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의 어느 날
강 철 수
볕에 달궈져 하얗게 빛나는 신작로를 물방개처럼 반짝이는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라 지오 형과 나는 짐을 내려놓고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 그 차가 끼익 소리를 지르며 우리 옆에 멈추는 게 아닌가 . 너무 생급스러운 일이라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 길섶으로 충분히 비켜 서 있었는데 “야들아 ! 우리가 이제 해방됐다 안카나 . 인자 그 짓 안 해도 되능기다 .” 차에 탄 아주머니가 우리 앞에 놓인 송진 초롱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기쁨에 들뜬 목소리였지만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자갈을 튀기며 다시 떠나는 차의 꽁무니에서 날아오는 매캐한 냄새가 속을 울렁거리게 했을 뿐이다.
“성, 해방이 뭣꼬 ?”
“나도 모린다 , 첨 듣는 말인데 우예 알겠노.”
모르는 게 당연했다 . 앞뒷집에 사는 열두 살, 열다섯 살의 우리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 아닌가. 그날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 년 8 월 15 일에서 이틀이나 지난 8 월 17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고장에서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우리는 송진 초롱을 매단 막대를 둘러메고 다시 학교로 가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따귀를 올려붙이는 호랑이 같은 야나기 선생에게 치도곤을 당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 작달막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는 조선 사람이면서도 노상 학생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년들을 훈련 시켜 일본군에 입대시키는 교관까지 겸하고 있었기에 그는 어른들에게도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학교는 신작로를 벗어나 논틀밭틀을 지나 널따란 내를 건너야 할 만큼 멀었다. 초롱의 무게 탓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막대가 낭창거려 어깨판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조리 (볏짚으로 만든 샌들 )에 잔돌이 박혔는지 발바닥이 따끔거리고, 힘을 받은 장딴지는 뻐근하다 못해 물고기 부레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멱을 감은 듯 땀투성이가 되어 학교에 도착했다. 먼저 교문 안쪽에 있는 신사 (神社 )에다 예를 올리고 교무실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 방학 중에도 꼭 나와 있던 야나기 선생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선생은 물론이고, 송진을 저울로 달아 드럼통에 붓는 소사 아저씨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신사 맞은편에 있는 교장 사택 쪽으로 가 보았다. 벚나무 위에서 매미 소리만 요란할 뿐 역시 인기척이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하얀 얼굴에 멜빵바지를 입은 앙증맞은 꼬맹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구레나룻 자국이 시퍼렇고 송충이를 올려놓은 듯 짙은 눈썹의 야마구찌 교장이 코스모스처럼 가냘픈 부인과 함께 아이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학교에 아무도 없다니…. 무슨 일이 났어도 크게 난 것 같았다. 우리는 송진 초롱을 버려둔 채 집에 가기로 했다. 막 교문을 나서려는데 쿵지락쿵지락, 농악대를 앞세운 사람들이 뭉게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이 동네 저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고장 사람들 모두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손에손에 내가 처음 보는 태극기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공책을 찢어 급하게 크레용으로 그린 것이나 일본 국기를 먹물로 대충 고친 것이 태반이었지만, 더러는 농 속에 감춰 두었던 듯 접은 자국이 뚜렷하고 색이 바랜 천 깃발도 있었다. 그것들을 일제히 하늘 높이 치올리며 “해방 만세 !” “독립 만세 !”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느 할아버지는 만세를 부르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소리 내어 흐느끼기도 했다 .
해가 뉘엿뉘엿 서쪽 산으로 기울자 넓은 운동장이 사람들로 꽉 차는 것 같았다. 농악대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패였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던 그들이 가운데로 모여 같은 가락으로 소리를 내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덩실덩실 모두가 춤을 췄다. 하나같이 기쁨에 상기된 얼굴이었다. 온갖 공출과 부역에서 벗어나게 되어 저러지 싶었다 .
춤판이 달아오르자 학생들은 운동장을 벗어나 교문 바로 앞에 있는 원예 실습장에 진을 쳤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우리 학생들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송진을 따지 않아도 되고, 우리말을 아무 곳에서나 해도 되고…. 밭에는 일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어른 주먹만 한 토마토가 발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상급생들이 분뇨를 져 날라 가꾼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따서 친구들에게 던지며 낄낄대기만 했지, 먹지는 않았다. 달지도 시지도 않고 밍밍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아이들이 신사에다 토마토를 던지기 시작했다. 교문을 들고 날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황국신민선서 (皇國臣民宣誓 )”를 외치며, 일본 천황께 충성을 맹세하던 일이 원통했던 것이다. 모두가 경쟁이라도 하듯 던지는데, 나라고 빠질 수는 없었다. 척! 척 ! 토마토가 신사 벽에 부딪히는 소리는 지오 형과 내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송진에다 밀가루를 섞었다가 야나기 선생으로부터 뺨을 맞던 소리와 영락없이 닮은 것 같았다.
한참 후 깜깜한 하늘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청년들이 신사에다 불을 지른 것이었다.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오르는 주황색 불길.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봉화(烽火)가 아닐까 싶었다. 신사가 화염에 휩싸이는 통쾌함을 농악대들은 가파르게 치닫는 휘모리장단으로 녹여 내고 사람들은 연거푸 만세로 풀어냈다. 불길이 숙지근해지자 국방색 교련복을 입은 한 떼의 청년들이 야나기 선생을 찾아내야 한다며 교문 밖으로 달려갔다. 저들의 서슬로 보아 붙잡히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도착했다. 내 방으로 들어가 선반 위에 모셔져 있는 가미다나(神棚, 일제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비둘기 집처럼 생긴 가정용 신전)를 내렸다. 식구들이 마당으로 내던져 짓밟아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일본 신이지만 가끔 내 소원도 들어주고 우등상도 받게 해 주었다고 생각했었다. 평소처럼 손뼉을 두 번 치고 허리를 꺾어 절을 올린 다음 문을 열었다. 속에서 나온 것은 얇은 갈색의 나무판자였다. 코에 대어 보았더니 관솔에서 나는 솔향기 같은 것이 맡아졌다. 조심스레 부엌으로 가져갔다. ‘가미사마(神樣, 신의 높임말 )님, 세상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중얼거리며 아궁이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첫댓글 마지막 문장에 피식 웃음이 터집니다. 참 재미난 글이네요. 현장감이 살아있어서 마치 무리들 사이에 제가 북이라도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영 선생님,
격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