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랩 시선] 아이들의 ‘놀 권리’ 상실, 정말 방치해도 되나
한국과 학업성취도 유사 핀란드 청소년 89% “취미활동”…UN협약 무색한 국내 교육 현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양모(13)군은 아침 7시 30분경에 일어나 8시 50분까지 학교로 간다. 6학년인 양군이 일반적으로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는 시간은 오후2시 30분경. 집으로 가 간단한 간식을 먹거나 가방만 풀고 곧장 수학학원으로 향한다. 오후 3시 30분부터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한 뒤, 음악 학원에 가 피아노를 치며 다시 1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6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저녁을 먹고 학원 숙제를 마치면 11시쯤에 잠들기 전까지 남는 시간은 별로 없다.
중학교 3학년인 박모(16)양은 이보다 더 바쁘다. 서울 용산구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박 양은 8시까지 등교를 해 오후 3~4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 이후 1주일에 다섯 번 다니는 과외나 종합학원에서 저녁7시반까지 시간을 보낸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스터디 카페에 가 11시 30분까지 공부하며 하루를 보낸다. 틈새 시간에는 하는 게임이 유일한 여가다.
그래도 박양은 “친구들에 비해 널널한 편”이라고 자평한다. “친구들은 학원 시간을 따로 조정하지 않는 이상 놀지도 못하고 저녁도 학원에서 먹는다”는 것이다. “매일 이런 생활을 반복하니 갑갑하다”는 박양의 입에서는 “친구들과 놀거나 혼자 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이 절로 나온다. “다들 학교가 끝나도 학원으로 쫓기듯 가야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압박감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없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마음은 어떨까. 서울 노원구에서 중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강수미(50·여)씨는 이런 현실에 대해 “옛날처럼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안타깝지만, 남들은 다 하는데 내 자식만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통계로 보면 학생들의 바쁜 삶이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6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 아동종합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동(9-17세)은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못하고 있고(희망 42.9% vs 실제 18.6%), 학원‧과외(희망 25.2% vs 실제 54.0%)와 집에서 숙제하기(희망 18.4% vs 실제 35.2%)를 원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에 비해 특히 두드러진 항목은 ‘친구들하고 놀기’와 ‘신체활동 또는 운동하기’였는데, 과거 조사에서는 두 항목의 현실과 희망의 차이가 각각 18.9%, 8.9%였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그 차이가 각각 24.3%, 12.2%로 희망과 현실의 차이가 커졌다.
(출처 = 보건복지부 ‘2023년 아동종합실태조사 결과’, 화면캡쳐)
해외국가들과 비교하면 ‘학업’에 ‘놀기’의 균형을 상실한 국내 아동·청소년의 교육 실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발표한 교육지표에 따르면, OECD 평균 공공 의무 교육시간은 초등교육 연간 총 4천830시간, 중등교육은 총 2천748시간으로 나왔다. 하지만 한국은 초등교육이 총 3천930시간, 중등교육은 2천256시간인 것으로 나타났다.
앞선 보건복지부의 통계를 보면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지만 공교육 시간이 OECD 평균보다 적은 것은 그만큼 국내 아동·청소년의 사교육 시간이 늘어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2024년 아동행복지수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이들 중 57.3%가 선행학습을 위해 주말에도 학원을 다니고 있다. 또 가족이 대화할 때 공부를 주제로만 대화하는 등 ‘공부압박을 받는 아이들’의 아동행복지수는 44.16점으로 그렇지 않은 아이들(45.95점)에 비해 낮았다. 게다가 이러한 아이들은 우울·불안을 더 느끼고 자살 생각을 떠올린 경우도 2%p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매년 우리나라 아이들의 충동적 자살 생각, 우울 및 불안은 꾸준히 증가하고 자아존중감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2024년 아동행복지수 생활시간조사 결과’, 화면캡쳐)
아동·청소년에게 여가와 휴식 시간 대신, 미래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불어 넣으며 공부를 시킨 결과,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OECD에서 주관한 ‘2022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 따르면 한국은 37개 회원국 중 수학 1~2위, 읽기 1~7위, 과학 2~4위에 오르는 등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였다.
(출처 = 교육부 공식 블로그, 화면캡쳐)
그런데 한국과 같이 이러한 지표에서 늘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는 핀란드 학생들의 생활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눈길을 끈다. 우선, 한국과 핀란드는 의무교육 기간이 상당히 흡사하다. 하지만 2017년 OECD의 PISA 결과에 따르면 주당 공부 시간이 “40시간 이내”라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은 핀란드 73.3%, 한국이 27.8%다. 학업 성취도는 비슷하지만 생활 내용이 크게 다르다.
2020년 교육정책네트워크 정보센터가 ‘핀란드 청소년 연구 네트워크’의 ‘핀란드 초·중등학교 학생의 방과 후 일과’ 보고서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핀란드 미성년자의 89%가 취미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일종의 스포츠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그들이 갖는 개인 시간에는 이런 취미 생활뿐만이 아니라 휴식이 포함된다. 틈나느느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것이 고작인 한국의 학생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보내면서도, 학업 성취도는 높은 것이다.
1989년 11월 20일 유엔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UN아동권리협약’은 ‘18세 미만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 등을 담은 국제적인 약속이다. 우리나라는 1991년 11월 20일 비준한 이 협약의 내용 중 제 31조를 보면, ‘아동은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자신의 연령에 적합한 놀이 및 예술과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아동의 놀 권리에 대한 국제협약이 점점 무색해지는 국내 교육 현실에 대해 어른 모두가 손 놓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에 미래에 대한 부담감만 지우는 사교육 열풍과 균형을 잃은 교육 현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재화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