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일기장을 태우며 / 안지영
시어머님은 다음 달에 결혼하신다. 어린 나이에 아버님과 결혼해 29년을 사셨다.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13년을 외롭게 지내시다가, 얼마 전 소개로 만난 분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렬히 연애하는 중이신데, 이건 내 추측이 아니라 그런 감정이 이 나이에도 생길 줄은 몰랐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안다.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러 어머님 댁으로 건너갔다. 오랜 세월 묵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님은 작은 방 책꽂이에서 낡은 노트 예닐곱 권을 꺼내시더니, 시누이에게 주며 버리라고 하셨다. 그것을 받아들고 거실로 나간 시누이는 그 뒤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작은 방 정리를 대충 끝내고 거실로 나가보니, 시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일기장인 듯하다. 몇 년 전에 나도 그 노트를 우연히 펼쳐본 적이 있었다. 남의 일기장인 줄을 모르고 그랬던 것인데, 두어 줄 읽어보고는 도로 넣어놨었다.
잠깐 사이에 눈에 들어온, ‘방에 들어가 눈물을 쏟고 나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다’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머님은 남편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토록 울 일이 뭐였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시누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지 꼼짝 않고 앉아서 한참을 읽다가 나에게 주며, 태울 수 있으면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돌아왔다. 어머님 댁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마당 한쪽에 놓아둔 일기장에 눈이 갔다. 그것들을 들고 밭으로 가서 풀숲에 내려놓았다. 한 장씩은 아니더라도 몇 장씩 쓰레기와 함께 불을 붙였더니 잘 타지 않았다. 막대기를 찾아내 노트를 헤집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나의 OO…, 부대로 돌아왔다….’
어머님의 일기장인 줄로 알았는데, 아버님의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분의 교환일기인 듯하다. 노트의 가장자리에는 이미 불꽃이 일고 있었다. 급히 불을 끄고, 시누이가 어머님의 거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쪼그리고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경북이 고향인 아버님은 포천에서 군 생활을 하셨다. 아리따운 동네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제대하자마자 결혼했다고 알고 있다. 일기장에는 두 분의 연애 시절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님의 뱃속에서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마침, 시(市)에서 주최하는 <독서토론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어머님의 일기장에는 선정된 책과 일치하는 내용이 있었다. 토론회를 위한 ‘계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되기도 했다.
열일곱 살에 부모가 된 미라와 대수, 그리고 이들이 청춘 대신 얻게 된 아이 아름이가 있다. 아름이는 부모보다 빨리 늙어간다. 열일곱에 여든의 육체를 갖고 있다. 이들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인 청춘을 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아름이는 죽기 전에 부모의 사라진 청춘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한다. 누구의 것보다 진하고, 뜨겁고, 찬란한 청춘을 글로 써내려간다. 그것을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죽게 된다. 소설의 제목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어떤 인생이건 두근대게 하는 불안과 설렘이 있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미라와 꼭 그 나이에 엄마가 된 시어머님. 자신을 책임지기에도 벅찬 나이일 텐데, 엄마가 되어 다른 생명을 책임져야 했던 삶. 그리고 누리지 못한 청춘을 들여다본다.
소설에서의 미라는 임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임기 여성의 자신만만함과 자랑스러움이 그득했다. 어린 여자가 어떻게 엄마의 마음을 갖게 되는지, 솔직히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궁금했다. 어머님도 미라처럼 자신만만했을까. 지금의 내 남편인 뱃속의 아기도 아름이처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부모를 설레게 했을까.
일기장에는 아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대부분 아직 군 복무 중인 아버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울고, 편지가 오지 않아서 울고, 아버님이 갑자기 찾아오면 너무 좋아서 울었다고.
미라의 심정은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댔고, 어머님의 심정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두근댔나 보다. 미라와 어머님 간에 어떠한 연관성을 찾아내지도,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한 채 일기장을 불살라 버려야 했다.
두 분의 역사가 기록된 노트를 이리 쉽게 없애도 되는가, 죄를 짓는 기분과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님과 그분의 딸조차 불태워버리라고 준 일기장에 며느리인 내가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때 그토록 뜨겁고, 애틋하고, 눈물 나던 날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나에게도 오래된 기록들이 있다. 종이상자에 담긴 채 손길이 안 닿는 구석에 있는 그것들을 없애버려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무슨 미련이 있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일기장을 버리는 순간, 내 과거도 함께 사라지고 말 거라는 막연한 불안일까. 내가 붙잡아야 할 만큼 대단한 게 있기라도 한가.
어머님의 날들은 일기장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추억으로 외로운 시간을 견디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이 문을 열고 어머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자, 30년 묵은 사랑의 기억은 슬며시 마음의 자리를 내줬다. 어머님이 바라는 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닌…. 어딘가로 스며들 것만 같은데, 그곳이 어디일까. 내 마음으로도 약간 스며든 듯하다.
어머님의 일기장을 태우면서 내 것들도 이렇게 버려지겠구나, 누군가 태우느라 힘만 들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할 필부의 기록이나, 잘해야 내 자식들이나 한번 읽어 보려는가. 아니, 그것도 욕심일지 모른다. 내 자식이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날들도 날아갈 것은 날아가고, 스며들 것은 어딘가로 스며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