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열의 발로
초등학교 입학 나이를 만 6세에서 만 5세로 낮추는 학제 개편안을 놓고 요즘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교육부 쪽의 논리는 사회적 약자 계층이 빨리 체제 안으로 들어와 출발선상에서의 교육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쪽에서는 만 5세 어린이가 놀이 식이 아닌 지금의 교육 식 수업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년간 만 5세와 만 6세가 같은 학년에서 경쟁한다면 만 5세 어린이들은 출발선상에서부터 불공정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당장 취학 연령대의 아이를 둔 엄마들이 떨치고 일어났다. 너도나도 거리로 뛰쳐나와 손팻말을 흔들며 목청이 찢어져라, 절규를 쏟아냈다. 어떤 이는 눈물을 보이까지 했다. 다들 금쪽같은 자식들이 아닌가. 이들 못지않게 목에 핏대를 세우는 쪽은 전국의 수많은 유치원 원장들이었다. 그 안이 시행되면 원생의 절반이 뭉텅 잘려 나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당연히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제 개편안을 두고 벌어지는 이번 소용돌이를 바라보노라니 문득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옛일이 떠올라 마른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8.15해방 이태 전인 열 살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만 나이가 아니고 집에서 세는 나이였다. 길천공립국민학교, 내가 입학하기 16년 전인 1927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면내 유일의 공립학교였다. 영남알프스 천 미터가 넘는 간월산, 가지산, 고헌산 아래, 태화강 상류,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자형으로 교실 일곱 개와 교무실이 있었고 드넓은 운동장과 그 둘레의 우람한 벚나무들, 교문 오른쪽에 세워진 날렵한 신사(神社), 그 맞은편엔 아담한 양옥의 교장 사택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일본말만을 사용해야 하고 신사 앞에서 일본 천황께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큰소리로 외어야 하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비록 새 책이 아닌 헌 책이었어도 선배들이 물려준 교과서를 받을 때는 만세를 부르고 싶었고 풍금 반주에 맞춰 일본 동요를 부를 때는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시퍼런 구레나룻의 야마구찌 교장 선생님과 알록달록 기모노 차림에 뽀얀 얼굴의 사모님, 세발자전거를 타는 두어 살쯤의 사내아이, 일본 사람들을 가까이서 본다는 건 동네방네 자랑거리였다.
그렇지만 쉬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60명 한 학급만 뽑는데 그 두세 배의 아이들이 몰려들기에 낙방이 일쑤였다. 나도 낙방 한 번에 입학 취소 한 번의 쓰라림을 겪고서야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첫 실패는 여덟 살 때였다. 다들 글자를 모르니 필기시험은 없고 요즘 대기업들 채용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면접시험 비슷한 걸 시행했다. 집 주소, 식구들 이름, 서당에 다녔느냐 등을 물어보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펴 보라 했다. 도리도리를 시켜본 다음 양쪽 발을 번갈아 올려 보라는 것으로 시험이 끝났다.
열흘 후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나는 물론이고 친구의 이름도 없었다. 어물어물 집 주소를 제대로 대지 못한데 다 짚신 조리의 한 쪽 끈이 끊어져 왼발은 맨발 상태나 다름없었던 게 내 낙방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보다는 아버지의 상심이 컸던 모양이었다. 술을 드시고 밤이 이슥해 들어오셔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년에는 꼭 합격할 것이라 했다. 세 살도 채 되기 전에 어미를 여읜 막내아들이 무척이나 안쓰러웠을 것이다. 이듬해인 아홉 살에는 아버지의 예언대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골목을 내달리며 ‘나 합격했다.’,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친구는 떨어지고 나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1일 입학식을 열흘쯤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입학 취소 통지서가 날아 온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울지도 못했다. 단박 학교로 달려가 삿대질하고도 남을 아버지가 꿈쩍 않고 방안에만 죽치고 있는 게 이상했다. 어쩐 일일까. 며칠 있다 자초지종이 밝혀졌다. 시험을 앞두고 어느 분의 귀띔으로 아버지가 조선인 교감 선생님께 찹쌀 한 말과 씨암탉 두 마리를 갖다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친구 아버지가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가 교감 선생의 멱살을 잡았다지 않는가. 이듬해 열 살이 되어서는 그 멱살잡이 덕분이었던지 친구와 함께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어언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곡식을 수탈해 가는 일제의 공출 제도(供出 制度)로 인해 봄이면 양식이 떨어져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는 건 우리 집이나 그 친구 집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사코 자식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집념, 한 사람은 아들의 입학을 위해 교감 선생에게 귀한 농산물을 진상하며 허리를 꺾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웃 간의 의리를 무릅쓰고 교감의 멱살을 조이며 자식의 다음 해 입학 약조를 받아냈다지 않는가.
이 모두가 요즘 눈으로 보면 미소를 머금게 하는 촌극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작농인 가난한 농부들이 굶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집념이 오늘의 풍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외국의 석학들도 우리나라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세계 경제 10위 권에 진입할 수 있었던 건 부모들의 교육열 덕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요즘 입학 연령대를 두고 벌어지는 소용돌이 또한 윗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육열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에세이스트 2022년 11,12월호 게재)
첫댓글 저는 가끔 제가 태어나 살아온 세월이 비교적 좋은 시절이었구나 싶지요.
뭐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많았지만 우리같은 소시민은 그저 강건너 불구경처럼
살기에 바빠 휘말리지 않았고 어쨌든 일제억압이나 전쟁같은 무서운 일도 없이 한 세상 잘 산 것 같아요.
이 글을 보니 학교 가는 일조차 힘든 세월이 있었구나 싶어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네요.
'그때는 그랬었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복희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의 강 회장님 뒤에는 그런 아버지의 뜨거운 열정도 있었네요.
지금은 에피소드로 얘기하지만 그 어려운 시절에도 대단한 어른들이셨습니다.
미옥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