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쓸기
잠결에 맛본 텁텁한 공기는 서서히 몰려 나간다. 내 안에 자리한 안개들이 밀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의 긴 시간을 짙은 안개 속에 갇혀 헤매었다. 지저분한 꿈에 시달린 것이 언제부터이던가. 오래되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구겨진 꿈은 내가 알아채면 아니 되는 것이나 되듯 뿔뿔이 사라졌다. 조금 전에 꾼 꿈도 안개처럼 바람결에 흩어졌다.
마당에 내려서니 아침 공기가 달다. 마당을 쓰는 게 일상이 된 나는 싸리비를 든다. 하루를 열어가는 첫 행위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당은 지저분하다. 지난 시간의 앙금처럼 자국들이 널브러져 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마당에는 온갖 발자국이 엉켜 있다. 큰 신의 흔적도 있고, 아주 조그마한 것도 함께 따라가고 있다. 분명 큰 것은 어른의 것이겠고 작은 것은 아이의 것일 게다. 또 볼이 좁은 것은 여자의 자국이고, 넓은 것은 남자의 흔적이다. 그중에는 진중하게 삶을 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다에 능숙할 만큼 가벼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흔적만이 아니다. 가끔 새들의 주검이 누워 있기도 하고, 바람결에 날아온 쓰레기가 뒹구는가 하면, 나무들의 잔가지가 널브러져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어지러이 널려 있는 저마다의 자취가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다. 지저분한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빗자루를 든다.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은 남다르긴 하다.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일로 하루가 시작된다. 물론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수시로 빗자루를 든다. 마당 한 구석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체를 쓸어나간다. 치워야 할 쓰레기가 많건 적건 눈에 설어 마뜩잖으면 습관적으로 비를 든다. 나의 비질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 신기하게 도망친다. 한참을 쓸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자취는 모두 없어지고 내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나를 따라오고 있다. 깨끗한 마당에는 여유 있게 걸어간 내 흔적만이 남아 있다. 자국의 모습은 그리 크지 않다. 두 발 사이가 옆으로 벌어졌다는 것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 있게 걸어 나갔음을 보여준다. 자세히 살펴보면 거만하고 도도하기도 하다.
다른 이들의 흔적이 모두 달아난 깨끗한 댓돌에 앉으니, 어디에서 찾아왔는지 모를 희열이 옆에 와 쪼그리고 앉는다. 잡티 하나 없이 민낯이 드러난 마당. 싸리비의 자국만이 그들의 가벼운 저항을 암시하고, 그것을 짓밟듯이 성큼성큼 이어진 내 발자국은 마냥 대견스럽다. 그 발자국은 다른 이의 흔적을 송두리째 지우고 나만의 것으로 덮어버린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이 짓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너덧 배는 일을 하며 생을 꾸려왔다고 자부해왔다. 밤을 쪼개어 잠을 갉아먹으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해왔다.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워 어깨를 펴고 으스대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호기스럽게 웃기도 하였다.
시원하게 쓸어 놓고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마당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흐뭇해했던가. 그 누구의 발자국도 없는 나만의 흔적만이 가득한 마당을 바라보며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희열을 맛보았던 지난 세월, 댓가지가 밀어낸 흔적이 선명한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내 힘이라 여기며 스스로 도취되었다.
댓돌에 앉아 바라보니 이따금씩 남은 비질의 궤적선이 선명하다. 선은 마당의 표피를 파고들어 날카롭게 할퀴고 있다. 그것은 마당의 생채기가 아니라 억울하게 지워진 흔적들이 저항하는 절규이다. 생을 다해 쌓아놓은 공덕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람에 대한 원망의 몸부림이다. 다른 이들의 공적은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놓은 나에 대한 무언의 함성이다. 비질의 날카로운 선이 화살촉으로 일어선다. 내 것만을 내세우려는 건방진 욕구에 정확히 맞추면서 돌진해온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던 희열이 송두리째 사라지며 회오리바람이 마당을 핥는다. 비질의 궤적은 조금씩 사라지는데 내 발자국은 아직도 선명하게 우쯜대며 남아 있다. 뭣이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다 지우고 제 흔적만 남겼는지. 한평생 앞만 보고 비질을 했으니 참으로 우매한 짓만 하였다. 이렇게 살았으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흠집은 또 얼마나 많을까.
더는 댓돌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비를 들고 다시 마당을 쓴다. 이번에는 뒷걸음질을 하면서 비질을 한다. 처음이다 보니 생소하다.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내 발자국을 지워나간다. 선명하게 찍혔던 발자국은 사라지고 싸리비가 할퀸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저들의 억울해하던 함성은 오랜 시간 후에도 내 가슴에서 지워질 것 같지 않다. 이제 내 발자국은 지웠으니, 저 함성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시간을 기다릴 일이다. 언젠가 쏴한 바람이 지나면 공기도 단맛으로 다가오리라.
첫댓글 자신을 성찰하는 멋진 분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