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 / 김문호
호롱불이라 한다. 부지중에 잃어버린 가연(佳緣)을 불식간에 재회하듯 반가운 이름이다. 내 삶의 시원에서 전원의 고개를 넘고 객지의 강을 건너 아스라이 비쳐드는 까만 불빛이다. 그러나 내 회억 속의 그것은 초저녁 하늘의 개발바라기보다 맑고 밝은 별빛이다. 내 유년의 순수와 소년의 푸른 서정이 엉긴 광채다.
어릴 적 고향집의 야간조명은 호롱불이 그 대종이었다. 연꽃 봉오리만한 사기 옹기에 석유를 채우고 뚜껑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는 단순구조였다. 그러나 당시로선 긴요한 생활도구였다. 주경(晝耕)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야독(夜讀)과 하루의 내조를 마감한 어머니의 길쌈 바느질에 불가결의 이기였다. 만뢰가 눈 속에 잠든 밤, 마당의 감나무로 내려온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무서워서 심지를 바짝 돋우면 끝내 콧구멍을 가맣게 그을려놓던 내 앉은뱅이책상 위의 총알만한 주홍 불꽃.
내 고고지성의 삼경에 첫 시각(視覺)을 열어주었던 호롱불의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개항의 물결에 미국의 석유상이 얹혀오면서부터라고 하지만, 석유 이전의 원조 조명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지금껏 인간이 불을 피운 추정으로는 베이징 교외와 요르단 강 유역의 호모사피엔스, 즉 네안데르탈인과 북경원인들의 70만 년 전 유적이 최고(最古)라 했다. 그러나 근간에 남아공의 본더벌크 동굴에서 발견된 직립원인들의 그것이 이에 30만 년을 앞선다고 한다.
난방을 겸한 최초의 조명연료는 나뭇가지나 건초였으리라. 그러다가 수렵의 시대에는 짐승의 기름으로 개량되었으리라. 한반도의 울산지방이 지구 최초의 포경(捕鯨) 어로지역임을 천명한 반구대의 암각화에는 향유고래의 뒷골에서 기름을 퍼내는 모습이 있다고 한다. 약 6천 년 전 신석기시대의 우량 등유였으리라. 그러다가 농경시대에는 피마자, 아마 등의 식물기름이 조명의 효율을 보탰을 것, 그러나 이들은 기름표면에다 심지를 대고 불을 켜는 접싯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천 년, 불과 백삼십여 년 전에 등장한 호롱불이야말로 그때껏 조명의 총아였으리라. 접싯불보다 몇 배나 밝으면서 밀폐된 옹기에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는 최초의 장치였다. 화석연료인 석유의 놀라운 인화성 덕택이었다.
내 유년과 소년의 그것은 그야말로 가친(可親)의 등화였다. 아침에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는 것은 언제나 호롱불 아래에서였다. 들판에서 해를 넘긴 일꾼들의 귀가에 맞춘 저녁식사 자리였다. 그때 아버지와 나와 남동생이 개다리소반 독상을 받고 앉은 맞은편에서 어머니와 세 누나가 양푼식사를 하던 우리 집 등잔 위에서 잘 피어난 호롱불이 가화(家和)의 표상인 양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런 밤이면 바늘 끝으로 심지의 불똥을 뜯어내며 불꽃을 다스리던 큰누나의 수완이 경이로웠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면 사랑채의 조부모님께 저녁문안을 드린 삼촌들과 일가 어른들이 우리 집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휴가를 나온 군인들의 전쟁담이며 도시로 나간 사람들의 뒷얘기가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무릎 위로 스르르 잠들던 시간이 행복했다. 연방 호롱불로 불을 댕기면서 피워대는 어른들의 대담배연기가 눈에 맵도록 자욱했지만 내 숙면의 꿈결에는 하등의 지장이 없었다.
앞뒤학년 또래들과 모여 놀면서 어른들 몰래 화투를 치기도 하고 텃밭의 감자나 배추뿌리를 캐다먹던 겨울밤의 추억도, 대처의 중학을 꿈꾸면서 두툼한 ‘입시’책에 몰두하던 야반의 부엉이 울음에 가슴 떨던 흥분도 호롱불과 함께였다.
문방(文房)에 사우(四友)라면 등방(燈房)에도 네 벗이 있었다. 예의 호롱 외에 등잔, 기름병, 성냥이 그들이었다.
등잔은 호롱불을 생활눈높이에 맞추어 편리한 위치로 옮겨놓기 위한 도구였다. 사각 아니면 원형의 밑판에 40센티미터 가량의 수직대를 세우고 호롱 잔을 참새 집처럼 올려놓은 구조였다. 웬만하면 이수(螭首)나 꽃무늬 조각에 색깔을 입힌 치장이었다.
기름병은 두 홉들이 유리병이었다. 읍내의 5일장에서 됫병으로 사 와서 방방이 덜어 쓰는 형편이었다. 병목에다 고리를 묶어 아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벽에다 걸어두고 썼다. 인화성의 위험도 있었지만 홉으로 되어 파는 석유가 워낙 고가였다. 오죽하면 관솔불로 지내는 집들이 드물지 않았을까. 밤이면 바느질을 못하는 순이 엄마에게 하늘의 달이 따다 주자던 동요가 스스럼없던 시절이었다.
성냥곽은 소두됫박만한 마분지통에 성냥개비를 세워서 채우고 주위의 입면에 적린(赤燐)가루를 바른 사각 혹은 원통형의 용기였다. 이 또한 석유 다음으로 비싼 소모품이어서 성냥개비를 다 쓰고 나면 그것만 뒷박으로 사다 채우곤 했다.
호롱불이 어둡다고 느낀 것은 중학교로 진학한 다음이었다. 주말이나 방학에 고향집의 일차적 불편은 바로 호롱불이었다. 제사가 드는 입제일(入齋日)이나 음력 제석(除夕), 석유에는 옛 사람들의 뼈가 녹아있다면서 호롱불 대신 켜던 나달상어기름불처럼 어둡고 답답했다. 그새 30촉 백열등에 눈을 맞춘 건방이었다.
호롱불이 다시 밝게 느껴진 것은 사춘기가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풀벌레 울음소리에 끌려 계곡과 들판을 쏘다니던 가을밤, 문득 건너다본 마음의 불빛이 또 하나의 별꽃인 양 영롱했다. 내내 우러르던 하늘의 꽃밭에 손색없이 맑고 빛났다.
진정 빛나는 호롱불은 눈 내리는 밤의 그것이었다. 눈밭 사이로 반짝이는 창호지 불빛은 별 중에서도 가장 밝고 고운 별빛이었다. 그때 나만 애태우던 선배 소녀네 그 집 앞까지 십여 리의 눈발 속을 밤새 헤맨 것도 바로 그 불빛 탓이었다. 그녀 또한 잠 못 들어 지새는 호롱불 창가의 그림자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내 문학소년 친구의 구절, “눈 오는 밤엔/ 옥이 방 문살에 오롯한 그림자, 재 너머 그분은 잠드셨을까?”처럼.
이제는 고향을 찾아가도 초가지붕 박꽃처럼 그리운 그 불빛이 없다. 밤마다 쏟아져 내릴 듯 영롱하던 하늘의 별꽃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올림포스의 암벽에 결박당한 채 낮마다 심장을 물어뜯기는 프로메데우스의 백만 은총을 하루아침에 벗어던진 원죄에의 응보다. 두 번째의 불인 전기의 편의에 분간 없이 빠져든 경망의 대가다. 누구라도 꿈엔들 잊힐 리 없는 초라한 지붕 밑 희미한 등불과 그 불빛 아래 도란도란 정겹던 그 시절이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낙원에의 못 돌이킬 향수인가. 하긴 지금껏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내 고향의 성광성냥마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으면서 영락없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근간의 일본 어디에서 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지구가 요란을 떨었다. 급기야는 방사능에 오염된 유령선과 축구공이 북미 서안까지 밀려가면서 동서와 피차를 구분 없이 경악시켰다. 어느 종파에서 말하는 지구의 종말은 과연 몇 번째의 불로 예비 되어 있는 것인가?
첫댓글 아련한 유소년 시절이 생각나는 좋은 글입니다. 이 같은 이야길 공유할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읽으면 원시인들의 동굴생활 을 연상할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