가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작품을 본래 그림으로 복원시켰다. 거절하거나 미루는 이들이 있어, 결국 86명의 화가들만 초대에 응했다. 새로운 화가들의 그림이 추가되었다.
이 장벽갤러리의 상징성은 독일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과 전 세계인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열망에만 있지 않다. 주목할 만한 모던아트의 전시장이라는 데에도 그 의미가 있다. 풍자와 희망을 담았으나 드물게는 역설과 야유도 없지 않은 강렬한 색체의 100여 점의 추상화들. 그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그림은 수 소련의 공산당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껴안고 격렬하게 키쓰하는 모습을 희화(戱畵)한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의 <형제의 키쓰>라는 작품이다. ‘주여, 우리의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해주세요’라는 부제가 붙어있어 그 문구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올 법하다. 우리나라 화가 김영란의 그림도 <무제>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다.
바뿐 일정을 우리가 그 날 그 자리에 머문 시간은 잠깐이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해묵은 격언을 새삼 수긍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받았던 강한 인상은 돌아와 관련 자료를 찾게 했고, 결국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동독이 된 지도 어언 20여 년. 그간 독일은 통일비용의 감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유렵의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특히 독일 속의 섬 같았던 수도 베를린은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가 용광로처럼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가 그 자리에 오래 남아 민족통일의 기쁨과 자유의 소중함을 거듭 일깨워주면 좋겠다. 헌데 우리 대한민국의 장벽 DMZ는 언제쯤이나 세계인들의 주목을 끄는 예술의 장(場)으로 승화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