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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시인, 윤동주 그 삶의 편린(片鱗)
- 못내 아름다운 연인의 일화(逸話)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모던포엠』 주간)
1. 인연의 매듭 풀기와 삶의 대응
그간에 평자는 그 나름으로 지극히 인상 비평적이나 민족시인 윤동주문학상을 지난 5, 6년 전부터 중국 연변 용정의 현지에서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해 수여해 왔다. 특히 2022년 문학상 시상식에 참여한 직후, 새롭게 공원묘지에 단장된 그의 묘소에서 잡풀을 뽑았던 평자의 감회는 각별하다. 차제에 2023년 이후 안타깝게도 윤동주문학관이 중국 정부로부터 패쇄된 정황에서 부득이 행사가 미뤄진 상황에서도, 뜻밖에 교토에 소재한 도시샤(同志社)대학의 고하라 가쓰히로 총장이 대학 창립 150주년이자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작고 80주기인 지난 2월 16일에 단순한 추모를 넘어 대학 최초로 고인에게 명예 문화박사를 수여하는 추모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으며, 고하라 총장은 기념행사에서「윤동주를 말하다」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과 기독교적 가치 등에 관해 이야기도 비중 있게 역설하였다.”
차제에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한용운, 이육사, 심연수’와 함께 민족 시인으로 평가받는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간도성의 명동촌에서 윤영석(尹永錫)과 독립운동가며 명동교회 목사인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용(金龍)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뒤늦은 1992년 9월, 그의 모교인 용정중 교정에 시비(「序詩」)가 건립되었고 1994년 8월 29일 용정시 명동촌에 생가 복원과 또 1995년 일본 도시샤대학에 그의 친필 시비(「序詩」)가 세워졌다. 또 하나 ‘문학적 재질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윤동주 시인의 아명은 해환(海煥)이며 동주(童舟) 혹은 동주(童柱)는 필명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2023년 1월 15일 작고한 오무라 마스오 일본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조선문학의 선구자로 윤동주 묘소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다. 그 자신은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사 연구의 틈새를 채우고, 국제적 시야로 그 지평을 넓혀준 공적은 높이 인정받아 마땅하다. 한편 2023년 8월 16일에 故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유족이 고인의 소장자료 2만여 점을 한국에 기증한 사례(국립 한국문학관)는 못내 충격적 사건이다. 앞서 2018년 전체 6권으로 완간된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1권이 『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인 점도 놀랍지만, 또 2019년 기미독립 100주년을 맞아 평자가 20년 남짓 애정을 받쳐온 ’강릉(江陵)의 심연수(沈連洙, 1918-1945) 선양사업’의 결과로 심연수가 민족 시인으로 확정된 일도 보람이거니와 앞서 평자가 관장한 2007년 8월 서울프레스센터의「심연수 국제학술 심포지엄」 주제발표에서 “남은 생애는 청산학원(靑山學園) 졸업생인 청송(靑松) 심연수 시인연구에 열중하겠다.”라던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비장한 일념은 못내 뇌리에서 지워낼 수 없다.
특히 윤동주는 1925년 4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당시 절친한 급우라면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외사촌 김정우다. 또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어린이』, 『아이 생활』 등을 정기구독하였고, 종종 연극 활동을 통해 문학적 재질을 일깨웠으며, 급우들과 등사판으로 문예지『새명동』을 간행하며 동요와 동시도 발표했다. 한편 1932년 4월 용정 은진중학에 입학하자 부친은 아들의 통학을 위해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고 축구선수로도 활약하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제목 「땀 한 방울」로 1등도 수상했다. 재학 당시에 명의조(明義朝) 선생으로부터 역사 교육을 받으며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의 각별한 깨우침’을 얻었다.
2. 연인의 존재감과 서정성의 언어 미학
각론하고 일본 유학 시절인 1944년 2월 22일에 윤동주는 정식으로 기소되어 3월 31일 재판에서 송몽규와 함께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서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서신은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만 허용되었는데 고향에 부탁하여 차입한 『신약성서』를 주로 읽었다. 매달 배달되던 엽서가 1945년 2월 중순까지 도착하지 않아 애태우던 가족은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전보를 받은 뒤에야 그의 옥사를 알게 되었다. 부친이 윤영춘과 함께 시체를 인수하러 일본으로 떠난 사이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대(九州帝大)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 기다림”의 우편물이 집으로 송달되었다. 그나마 일본에 도착한 윤영석과 윤영춘은 송몽규와의 면회를 통해 비로소 그가 이름도 모르는 주사를 맞은 것을 알았다. 안타깝게도 사망 23일 만에 동주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부친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3월 초순 가족들은 용정 동산공원에서 눈보라가 몹시 몰아치던 날 장례를 치렀고 그해 단오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모름지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正音社, 1948)의 간행으로 존재감이 빛나는 시인으로 그 정체성을 확정받기까지 정병욱(鄭炳昱) 교수의 공적은 지대하다. 또 2022년 7월 22일의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3층의 「백영 정병욱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특별전」도 뜻깊지만, 1940년 연희전문의 신문 학생란에 정병욱의 투고로 인해 맺어진 운명적 만남도 그렇거니와 2년간의 기숙사와 하숙 생활은 물론 가끔 문학과 예술에 관한 논쟁을 하면서도 소중한 글 벗 관계를 끈끈이 유지하였다. 또 한편 1934년 12월에 「삶과 죽음」, 「초 한대」,「내일은 없다」등의 시를 짓고 작품마다 창작 일자를 기록하였으며 1935년 3월부터 용정 중아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을 가르치다가 그해 9월 평양숭실중학에 편입했다.
비교적 이 시기의 시편에는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등이 있고, 1936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 소년』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 「비자루」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등을 발표했다. 다소 만학의 나이에 1938년(2월 17일) 광명중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입학했으나 의학과를 지망하라는 부친과의 갈등은 조부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문과 전공을 확정하고 한층 더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마침 연희전문시절 「새로운 길」, 「슬픈 족속」, 「사랑의 전당」 등의 시편과 동시 「산울림」, 「고추밭」 등을 썼다. 첫 학기를 마친 뒤 연변 용정에서 처음으로 여름 성경학교의 교사로 봉사했으며, 1939년 산문 「활을 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발표하고 「자화상」, 「달갈이」를 창작했다. 다시 그해 가을 명동촌에서 용정의 정안구로 이사를 하였다. 특히 윤동주의 대표 시 「별 헤는 밤」에 관한 후일담으로 어느 날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마무리된 초고를 정병욱에게 건네주었다. “어쩐지 끝이 좀 허(虛)한 느낌이 드네요.”라는 느낀 바를 전해 들은 윤동주는 뒷날 시집 제1부의 「序詩」까지 첨가된 한 부(部)를 건네주었다. “지난번 정형이「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모처럼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1941. 11. 5)로 수정한 넉 줄을 넣었다.”라는 그 지적은 인상적이다.
모름지기 1940년 12월 「병원」, 「위로」 등의 시편을 포함하고 1941년에 그의 대표작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을 헤는 밤」 등 보다 수준 있는 시를 짓고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간한 『文友』에 1939년에 쓴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하였다. 한편 1941년 5월 정병욱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서 종로구 누상동 김송의 집으로 옮겨 하숙하다가 9월에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북아현동으로 옮겼다. 까닭에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첫 시집 『병원』을 출판하려 했으나 대표작 「서시」가 쓰인 후 비로소 시집명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확정했다.
각론하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정병욱은 그의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에서 “내 평생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은,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라며 자긍심을 토로했다. 또 한편 그 자신의 호를 윤동주의 시편인 「흰 그림자」와 연계지어 백영(白影)으로 자처하였고, 뒷날 여동생 정덕희가 동주의 남동생 윤일주와의 혼인도 예외일 수 없다. 근간 『신문예』의 지은경 발행인이 자신의 평론집 『인식의 지평』(책나라, 2022)에서 「동주의 여인 관계」를 별개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별이 된 여인’을 상징적으로 서술한 일도 가늠할 바다. 아울러 2017년 12월 4일 한국교회건강연구원(원장 이효상) 주최의 「시인 윤동주 탄생 백주년기념」 특별강연회에서 『윤동주평전』(서정시학, 2014)의 저자이며 송몽규의 조카 송우혜 소설가는「별이 된 시인-윤동주가 사랑했던 여인」 특강에서 “윤동주는 잘 생기고 수줍은 청년이었으나 한 번도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친구와 후배는 이화여전 여학생에 대해서 증언하였으며 여동생 윤혜원도 함북 온성태생인 박춘혜라는 여학생을 적극적으로 사랑했다.”라는 점을 술회(述懷)하였다.
차제에 그 자신의 불행한 삶은 불과 ‘27년 1개월 16일’ 밖에 안되지만, 아명인 해환(海煥)과 달리 끝내 암울했다. 현실적으로 그가 처했던 시간대는 인류역사상 험악했던 세계 1차대전 중에 중국 북간도의 명동에서 출생하였고 세계 2차대전 중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獄死)하였다. 비록 격랑의 세월에 민족의식으로 의연히 대처하며 맑고 지순한 시를 써서 민족의 아픔을 위무(慰撫)하며 시적 상상력을 시의 본말(本末)인 순수서정시의 양식으로 형상화 시킨 점’은 더없이 신선한 충격이다.
또 한편 우리 문단사에서 누구보다 운명적인 만남이 맞물린 정병욱은 그에 관한 감회(感懷)로 “그 무렵 북아현동에는 동주 형의 부친 친구로 교사를 하다 전직하여 실업계에 종사한 분이 살고 계셨다. 동주 형은 그분을 매우 존경하여 그분 댁을 찾았다. 그분의 따님은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었는데 종종 협성교회와 케이블(Elmer M. Cable) 목사의 부인이 지도하는 바이블 클래스에 동행했다. 비록 동주 형은 나이 어린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적은 없으나 그녀와의 감정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라는 지적엔 다소 애잔할 따름이다.
3. 시적 비장감과 행간의 틈새 좁히기
그렇다. 한국 근현대시문학에서 천체나 기상학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윤동주는 그의 시편에서 "별"은 지나친 의미의 확대나 상징적 처리가 아닌 자연현상 그대로의 해석이 합리적이다. 앞서 최병로가 “윤동주와 만해(萬海) 한용운의 문학 속의 길의 이미지를 대비(對比) 시켜 기술한 점”에서 서로 간 종교 양상을 달리하는 두 시인의 시편에서 ‘바람, 별, 하늘, 길’ 등 빈도수 잦게 상징적으로 형사(形似)된 시어를 빈도수 높게 접할 것이다. 이같이 타자 간의 시편을 통해 ‘한용운과 조지훈, 서정주’, ‘한용운과 타고르, 김동명’, ‘유치환과 니체’, ‘서정주와 보들레르’ 등과 그 상오관계를 맺어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그 검색의 필요성은 더없이 합리적인 해법이다.
차제에 윤동주의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은 동경 유학 시절 성악전공의 박춘혜다. 그녀에 관한 사랑은 연전 시절의 말 없이 아프기만 했던 양상과는 못내 상이하다. 여동생 윤혜원의 증언처럼 “윤동주 시인이 동경에 유학한 뒷날 처음 여름방학을 맞아 1942년 7월 고향 집에 왔을 때, 그녀의 사진을 가족들에게 선뜻 내어놓았다. 이것은 결혼 상대로 그녀를 정식 소개한 의중이다. 여기서 막내 오빠와 그의 친구 이렇게 셋이 찍은 여학생의 사진은 지성미가 풍기는 좋은 인상의 인물로, 윤동주는 연전 졸업 후 불과 다섯 달 뒤 결혼 상대로 마음먹고 박춘혜의 사진을 가족들 앞에 선뜻 내놓았음”에 견주어 한때나마 그 자신이 그녀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가늠이 된다.
모름지기 함북 온성은 북간도의 용정과 근접한 곳이고 또 박 목사라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서로 간 알만한 처지였다. 이 같은 예견은 조부 윤하현은 의식이 깨어있는 지도자로서 신학문과 기독교를 정착시킨 연유로, 그 자신은 신앙심이 깊어 한때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비록 연전 시절 종교적인 회의는 있었으나 가끔 종교체험을 창작 모티프로 삼고 시문학에 전념했기에, 집안 어른들의 “참 좋다. 잘 추진해봐라!”라는 격려까지 받았고, 여름방학 후 동경으로 돌아갈 때 그 사진을 놓아두고 떠났다. 새 학기에 접어들 무렵 뜻밖에 “그 여자가 이번 여름방학에 집에 갔다가 약혼하고 왔더라.”라는 사연이 담긴 한 통의 서신이 용정의 집으로 배달됐다. 또 한편 피가 뜨거운 젊은 날, 윤동주 시인의 로맨스는 헛되게 끝났고 아픈 상처만 동경에서 쓴 시편「봄」의 몽환(夢幻)처럼, 그 꿈은 부풀어 올랐기에 “즐거운 종달새야/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봄)”의 확증은 따뜻한 감성에 의한 시적 정조다. 이처럼 그 벅차고 들뜬 정감은 박춘혜에 빠져든 뜨거운 감정이 영혼의 울림으로 변형된 양상은 얄궂은 운명이랄까? 공교롭게도 법학을 전공한 그녀의 남편은 법관으로 청진재판소에서 재직하였다.
그뿐 아니라 성균관대학교 정우택 교수는 『시인의 발견, 尹東柱』(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1)에서 윤동주의 시적 주체가 “성찰하는 윤리적 주체뿐 아니라 사랑의 정념 그리고 탈주, 욕망하는 ‘청춘’이었다.”라는 지적은 뜻깊다. 그렇다. 그가 처한 시대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신으로부터 허락된 절대복종의 길을 걷겠노라는 집념은 확고하기에 시편에 수용된 시어의 비교문학적 대비는 뜻깊다. 또 1941년 이후의 시편에 삶의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체의식이 강렬한 연유로, 1943년 어느 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교수 집의 모임에서 일본 친구의 언급이 끝나자 “여러분은 목숨 바칠 조국이 있지만 내게는 그런 조국이 없다.”란 울분에 젖은 윤동주의 절규나 그의 시편 끝에 천황의 소화(昭和)가 아닌 서기로 기술한 점은 새삼 유념할 바다.
결론적으로 세계 2차대전의 전운이 점차 짙어지던 세기말 상황에서 “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은 어린다.(少年)”라고 그렇게 낮은 음조로 읊조리며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라던 존귀한 ‘바람과 별의 시인’은 날(刃) 푸른 저항정신으로서 올곧은 자아성취를 위하여 부당한 인위적 제도에 철저하게 대처했다. 비록 그 자신은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시대적 파고가 너무 거세어서 끝내 감당치 못하였다. 모쪼록 ‘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이 천상을 향한 열린 동공에 클로즈업되는 현상은 ‘불멸의 초상(肖像)’으로 ‘별과 바람의 영혼’인 윤동주 시인의 진면목(眞面目)을 구명하는 정신작업이기에 끝내 ‘그 연인의 입맞춤은 황홀한 현기증’이다.
*약력 : 강릉출생, 『華虹詩壇』(1965) 발행인, 『시문학』출신, 한국시문학 학회, 김동명학회 회장, 관동대학교 대학원장(총장대행) 역임, 현재 가톨릭관동대학 명예교수,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한국기독교문인협회 및 아태문인협회 고문, 사) k 정나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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