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의 앵무새 / 김영애
동물원에 들어섰다. 뜨거운 햇볕 속 새장에 갇힌 초록 가슴의 빨간 머리 앵무새가 눈에 들어온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했던지 앵무새는 지친 표정으로 새장 한 구석에서 졸고 있다. 아프리카의 푸른 정글에서 밀림의 자유를 만끽하던 새가 무슨 인연으로 사막인 캘리포니아 동물원까지 온 것일까. 불현듯 일상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연민의 마음이 인다. 쇠창살의 일정한 간격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 나의 영혼도 앵무새처럼 졸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새로움을 찾아 미국 땅에 온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으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한국의 조급한 생활 습관에 젖어 모두가 느긋하게 걷는 교차로조차 뛰어서 건넜다. 먹이를 받아먹는 어린 앵무새같이, 낯선 영어 단어들을 지식의 먹거리로 조금씩 받아먹던 시절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문법에 어긋나 어섯도 안 되는 영어로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 얼굴조차 기억되지 않는 뚱뚱한 흑인 여자는 내 말이 답답했던지 아니면 영어를 배우려 애쓰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말끝마다 고쳐주며 얘기를 이어갔다. 어쩌다 만난 미국 할머니는 단어의 악센트까지 몇 번씩이나 반복시키며 나를 연습시켰다. 까만 입의 앵무새가 부리 속의 둔한 혀를 굴리며 사람의 언어를 익히듯 나도 그렇게 낯선 말을 익혀 갔다.
매콤한 김치와 눈부신 흰밥에 길들여진 나, 언제부터인가 기름진 스테이크와 기름에 튀긴 감자는 나의 깊은 내부에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 벼르고 별러 끓여낸 매운 김칫국에 하얀 밥을 며칠이고 먹어본다. 더 이상 김치와 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붉은 고추 빛으로 가슴에 맺힌 진한 향수(鄕愁)이다. 모든 빛을 받아들인다는 하얀 빛의 쌀밥조차 강물 같은 망향의 한을 삭히지는 못하는지, 목마른 향수는 아무리 먹고 먹어도 풀리지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고향인 서울을 방문할 때의 기쁨은, 강물이 바다를 만난 듯 무척이나 들떠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만으로도 손끝에 들여진 봉숭아물처럼 마음 한 모서리가 진한 설렘으로 물들었다.
가슴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고향 땅에는, 큰 산과 나무들이 청잣빛 하늘 아래 꿋꿋하게 서 있고 그 앞으로 나지막한 야산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틀었다. 그 옆으로는 삐뚠 자로 그은 듯 작고 예쁜 초록 논밭들이 서로 정답게 살을 붙이고 있었다. 산등성 아래 겸손하게 몸을 낮춘 초가집은 늙은 어머니의 모습같이 고즈넉하게 낡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러나 공항을 지나 차창 밖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은 아파트 산맥이라고나 할까. 놀랄 만한 발전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 높이만큼 커진 고독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어져야 할 푸른 산천이 사라져서인가, 각진 모서리로 단절된 빌딩들은 쏟아지는 빛 속에서 휘청거리며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나무숲 사이로 한가로워야 할 푸른 바람은 겹겹이 쌓인 차가운 인조 불빛에 밀린 듯 왠지 모를 썰렁함으로 외롭게 떨고 있었다.
강나루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조개 문양으로 춤추는 강을 건너면, 아늑하고 나지막한 바람 숲에서는 서로의 뼈를 비비는 나무들이 붉은 노을 속에서 풍성한 하루를 마감했었다. 그곳에는 평생 손님을 실어 나르던 낡은 나룻배의 삐걱거리며 노 젓는 소리와 햇볕에 반짝이던 나루터의 은빛 모래들 대신, 벌거벗은 아파트들만 무섭게 줄지어 서 있었다. 온 산의 나무를 자르다 못해 산의 심장을 도려내고 바람 길을 끊어 놓더니, 마침내는 나의 추억까지 그 숨을 옥죄었다. 공룡 같은 빌딩들은 내 마음속의 온갖 추억들을 가차없이 몰아낸 것이다.
고향은 사는 사람들만의 몫인지, 자신의 모습을 훼손시키고 실종시킴으로써 사랑하는 이와의 정을 끊으려나 보다. 변함없는 고향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데,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으니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스러워진다. 어쩌면 추억은 사람 흉내를 내는 앵무새 소리가 사라지면서 생기는,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소리의 여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추억어린 광화문 네거리에 다다랐을 때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곳은 학창시절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정든 곳이었다. 수줍기만 하던 작은 빵집도, 신호등 네거리의 평화롭고 아늑했던 정취도 찾을 수가 없다. 셀 수 없이 많아진 차선과 수많은 지하철의 입․출구로 혼란스럽게 뒤엉켜 도무지 향방을 헤아릴 수가 없다. 내 집, 내 땅을 그렇게 헤매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야흐로 고향에서조차 낯선 사람이니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광화문 모퉁이를 돌며 추억을 잃은 상실감에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과거는 너무도 숨 가쁜 현실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는지 잊지 못할 추억조차 슬프게 무너뜨렸다. 찾아간 고향은 송두리째 도난당해 허무하게 실종된 것이다. 고향에서조차 고향을 잃어 실향민이 된 나, 이제 나에게는 고향도 타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차 백미러에는 사각지대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거울에 비쳐지지 않아 실체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공간이다. 나의 기억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든 실체가 사라진 까닭에 나의 혼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안타깝게도 추억은 실체 없이 혼만 남은 그 무엇이 되어버린 것이다.
앵무새 장을 막 떠나려 하자 졸던 앵무새가 느닷없이 투박한 소리로 “아이 러브 유”라며 애교를 부린다. 앵무새의 사람 흉내가 내 영어 발음처럼 어설프고 서툴다. 밀림을 떠나 사막 캘리포니아의 까칠한 팜츄리 아래에서 낯선 영어를 더듬는 앵무새와 고향을 떠나 모자란 언어로 살아가는 내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밀림을 떠나 언어가 다른 세상의 동물원에 갇혀 있는 앵무새, 어찌 보면 사람의 언어와 새의 언어의 사각지대에 있는 앵무새가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저녁 해를 등지고 동물원을 나선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빨강머리 앵무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