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TV에 중계되는 대 우즈베키스탄 전을 보면서 나는 얼핏 장기판을 떠올렸다. 장기 말을 벌이는 것조차도 어쭙잖은 나로서는 뜬금없는 생각이긴 하다.
한(漢)나라 왕이거나 초(楚)나라 왕이건 대저 왕들은 놀고먹는 족속들이라 대체로 궁정 담 안을 떠나는 일이 드물다. 하여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 지기 마련이어서 장기 말들 중 뚱보가 한 초 아니던가. 걸음걸이조차 고작 1회 1보다.
졸(卒)은 어떤가. 왕을 호위하느라 좀처럼 왕 곁을 떠날 날이 없는 저들로서는 세상 견문이 좁고 스케일이 쫀쫀하다. 자연 행동거지가 좀상스럽고 보폭이 좁아 그 또한 1회 1보 형이다. 요즘 세인의 입방아감이 되어있는 십상시(十常侍)나 사극에 나오는 환관 내시들의 옹송그린 자세며 그 걸음걸이를 연상해 보시라.
말(馬)은 그 걸걸한 네 다리로 가로지른 밭 담 하나쯤은 훌렁 뛰어넘는다. 그것을 본 따서 마장마술 경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한 번에 고작 담장 하나를 넘어 일(日)자로 가는데 만족해야 한다.
코끼리(象)는 그 우람한 덩치마따나 그 스케일이 걸쭉하다. 한 걸음 도움닫기를 하고선 밭(田) 한가운데를 성큼 내지른다. 그런 만큼 굼뜨고 거친 것이 흠이다.
한편 포(包)는 앞에 장애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앞에 꼭 장애물이 있어야 작동한다. 소총이 장애물(엄폐물)이 있으면 무용지물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앞에 산이든 강이든 장애물을 설치해 놓아야 발포가 된다. 포가 그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낸 예를 우리는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여실히 보았다. 북한군 포가 바다라는 장애물을 이차함수 포물선을 그리며 넘어와 연평도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좋은 보기이다. 또 포가 동족을 잡아먹지 않는 미덕은 동족상잔을 일삼는 우리 인간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차(車)란 놈은 바퀴가 달린 까닭에 밭담이나 산 강 바다 같은 장애물 앞에선 옴짝 달싹을 못한다. 제 앞에 제 편인 졸 하나 개미새끼 한 마리만 있어도 수족 마비가 된다. 하지만 장애물이 제거 되고 돌격 명령이 내려지면 구석에서 웅크려 판세만 관망하던 놈이 수 십 미터건 백 미터건 단숨에 돌파해서 상대를 넉 아웃시키고 마는 저돌성이 있다.
그런데 그런 차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어제 생중계된 그 축구 경기에서 일 말이다. 장애물 하나둘, 아니 서너 개 쯤은 조밭에 가라지조 쓰러뜨리듯 제치고 내닫는 신종 차를 나는 어제 보았다. 현대기아도 지엠대우도 르노삼성도 자동차 선진국 독일의 BM-W도 못 만들어낸 차.
미끼 하나를 놓고 드넓은 수조에서 스물두 마리의 고기들이 쫓고 쫓기는 다툼을 하고 있었다. 수조 옆 벽 쪽에서 한 놈이 잽싸게 먹이를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한 달음으로 내달아 반대편 수조까지 내달려갔다. 지키고 뺏으려는 고기 몇 마리가 앞을 가로막고 어쩌고 해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마치 먹이를 꼬리지느러미에 본드로 붙이고 내닫는 형국이었다. 마지막 순간 먹이를 같은 편의 고기에게 툭 던져 주었다. 그것을 받은 손흥민 고기가 받아 잽싸게 상대 골문 안으로 차 넣었다. “골인!” 함성이 수조 사방에서 터졌다. “그 골은 99프로가 차두리의 골”이라는 것이 해설자의 평이었다.
경기는 이미 1대 0으로 앞서 있었고, 연장전 막판이었다. 1분 정도만 버티면 승부는 이미 나 있었다. 애써 무리하게 굴다가 실점 하느니 그냥 지키는 게 상책인 상황이었다. 두리 선수는 꼭 한 골 더 넣으려는 욕심 보다는 그저 그냥 공을 ‘한번 차두리’라는 직업의식, 아니 가문의 DNA에 따라 툭 차 두었던 것이 정말로 골과 연결된 빌미가 된 것이리라.
한 가문이 한 직업에 대를 이어 성공하려면 첫째 성(姓)을 잘 받고 나와야 하고, 둘째 이름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나는 경기 초반부터 열 한 명의 우리 대표 멤버들 중에 유독 차두리 만을 눈 여겨 보기로 했다. 차두리가 누구인가. 그 선대는 7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의 전차 군단에서 ‘갈색 독수리’로 이름을 날리던 차범근 선수가 아닌가. 그의 별명은 ‘차.차.차’였다. 첫째도 車는 것, 둘째도 車고 달리는 것, 셋째도 車 넣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아기를 가지려는 예비 엄마 아빠들이여! 아기를 낳아 출생신고를 하려거든 부디 작명에 정성을 들이시라.
(2015.1.24)
첫댓글 ㅎㅎ
축구경기를 보고 이렇게 이름풀이까지 하실 줄이야..ㅋㅋ
어쩌지요, 저흰 "차"씨가 아니니 축구는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할까봅니다.
"김" 씨 성을 가진 우리 아들들은..ㅋㅋㅋ
김씨 가문이라면 '김치국'이라는 베스트 네이밍이 있지 않습니까? 쪼잔하게 가로 세로 130*100 야드 안에서 놀지 말고. ㅎㅎㅎ
공자님 말씀의 대 명제 "치국평천하"도 있고...
@샘기픈믈 ㅎㅎ 역쉬~!
김치국평천하. 굿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