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성서이해를 위한 기본 원리
1. 선입관의 안경을 벗어라
어떤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그 저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지, 그 작품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그 작품을 바르게 감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성서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몇가지 선입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서 배워온 교리(dogma)라는 안경을 쓰고 성서를 대합니다.
소위, '주일학교 신학'(sunday school theology)을 통해 고정된 자기 나름의 하나님, 예수, 성서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성서를 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대답과 결론을 통해서 성서를 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나름의 전이해(前理解)를 갖고 출발할 때, 우리는 성서를 도그마(敎理)의 시녀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성서를 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적 현실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성서에서 찾고자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러한 추구를 할때 흔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해답을 성서에서 끄집어 내려고 하지요.
비윤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은 모두 제거하고,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교훈만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적인 해답들이란 사실은 성서를 통하지 않고 다른 자료(source)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요.
셋째로, 성서와 삶의 현실 사이에 나를 개입시켜 성서를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내가 기준이지요. 하나님, 구원, 진리 등에 내 나름의 관(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성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 주는지 알고자 하는 자세로 성서를 연구합니다.
이러한 내 나름의 전이해는 관심을 이끌어 주는 유인자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가르치는 실제 자체가 이러한 전이해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 양자 사이에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고, 따라서 성서의 메시지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 나름의 선입관을 갖기 마련이고,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고치기 어려운 고질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대할 때는 가능한 한 이러한 선입관으로 착색된 안경을 벗어 버리고 맑고 투명한 안목으로 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투명한 안목으로 보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2. 히브리인의 안경을 쓰고 보라
구약성서는 히브리 문화권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헬라 문화권에서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 문화는 오늘날 서구 문화의 모태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서구 문화의 영향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문화는 우리에게 친근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는 우리에게, 특히 서구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문화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 문화를(특히 히브리적 언어 문화를) 이해하고 히브리적 안목으로 구약성서를 읽으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언어 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본질적 포장 속에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구의 언어 문화는 단도직입적으로 알맹이(point)를 드러내는 문화지요, 그래서 핵심이 분명치 않은 이야기, 대화, 설교, 논설 등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언어 문화에서는 본질적 메시지를 겉포장 속에 감추어 전달하는 경향성이 강합니다.
사실상 포장은 내용물을 드러내기까지 필요한 보조장치에 불과하지요. 포장은 비본질이고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포장된 메시지가 많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 최초의 인류이야기, 선악과 이야기, 뱀의 유혹이야기,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 수많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그릇(포장)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 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캐내는 작업이지 포장 자체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성서는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 말은 구유가 예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는 뜻도 되지만 구유 자체를 신성시해서는 안된다는 뜻도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가지 그릇 속에 담겨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세지'이지 그릇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 문화를 유산으로 받은 오늘 우리들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겉포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나요?" "뱀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등.
'어떻게'라는 질문은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보다는 방법론을 묻는 과학적 질문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향하여 그러한 과학적 질문을 하면 결코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why)' 또는 '무엇'(what)이라는 질문에는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뱀을 유혹자로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럼 '왜' 또는 '무엇'은 목적과 의도를 묻는 질문이며, 그 그릇 속에 담긴 물건의 실체와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성서를 향해서는 언제나 방법이 아닌 목적을 묻는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설화, 이야기, 동화, 시, 역사, 소설, 논술, 우화, 편지, 상징, 비유, 풍자 등 여러 가지 그릇(포장)에 담겨서 전달되기 때문에 그 포장을 뜯어내고 내용물(메시지)을 찾고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하나의 동화에 불과하지만, 어린이들은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즐겨 읽고 ,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중요한 교훈(메시지)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토끼와 거북이가 대화를 할 수 있었는가? 라든지, '그들이 경주했던 산의 높이는 얼마나 되었는가?'라는 과학적 질문은 우스꽝스러운 질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히브리적 언어 문화의 특징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말(dabar/Logos)
오늘날 우리의 말은 서푼어치 값어치도 없어서, 계약서를 쓰고, 인감도장을 찍고, 그것도 모자라 보증인을 세우고, 담보를 제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말이 곧 그의 인격이며 실체였습니다.
모든 계약을 말 한마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요. 특히 신의 말씀은 절대화된 역동적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야웨 하나님의 음성은 자연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힘으로 묘사됩니다. 바빌론이나 앗시리아에서 신(Marduk-Ellil)의 말이 '자연적 힘'(의인화된 자연의 힘)이라면, 구약에서는 의식적(意識的)이고 윤리적인 인격성 자체입니다.
성서에서 한두 가지 예를 찾아볼까요?
"내 말이 불과 같지 않으냐?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지 않으냐?"(렘 23:29)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 55:11)
이렇게 신의 말은 인격성과 힘을 지닙니다. 특히 천지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매개체가 아니라, 창조주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곧 야웨 자신인 것입니다.(신32:47, 삼상 3:19, 호 6:5, 사 11:4, 시 107:20, 147:20, 18, 19 참고)
'말씀'의 히브리어는 '다바르'(dabar)이고, 그 다바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로고스"(Logos)가 됩니다.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서 발전된 로고스는 헬라화된 로고스로서, 고도의 '정신적 에너지'이며 '정신적 기능'인데 비해,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히브리화된 로고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곧 하나님이다"(요한 1:1).
헬라적 '로고스'가 정돈되고 중용적이며, 계획되고 의미로 차 있는 이성적인 것이라면, 히브리적 '다바르'는 역동적, 명령적, 전진적, 활동적인 것입니다.
즉 로고스가 행동화될 때 다바르가 됩니다. 구약성서에서 보면 축복, 저주, 유산상속, 계약 등이 말로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말이 곧 말하는 사람(話者)의 인격, 의지, 계시,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의지와 행위는 다바르의 양면입니다.
2) 인상과 외관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얼굴이나 외모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날 미스 코리아니 미스 월드니 하면서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후에 헬라 문화권의 소산이지 히브리 문화는 아닙니다. 그들은 먼저 사람의 성품을 살피지요, 요셉(창 39:6), 사울(삼상 9:2), 다윗(삼상 16:12), 압살롬(삼하 14:25) 등에 대해서 인물이 준수하고 아름답다고 보도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곧 그들의 내면적 인격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즉 요셉의 미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적으로 작용하고, 사울의 미는 왕으로서의 그의 품성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아가서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세부분(코 7:4, 목 4:4, 7:4, 유방 8:10)을 묘사할 때도 적군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망대'나 '성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접근할 수 없음, 정복할 수 없음, 순결함, 결백함, 처녀성과 같은 여인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외모를 찬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너의 목은 상아로 만든 탑 같고, 너의 눈은 바드랍빔 성문 곁에 있는 헤스본 연못 같고, 너의 코는 다마스쿠스 쪽을 살피는 레바논의 망대 같구나"(아가 7:4)
" 이 여인은 누구인가?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환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아가 6:10)
이와 같이 히브리적 미학의 특징은 아름다움의 정신화에 있습니다. 즉 선과 미는 같은 개념입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미는 신적인 것이지요. 히브리인들은 자연 자체의 미에는 의미부여를 하지 않지만 그 자연이 창조주를 찬미하는 데 의미를 둡니다.(시 8, 19:1-7, 104, 욥 38-41, 사 40:26-28, 42:5, 45:12 참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해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장막을 쳐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시편 19:1, 4-5)
3) 의인화(擬人化 )
'의인화'(擬人化)란 신과 신적 세계를 인간의 경험 영역에서 얻은 상(像)과 유비(類比)로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은 흔히 자연을 정신적 차원에 올려 놓음으로써 자연과의 접촉과 생생한 연결을 얻습니다. 예를 들자면, 백성이 포로에서 풀려 돌아오면 자연 전체가 그 기쁨에 참여할 것이라고 표현하지요.
"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환호성을 터뜨리고, 들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치리라"(사 55:12)
"너희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너희 땅의 깊은 곳들아 기뻐 춤추라. 너희 산들아 환호성을 질러라. 그 안에 있는 숲들아 모든 나무들아!(사 44:23)
4) 신의 표현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표현합니다. 유목민들에게서 양치는 목자는 양떼의 생사와 안위에 절대적인 존재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시 23)고 고백합니다.
떠돌아 다니며 양떼를 치는 유목민들이 적과의 전투시에 필요한 피난처, 산성, 반석, 바위, 방패, 요새 등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기도 합니다.(시 27, 28, 31 등 참고). 그러나 헬라 문화권에 오면 하나님이 추상화되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거룩하시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식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바뀝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관찰하는 반면, 헬라적 사고에서는 하나님을 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야웨는 주, 왕, 용사(출 15:3),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때로는 송아지(출 32:4, 왕상 12:28, 호 8:5 등)로 의수화( 疑獸化)하기도 했지만 의인화( 擬人化) 표현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짐승의 모양으로 의수화하거나 인간의 모양으로 의인화하는 것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하난미을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신체에 대한 언급은 실제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시적(詩的)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야웨의 손은 힘과 권능의 상징으로 묘사됩니다.
"보라 만유의 주 야웨는 강한 자로 임하고, 그의 팔이 그에게 권세를 주리라... 그는 목자처럼 그 양떼를 먹이고, 그의 팔로 그것을 모으리라. 그는 어린양들을 그 품에 안고, 젖먹이는 것들을 평온하게 인도하도다"(사 40:10-11)
3. 성서의 문학양식을 이해하라
성서는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66편의 글이 하나로 편집되어 한권의 책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글마다 문학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신문을 예로 들어 봅시다. 신문은 크게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문화면 등으로 구분됩니다. 1면의 헤드라인에는언제나 그날의 토픽 뉴스가 실립니다. 그리고 2면이나 3면에 실리는 사설이나 논설은 그 토픽 뉴스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해설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만화나 만평은 풍자에 속합니다. 그것 역시 그날의 토픽 뉴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면에는교육, 종교, 문학, 예술, 스포츠 등의 기사가 실립니다. 시와 소설도 나오고, 일기예보와 TV 프로도 나옵니다. 그리고 맨 뒤에 나오는 사회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각종 사건들이 보도됩니다.
이처럼 신문 한 장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문학양식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신문의 각 면을 그 양식( 樣式 )에 따라 이해하며 읽어야 합니다.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에 시리는 각종 사건 기사는 사실에 입각하여, 육하원칙으로 기록되므로 그런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논설이나 사설은 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논리적 해설과 의미부여를 찾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면 말짱 헛일이지요. 만화와 만평은 풍자로서 읽어야 합니다. 풍자를 읽으면서 육하원칙에 의한 사실적 보도를 기대한다면 난센스지요. 그러나 그 풍자 역시 재미로만 읽어서는 안되고, 그 속에 담긴 주제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 한장을 읽는 데도 이처럼 각 면에 따라 독자의 기대와 읽는 자세가 달라야 하듯이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성서에는 역사, 설화, 율법, 예언, 시, 격언, 잠언, 지혜문학, 논설, 편지, 이야기, 풍자 등... 다양한 양식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양식들을 이해하며 읽으면 오해를 피할 수 있고, 성서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고백적 해석사(Geschichte)에 해당되고 그 안에는 설화로 포장된 메시지도 많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사와 이집트 탈출사에 해당되고,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등에는 역사와 율법(민법, 형법, 종교법 등)과 생활규범 등이 혼재해 있습니다.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역사와사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룻기는 룻이라는 한 여인의 삶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등은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역사가 주로 왕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예언자들의 활동과 메시지가 첨가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은 당시대의 지혜문학에 해당되며, 각각 소설, 시, 잠언, 격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까지는 예언자들의 활동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예언서에 속하는데, 그 중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묵시문학이란 이 세상의 종말과 종말적 사건을 다루는 문학양식으로서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태(行態)와 말씀을 기록한 책인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지만, 부분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문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겨례, 동아, 국민, 중앙 등 주요 일간지들이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 데서 기자의 시각에 따라, 또는 신문의 성격에 따라, 그 보도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호의적인 신문과 냉소적인 신문이 있고,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신문과 비판적인 신문이 있습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뿐만 아니라,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사건 보도를 할지라도, 그 장소와 시간과 숫자에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요. 따라서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를 꿰뚫고 있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유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배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비교적 민중적 색채가 강하고 요한복음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있느냐고 의아심을 가질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성서는 결코 천사들이나 외계인들에 의해서 하늘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주시되 인간의 손을 빌려서 기록하셨습니다. 즉, 성서의 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의 지식수준과 손을 빌려서 당시 인간들의 이해수준에 맞도록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그 기자의 사고방식이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네복음서의 차이점들은 복음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로서 사도들의 활동과 메시지 그리고 바울 사도의 일생과 전도여행,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면서 교회들이 설립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문의 논설에 해당됩니다. 박해받던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신학 전문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서신들은 바울 사도나 그외의 몇몇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글들로서 주로 당시의 신앙공동체이던 교회들이나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그래서 '서신( 書信 )이라 부르지요, 그 서신들에는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요한 계시록은 흔히 '묵시서'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받던 시절, 요한 사도가 밧모섬에서 귀양살이를 할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당시에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과 박해자 로마의 미래운명 그리고 이 세계의 미래와 종말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쉽게 해석할 수 없도록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이 때문에 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생겨나기도하고, 시한부 종말론 사건들이 생겨나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특히 상징(symbol)을 사실(fact)로 해석하거나, 비유나 은유를 문자 주의적으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 잘못 해석할 때 여러가지 오해와 이단 학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가 취하고 있는 문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성서해석의 지름길입니다.
4. 성서의 컨텍스트를 이해하라
성서의 본문(text)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이 처한 당시의 상황과 맥락(context)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학 전문 용어로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도 하지요.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정황을 '삶의 자리'라 하는데, 그 삶의 자리를 떠나서는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삶의 정황 속에서 살고 있던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언어로 당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서의 컨텍스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곧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뜻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의 여신도들을 향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앞뒤 맥락 다빼고 또 바울 사도 당시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상황도 배제한 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의 성직 임명을 반대하는 근거로 삼았던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목사나 신부나 장로가 되면 교회에서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이 성경 말씀에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의 오류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문화적 특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파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중에 후처를 두명씩이나 둡니다. (창 16장, 25장). 게다가 야곱은 처가 도합 네 명이었지요(창 29-30장).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도 중동지역의 베드윈족들은 일부다처주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중동의 히브리 문화에서 남성은 생명을 주는 주체요 여성은 생명을 받는 씨받이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억울하겠지만 어쩔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성은 남의 씨를 받아 후손을 계승시켜주는 도구적 역할을 한것입니다.
따라서 아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성과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여자'로서나 '인간'으로서 모든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처럼 베드윈족에게서 특별히 성별( 聖別)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후손 계승은 신성한 계율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자손을 남겨야 했습니다.
그 실례로, 창세기 38장에 보면, 오난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오난의 형 엘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자 오난은 형을 대신해 자손을 남겨 주기 위해 형수 다말과 동침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성한 계율이었기에 피할 수 없는 행사(?)였지요.
그런데 오난은 형수에게 자기의 자식을 남겨 주기 싫었던지 피임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오난은 신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자손계승의 신성한 계율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이 오난의 이야기에서 '오나니즘(Onanism, 질외사정법)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삶의 정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성서에 담긴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 됩니다. 성서에 기록된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몇 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문자주의적으로 직수입한다면 많은 오해와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은 성서를 무가치한 책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이단 종파를 양산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성서의 컨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할 때만이 성서 텍스트는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항상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
<저자소개>
* 강영선
한신대학교 교수. 교목실장
한국신학대학과 동대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교역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는
『생명의 축제』(다산글방)
『구원의 축제』(민들레책방)
『기독교에 관한 대학생들의 질문 60가지』(한신대출판부)
『성서의 세계』(공저, 한신대 출판부)
『평신도 교역론』(노마 쇼우척, 한신대 출판부)
등이 있다.
-----------------------------
『성서이야기 한마당 』
-젊은이들을 위한 눈높이 성서 강의-
2003년 3월 30일 초판 1쇄
2008년 2월 20일 초판 7쇄
지은이 : 강영선
펴낸이/정지강
펴낸곳/대한기독교서회
편집책임/하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