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이 있는 집
그곳을 떠난 후 십여 년 만이었다. 나고 자란 13년 세월 동안 가까이 지낸 유일한 이웃, 미숙이네 집을 찾아가며 설레는 가슴을 다독였다. 우리 집 보다 더 고향 같았던 그 집, 풍금이 있고 가을햇살처럼 환하고 풍성했던 집, 동네에 들어서면서 공연히 들뜨는 내 마음과 달리 너무나 변해버린 주변이 어쩐지 불길했다.
검은 코르타르로 칠한 미숙이네 집 양철 대문은 여전히 무거웠다. 문득 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부르던 조그만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순이 언니~~”
“그래, 들어와라”
환청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저녁 무렵 어스름이 깔린 집안은 괴괴하기 짝이 없었다. 희미한 백열구가 비치는 대청마루는 가까이 가보니 예전의 윤기는 간 곳 없이 낡고 초라했다. 3대가 같이 살던 가족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 집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야야, 어서 와라, 어째 이리 오랜만에 왔다냐,”
반갑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눈은 거의 감기다시피 가늘었다. 대청 깊숙이 들어온 환한 햇살을 의지해 무릎에 누운 할머니의 속눈썹을 뽑아주던 기순이 언니도 없다. 눈썹이 안쪽으로 자라 찌르는 고통에 힘들었던 할머니. 이미 시집을 갔을 기순이 언니대신 이제 누가 그 일을 해줄까. 뿐만 아니라 앳된 얼굴에 순하디 순하던 미숙이 엄마는 왜 안 보이는 걸까. 정말 무던하고 순종적이던 며느리였는데….
어둑한 방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반지르르하던 세간은 살림꾼의 손길을 잃은 지 오래인 듯 쓸쓸한 쇠락의 기운이 흐릿한 불빛 아래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그 많던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윗방을 터서 기다란 장방형으로 만든 안방에는 항상 밥상이 세 개씩 차려졌다. 아랫목은 남자어른들이 차지한 둥근 상, 가운데쯤에는 할머니와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맨 윗목에 놓인 상은 여자들 몫이었다. 위계질서의 끝판이었던 그 집의 식사시간은 한상에 둘러 앉아 먹던 우리 집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나도 모르겄다. 무슨 교에 미쳐서 다들 거기 갔겄지….”
“나, 천주교 나간다.”
“암만혀도 나 죽고 나면 젯밥 한 그릇 못 얻어먹을 것 같아서….‘
드문드문 이어지는 할머니의 하소연이 그간의 사정을 짐작케 했다. 언제부터 며느리가 특정 종교에 빠졌다. 그녀는 현생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재물도 다 하늘나라에 쌓아야 한다며 가구나 살림살이 하나 바꾸지 않았다. 장롱 문짝이 삐걱거려도 그냥 산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생일조차 챙기지 않아 할머니 혼자 용단을 내려 천주교를 택하셨다고 한다.
“애들은요?”
나는 우선 같이 놀던 아이들이 궁금했다. 또래 젊은이들이니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믿을 수 없었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버렸다니 변해버린 자손들이 할머니는 얼마나 두렵고 외로우셨을까. 그 순하던 미숙이 엄마에게 그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여경 출신이라는 전력의 힘이 비로소 실감났다.
정부미 보관 창고업을 하면서 농사도 짓던 미숙이네는 특히 가을이면 날마다 타작마당이 벌어졌다. 펼쳐놓은 멍석 위에는 거두어들인 볏단들이 도리깨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고 마당 한쪽에서는 탈곡기가 달달거리며 낟알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밝은 햇살 속으로 곡식검불이 춤추듯 공중을 떠다니는 모습은, 마당 가득 떠도는 쌉쌀한 향기와 더불어 높은 가을하늘에 닿을 만큼 신명을 돋우었다.
밀을 추수하면 널어놓은 밀알을 한 움큼 입에 넣고 한참을 씹으면 껌이 되는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농사를 짓지 않은 우리 집은 미숙이네 가을행사가 내 집 일인 양 즐겁고 신이 났다.
방안퉁수 소리를 들을 만큼 집에서만 혼자 놀던 내 유년시절, 유일한 놀이터였던 미숙이네 집엔 풍금이 있었다. 미숙이 고모가 그것을 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냥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가슴을 뛰게 하던 풍금, 그 방은 성지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 뒷문을 빠져나와 한 집만 건너가면 미숙이네 양철대문 앞이다, 그냥 놀러갈 때와 달리 풍금이 만지고 싶은 날이면 그 앞에 서서 기순이 언니를 불렀다. 미숙이를 부르거나 걔네 오빠 상현이를 부르는 대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기순이 언니~~’ 하면 언니는 벌써 알아듣고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조심스럽게 아랫방 장지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무 발판 두 개가 얌전히 매달려있는 풍금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의자에 앉아 발판에 두 발을 올려놓고 번갈아 밟아 가며 건반을 뜻 없이 누르기 시작하면 무표정하던 건반에서 바람이 부는 피리소리 같은 아름다운 음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아이의 작은 발은 쉴 새 없이 페달을 밟고 조그만 손가락은 부지런히 하얀 건반 위에서 춤을 추건만 풍금은 곡조 없는 노래만 부르고 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즐겁고 행복했다. 한참을 그렇게 풍금과 놀다가 아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풍금의 덮개를 아쉽게 내려 닫고 다시 장지문을 열고 나온다.
“다 했어?”
“네”
“또 와”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바뀌도록 풍금은 내 소중한 벗이었다.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그 동네를 떠났다. 풍금 소리처럼 나의 그리움도 부질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몇 해 전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다. 기순이 언니가 나를 보고 싶어한단다. 끝내 만나지는 못했지만 낡은 풍금의 추억이 새삼 살아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에 내려서자 흑백필름처럼 지난 일들이 눈앞을 스쳤다. 아랫방은 불이 꺼진 채로 인기척이 없다. 아직 그 풍금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오래 전 일이라 형체도 없이 스러지고 없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더 바랄 게 없이 따뜻하고 풍요롭던 한 가정의 온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고향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도대체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잊게 만드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면 내가 믿던 종교는 인본주의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인간세상에서 인본주의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곡조 없는 풍금소리를 좋아하던 그 시절은 지난날이 되었지만 어쩐지 그 그리움의 맛은 썼고 한 가정의 평온을 깨버린 종교적 맹목성은 더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