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세요
모든 검사를 끝내고 의사 앞에 앉았다. 상당히 젊은 의사다. 눈이 크고 광채가 난다. 마스크로 얼굴 반은 가린 상태라 전체적인 인상은 다 볼 수 없지만 담담하고 의지가 강해 보인다.
의사 선생님 앞에 앉으니 무슨 말부터 물어보아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암은 어느 정도이며, 수술하면 괜찮은 것인지, 언제 수술은 할 수 있는지 궁금한 것은 많으나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술 날짜를 잡고 진료가 끝났다. "저~ 선생님!"하고 불렀다. 의사는 예의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말씀하세요" 한다. "저, 선생님 참으로 대단하세요." 불쑥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의사도 딸아이도 남편도 일순간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정말 대단했다. 여기가 어느 병원인가. 온 나라가 알아주는 S대학병원 아닌가. 의사로 인정받고 당당하게 이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뼈저리게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나 아픈 것보다 의사선생님이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진지하게 거듭 '대단하다'는 내 말에 의사도 간호사도 보호자도 한순간 풋! 웃음이 터진다. 다들 웃으니그제야 나도 웃음이 난다.
모든 시스템이 AI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적막하고 무음 상태인 공간에 내 말 한마디가 잠시 그렇게 웃음을 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렇다고 웃기려고 작정하고 한 말은 아니다. 진심이었다.
7일간 병실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날이다. 병실은 밤과 낮이 구별되지 않는다. 밤낮없이 나를 위해 애쓴 간호사를 생각하니 그냥 말없이 퇴원할 수 없었다. 뭐라도 고마움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누워서 느꼈던 마음을 그대로 종이에 적어서 침대 위에 놓고 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땅에서 빛나는 해는 의사 선생님!
땅에서 빛나는 별은 간호사 선생님!
땅에서 빛나는 달은 청소하는 아주머니!
서울대학병원에는 밤낮없이
해와 별과 달이 반짝거린다.
수많은 환자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찬란한 빛이다.
수술 잘 받고 퇴원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그분들에게 주는 진심이 담긴 글 맞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분명 그분들은 태양이고 별이고 달이었다. 고맙다는 말로는 다 표현될 수 없는.
퇴원 후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는다.
수술 후, 뼈를 난도질하는 통증은 지속해서 힘들게 했다. 살기 위한 고통인데도 아프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로또 맞은 셈 치세요. 폐암은 수술할 수 있을 때가 완치율이 높습니다"라는 의사 선생님 조언을 위안 삼아 견뎠다.
수술한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도 진료받는 날이다. 검사하러 갈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혹여 그동안 탈이 나지는 않았는지 불안과 초조가 앞을 가린다. 이만큼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서도 털끝만큼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이 나를 작게 만들곤 한다.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게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걱정한다. 아, 나는 어쩔 수 없이 하찮은 피조물인가 보다.
대기실에서 딸아이와 함께 내 이름 석 자 부르기를 학수고대한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빛의 속도로 의사 앞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두 눈을 반짝거리며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간호사도 별처럼 반짝이며 임무에 열중이다. 문득 환자들보다도 의사나 간호사들이 더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끊이지 않는 이 많은 환자를 고치고 살리고 희망을 주려면 곱절로 더 건강해야 한다고 두 손을 모은다.
진료받는 날이 가까워지면 수술 부위가 더욱 욱신거린다. 잔뜩 주눅이 들어 의사 선생님 표정을 살핀다. 모니터를 살펴본 의사 선생님은 예의 그 빛나는 눈빛으로 "잘 지내셨습니까?" 한다. "네에, 잘 지내긴 했는데요..." 나는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수술한 지 꽤 되었는데도 자꾸 결리고 아픈 것이 불안한 까닭이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간단명료했다.
"검사 결과 이상 없습니다. 잘 지내시다가 3개월 후에 또 봅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온몸에 생기가 돈다. 결리고 아프던 가슴이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하다. 나에게 확고한 의사 선생님 말 한마디는 위대한 해독제였다.
이상이 없다는 말에 기분이 한없이 올라간다. 그 힘을 빌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저~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하고 말했다. 의사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그 심각한 반응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 아니, 거절하셔도 돼요."했다. 의사는 기어코 들어야겠다는 듯이 "뭐, 뭔데요 말씀하세요" 한다. 옆에 있던 딸아이도 당황해한다. 뒤에 있던 간호사도 하던 일 접고 얼른 뒤돌아본다. "거절하셔도 되니 절대로 부담 갖지 마세요."라고 하는 내 말끝을 잡고 의사는 커다란 눈으로 재촉한다. "저 선생님, 같이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될까요?"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제발 거절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순간 진료실이 풋! 하고 웃음이 터진다. 의사도 간호사도 딸아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침묵이 흐르고 긴장감이 감도는 진료실은 불이 켜져 있어도 어둡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둠 속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수많은 환자를 대하고, 환자들은 희망을 붙잡으려고 미로 속을 헤맨다. 어두운 공간에 반짝 전등이 켜진 것처럼, 우리의 웃음으로 한순간 진료실이 밝아진 느낌이다. 의사 선생님은 거절해도 된다는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럽시다, 찍읍시다" 하면서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라고 한다. 딸아이가 얼른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오늘도 땅에서 빛나는 태양이 웃는다.
첫댓글 마음 따뜻해지는 수필 한 편 올립니다.
따뜻해집니다. 그러고보니 언제엿던가 오래전에 저도 그 비슷한 마음을 느꼇을 때가 있엇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이런일도있네요. 환자는 어쩌면 의료진들을 이런 유머로 뭔가를 가르치네요. 의료인들은 더 열심히 환자를 기분좋게 돌볼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