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입니다.
오늘은 훌륭한 3분을 소개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또는 부모님의
나라를 지키러 온 3분을 기억해 봄은
어떨까요?
☞1월의 독립운동가.
조국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
□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관순(1902. 12. 16. ~ 1920. 9. 28.)
선생을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고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1월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김영옥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제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하여 참전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한국인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했고,
미 제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특히 중공군의
춘계공세 기간에 빛났습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소양강 지역을
지키던 제31연대가
철수하게 되자,
대령은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아
적을 저지하기 위해
후퇴하는 중대급 한국군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이후 5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 당시,
대령은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들을
독려하며 함께 싸웠고,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르게
진격하여 제일 먼저
캔자스 선*에 도달했습니다.
김영옥(1919년1월 29일~2005년 12월 29일)
이후 김영옥 대령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상을
입게 되는데요,
치료 이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와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1952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6.25전쟁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대령은 그 공로로
미국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부모님의 나라를 지킨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육군 대령!
동포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국군과
등을 맞대고 함께 적에
맞서 싸웠던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1월의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의 헌신을 기억해 주세요.
☞ 전쟁기념관 1월의 호국인물
연제근 상사.
6.25 전쟁 발발 후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유엔군은 일제히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 방어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3사단은 포항
인근 형산강 북쪽을 점령하고
있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형산강 남쪽으로 밀리는 등
고전했다.
특히 형산강 북쪽 달전리에
있던 적 기관총 진지에서
퍼붓는 맹렬한 사격으로
접근이 불리해지자
연 상사는 12명의
특공대원을 결성했고,
9월 17일 새벽 4시경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선봉에 섰다.
대원들은 수류탄을
몸에 매단 채 수중으로
형산강을 건너던 중
적의 공격을 받아
9명이 전사했다.
연 상사도 어깨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으니
남은 대원 2명과 함께
끝까지 돌진해 3발의
수류탄을 적 기관총 진지에
투척해 완전히 제압했다.
당시 21세이던 연 상사는
이 과정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고인의 목숨 건 희생과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형산강을
건너 포항지역을 수복했고,
국군 3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반격작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정부는 연 상사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
연제근 상사 (1930년 1월14일~1950년 9월17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분들의 뜻을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