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도란도란 숨어있는 곳
-영랑 시인의 생가에서-
빈약한 상상력과 감성의 메마름 때문일까, 아니면 준비되지 않은 자의 어설픔 때문일까. 생가 방문은 내게 그리 흔한 일이 아니어서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시간이 박제된 생가에서는 촉수가 여간 예민하지 않으면 그 집의 주인공과 교감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진문학기행 1박2일의 마지막 코스. 버스가 영랑생가 앞에 일행을 내려놓는데 조금 의외였다. 제법 규모가 짱짱한 동네였다. 생가라면 한적한 곳에 외따로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은 지레짐작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멀리 조금 높은 지대, 수풀에 둘러싸인 몇 채의 초가지붕은 그 아래 마을을 감싸 안 듯 포근해보였다. 평범한 마을풍경을 살려주는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무딘 촉수는 차라리 집어넣어버리자. 보자마자 단번에 마음에 들어 와버린 풍경을 그냥 누리고 즐기리라.
일행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뒤처져 머뭇거리다 발견한 돌비. 이제부터는 시인의 숨결을 여기저기서 만나겠지만 맨 먼저 눈에 들어온 시비는 어쩌면 마중물이었다. 알 수 없는 출렁거림이 가슴 저 아래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내마음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예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정감어린 시어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영랑의 시는 그저 ‘모란이 피기까지’ 하나로 아는 체 하며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가을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잊지 않고 한 마디 하면서도 영랑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돌이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시의 첫 구절이 아주 익숙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는 동요 ‘꽃동네 새동네’.
‘뜰아래 반짝이는 햇살 같이 창가에 속삭이는 별빛같이'
아마 영랑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첫 구절의 노랫말과 운율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짙푸른 담쟁이로 뒤덮인 담벼락 아래 위치한 돌비 옆에서 사진 한 장 찍다 보니 강의에 늦었다. 커다란 은행나무 가지가 우산처럼 펼쳐 그늘을 드리운 담장 안은 더할 수 없이 쾌적한 야외강의실이었다.
시문학파기념관 김 선기 관장의 강의를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듣지 못했다. 사실 빠트린 내용은 나중에 받은 책자와 여러 자료를 통해 보충할 수 있으리라. 그 시간 햇살 환한 생가의 모습을 눈에 담아 두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 같다.
나지막한 뒷산에 우거진 수풀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수런거리며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햇살 환한 경내, 깔끔하고 단아한 초가지붕의 안채에서는 어린 윤식의 행복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문학과 시를 사랑하는 벗들과 담소를 나누던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의 녹슨 농기구들이 시인의 삶을 좀 더 실감나게 비쳐주었다.
모란을 심어주며 꽃의 아름다움과 그 뿌리의 쓸모까지 가르치던 아버지의 풍류는 그대로 아들에게 대물림되었던 것 같다. 영랑이 특히 음악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고 즐겼다는 일화를 알게 되자 시인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서양의 행복했던 음악가 멘델스존이 생각났다.
물론 나중에는 비운의 시국에서 고초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시인의 생가는 밝고 환해서 행복한 느낌을 주었다.
시인 영랑은 그날 나와 함께 있었다. 오후의 환한 햇살로, 햇빛과 바람에 간지럼 타며 살랑거리는 무수한 나뭇잎으로, 초가지붕의 둥글고도 소박한 정다움으로 다가와 속삭이고 있었다. '이 집은 마음이 도란도란 숨어있는 곳'이라고. 생가의 풍경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시인의 시혼, 그대로였다.
‘시인은 1903년 이 집에서 태어났고 1948년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다른 사람들에게 전매되었지만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하여 2007년 10월 도지정 문화재에서 국가지정 문화재인 중요민속자로(제252호)로 승격되었다.’
이런 유래를 알고 나자 그의 시심처럼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잘 보존된 생가의 전모가 새삼 고마웠다. 후대에 전하는 정신적 유산으로서 생가의 존재의미가 돋보였다고나 할까.
맑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자애로운 부모님, 그리고 음악을 즐기며 유복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일제 탄압에 굴하지 않아 끊임없이 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하며 억압적 신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맑게 투영한 탁월한 서정시를 쓴 이 시인은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연물에 대한 순정한 심정을 투사함으로써, 고요한 내면을 지순한 언어로 표상한 점이 특징이다.’
그의 시에 대한 해석을 봐도 그렇고 선생의 시 세계는 어쩐지 나의 문학관과 같아서 더욱 반갑고 친밀한 마음이었다. 더구나 그가 독립만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뜻을 같이한 시인들과 시전문지 《시문학》을 창간한 것을 보면 그는 그저 순수 서정시를 쓰는 데 그치지 않은 행동하고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던 게다.
시전문지 《시문학》은 시대가 낳은 문학적 계파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순수문학을 지켜내어 이념이나 감상적 낭만주의 사조에서 벗어나 이 땅에 본격적인 순수문학을 뿌리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생가 옆에 잘 꾸며진 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시문학파 시인들(김용식,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의 족적과 육필원고, 그리고 창간호부터 3집까지 이어졌던 시전문지 《시문학》의 초판본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행적과 업적보다도 그야말로 ‘애끈히’ 마음에 남아있는 그의 인간적 모습에 더 울림이 컸다.
그 시대의 관행이었겠지만 14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야 했던 시인은 자신의 꿈밖에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두 살 연상인 아내는 누이 같기만 했고 그나마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 부부로서 살뜰히 대해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2년 후 아내가 유명을 달리하자 마음이 많이 아팠던 그는 ‘쓸쓸한 뫼 앞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쓸쓸한 뫼 앞에 호젓이 앉으면/ 마음은 가라앉은 양금줄 같이/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은 향 맑은 여옥상 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그의 시에서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이 흐르는 강물’*은 어쩌면 가슴 깊이 숨어있는 시인의 슬픔이 아니었을까. 동심과 시심으로, 그리고 ‘애끈한’ 아픔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생가 방문이었다.
*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서
* ‘애끈한’ 四行小曲 7首 중 두 번째에서 인용
첫댓글 강진문학기행 다녀화서 영랑생가 방문 후기를 《에세이문학》에 게재했었어요.
자유게시판의 [최영미의 어떤 시]에 인용한 글이 원문과 사뭇 다른 듯 느껴지기에.
따스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오르는 글이네요.
담쟁이 뒤덮인 담도 생각나고 부신 햇살도 느껴지는, 사진까지 곁들이니 더 좋습니다.
참 좋았지요? 그 시간도 동행했던 분들도 다 그립네요.