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영광
영광은 그리스어로 ‘하느님의 무게, 하느님의 광채, 하느님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을 가리켜 쓴 말이 아닙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놀라운 대자연도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이 영광은 정확히 눈에 보이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타보르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실 때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조금만 드러나도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하게 영적으로 느껴지면서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임재, 어루만지심, 아름답고 뜨겁게 기름 부으심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사목자의 생활을 한 지난 12년 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미사와 모임 현장에서 하느님의 강렬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완고한 사람이 조금씩 말씀으로 변해갈 때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의 드러남입니다. 오늘날의 천주교회의 안타까움은 기적,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감격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중국 지하 교회나 아프리카 교회, 제3세계 교회들은 상황은 열악한데, 초대교회 때와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폭발하고 있고, 거기에 대해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한은 ‘영광’(gloria)이라는 단어를 18번이나 썼고, ‘영광을 돌리다’라는 동사를 무려 23번이나 썼다. 이것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을 생각하나요? 피나는 훈련의 결과로 큰 대회의 우승컵을 손에 쥔 스포츠 팀이나,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도열하는데 군악대가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걸어 나오는 제왕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영광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영광은 가장 낮고 겸손한 섬김에 있었습니다. 하늘나라 어좌를 버리고 낮고 더러운 땅으로 내려오신 그 겸손, 변덕스럽고, 감사할 줄 모르며, 불성실하고, 이기적이고, 독기 어린 죄인들을 참아 주시고 품어 주신 그 인내. 말 한마디면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이 땅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그 많은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지고 십자가로 가신 그 사랑. 요한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상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영광의 모습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영광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 혼자 하신 일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합작품임을 말해 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큼이나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음을 우린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드님을 내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압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으면 아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17,4)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철저하게 하느님 뜻만 순종하며, 하느님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 분이셨습니다.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이름 없는 목수로서 조용히 보내셨고, 40일 단식기도 후에 광야로 가셔서 유혹을 받으셨고, 정말 무식하고 자기 개성 강한 제자들을 사랑해 주시고,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하느님의 뜻이면 군소리 없이 즉시로 기쁘게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는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무리 위대하고 큰일을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 같아도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영광이다
우린 보통 십자가 하면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동정하기까지 감정적이 되기 쉬운데, 성경은 특히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비극적인 측면보다는 십자가의 영광을 강조합니다. 왜일까요?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벽을 준비하는 어둠처럼 부활을 예비하는 준비 작업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5)
십자가를 통해 본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에 결정타를 날리시고, 승리의 임금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바꿔 버렸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다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생기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자리에 컴백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다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주신 어떤 사명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각자의 십자가는 우리의 시간, 재주, 돈, 관계,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불사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린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크신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전제되어야 인간을 위한 기도가 열린다
주님의 ‘대사제의 기도’의 첫 도입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핵심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극치는 바로 십자가였고, 하느님의 리듬에 맞춰 사시던 주님의 인생의 절정도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망가졌던 인류의 영적 운명을 다시 세상이 생기기 전의 영광으로 회복시킨 것은 바로 그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사제의 기도에서 당신의 기도를 제일 먼저 하신 것은 아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전제되어야 인간의 문제의 근본이 풀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기초가 되어야 참되고 거룩한 인간관계의 지평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혈의 힘이 아니고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하고 품어 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일단 길을 닦아야 다른 모든 것들이 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실 준비를 하신 뒤에야, 주님께서는 바로 이 땅에 남겨 두고 갈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람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오래, 열심히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를 완전히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음을 의심 없이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영광의 빛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감탄해야 합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기도가 응답 받을 줄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빛나는 십자가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영광의 광채가 내가 기도하는 공간 전체를 채우는 것을 나는 몇 번씩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경험하면 내 기도 속에 남아 있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독소들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나의 언어가 얼어붙고 하늘의 감동이 촉촉이 내 영혼을 적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주님의 영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모든 기도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주님의 영광은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우리는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신 주님께서는 이제 곧 이 악하고 더러운 세상을 심판하러 돌아오실 심판의 하느님이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살았던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다 십자가의 열매로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움직여 왔습니다. 복음화는 십자가의 복음을 곳곳에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영향력으로 만든 역사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욕심과 음란과 폭력의 문명을 만들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까지 인간들의 방자함을 묵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든 기도의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의 종말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선포하실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느님의 교회는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순종하면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크신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5)
아멘.
아~~멘.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는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무리 위대하고 큰일을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 같아도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크신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