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밖엔 난 몰라
왕린
친구들의 저녁 모임. 접시를 비우기도 전에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로 웃음이 한바탕 퍼붓는 소낙비 같다. 수다를 안주 삼으니 맥주잔이 절로 비워진다. 말들이 뒤섞여 어느 말에 추임새를 넣나 난감할 즈음, 누군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노래방에 가자고 한다. 마냥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일어선다.
일단 노래방에 발을 들였다 하면 예외가 없다. 노래 못 한다는 핑계가 먹히지 않는다. 분위기 깨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노래를 해야 한다.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노래방에 따라 오나 봐라 다짐을 하지만, 무리에서 혼자만 빠지기도 쉽지 않다. 내 팔을 걸어 맨 친구에게 끌려 할 수 없이 노래방 안으로 들어간다.
조명은 뱅뱅 돌고, 에코 찬 목소리 우렁우렁. 나는야 이제부터 잘 나가는 명가수~ 누군가 노래하면 장단 맞춰 흔들어대는 품새 또한 가관이다. 사는 게 별건가. 저런 흥만 있어도 생이 즐거운 것 같다. 노래 못 하고 춤도 못 추는 나는 분위기라도 맞출까 탬버린을 들고 무리에 낀다. 찰찰, 찰찰찰! 뻗정다리로 서서 박자를 맞춰보지만, 나 자신이 멋쩍고 우습다. 모두 나를 보고 웃는 것만 같다. 탬버린을 탁자에 놓고 슬그머니 구석 자리로 숨어든다. 제발 누구도 나한테 눈길 주지 않기를 바라며 꽝꽝 울려대는 노래를 속으로만 따라 부른다.
난데없이 노래 곡목이 적힌 책이 내게 와 있다. 얕은꾀로 옆 친구한테 슬쩍 넘겨놓는데, 어느 순간 또 내 앞이다. 어서 한 곡 골라보라고 재촉하고 서 있는 사람 때문에 건성건성 책장을 넘긴다. 아는 노래가 없다. 남들이 부를 때는 곧잘 따라는 하면서 혼자 부를 용기도 자신도 없다. 혼자 나서면 음정 박자 따로 놀고 몸 따로 노래 따로 인 걸 누가 알랴. 이 많은 노래 중에 자신 있게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것이 속상하다. 친구 팔을 풀지 않고 온 것이 후회스럽지만, 안 올 장에 따라왔으니 소용없는 일이다.
나를 끌고 온 친구가 뜨거운 감자를 얼른 가져간다. 망설임 없이 책장을 넘기더니 앞으로 나가서 ‘사랑밖엔 난 몰라’를 입력한다.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박자를 놓치지 않는 노래다. 아쉬울 때마다 써먹은 터라 이제는 그만 부르고 싶은데…. 그놈의 사랑에 목을 매야할 판이다.
전주가 흐른다. 심장은 벌렁벌렁, 가슴은 콩닥콩닥, 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된다. 언제 노래하지 않으려 몸 사렸나 싶게 전주가 나오는 순간 감정에 푹죽이 터진다. 남들보다 못하는 노래에 한이 있는 걸까. 전생에 못다 한 사랑이라도 있는 걸까. 노래 가사가 적힌 화면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앞으로 다가가 폼을 잡는다. 흥을 돋우기 위해서 누군가 옆으로 나오는 것도 용남하지 않는다. 무대를 혼자 누비겠다는 심사다.
“그~으~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애절한 눈빛, 간드러진 목소리. 낭창낭창해진 몸은 리듬을 타며 흔들리고, 절규하듯 내지르는 목소리에 따려 나온 애간장은 온몸을 감고 돌고. 사랑에 목숨 건 여자, 노래 속에서 비로소 절절하다. 시뻘건 아궁이 속에 던져진 바짝 마른 장작처럼 그렇게 활활. 몰아의 절정이다.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는지. 한판 살풀이 굿이라도 하듯 신명을 내는 너는 누구더냐. 엑스터시. 기진맥진. 그대로 숨이 넘어 가버릴 것 같다. 가슴팍이 뻐근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서 있을 수도 없다.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큼은 나는 정말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가 된다.
‘사랑밖엔 난 몰라’는 내 노래다.
첫댓글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 낭창낭창 간들간들한 왕린샘 노래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